책 만권을 읽으면..

우파니샤드/이재숙 풀어씀

다림영 2010. 3. 30.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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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중에서

 

우파니샤드는 "나는 누구인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탐구심이 만든 고대 인도의 고전이다. ..

우파니샤드는 어느 한 사람이 슨 철학 책이 아니다.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선지자들의 사색이 이것을 만들어냈다. 수백 년이나 걸려 우파니샤드가 형성되는 동안, 그 내용에 일관성이 부족하거나 서술 방식이 체계적이지 못한 문제도 생겼지만, 존재나 삶에 대해 새로 고민하기 시작한 새로운 세대에게는 언제나 등불과 같은 구실을 해왔다

 

자기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고 해결하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 고대 인도에서는 이렇게 자기자신에 대해서 자기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삶을 보는 방법<clarshana>', 즉 철학이라고 했다.철학은 서양에서처럼 '지혜에 대한 사랑<philo sophia>'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삶을 보는 방법'이기도 하다. 지혜에 대한 사랑 역시 결국은 삶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 중에서

 

"그것은 마치 물에 소금 덩어리를 풀어 놓았을 때 소금이 물속에 녹아드는 것과 같다오. 이때 손으로는 물속에서 소금을 잡을 수 없지만 물의 어느 부분을 취해보든, 그 맛이 소금 맛이 아니겠소. 그처럼 위대한 존재, 끝이 없고 , 경계가 없는 그 <근원존재>는 '의식'으로 세상 속에 녹아들어 있다오. 세상의 생명체들이 모두 합쳐져 생겨났다가 다시 그 생겨난 곳으로 사라지는 것이니, 그것을 알고 나면 더 이상<개별적인>의식은 없다오. 이것이 내가 그대에게 말하고자 한 것이오."<브리하다란야까 우파니샤드 제 2장 4편 12절>

자신의 참모습을 알든 알지 못하든 간에 존재들은 근원 존재에서 생겨나고 근원 존재로 다시 소멸되기를, 장작불에서 튕겨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는 불똥처럼 반복한다. 이것을 알게 되면  더 이상 반복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불똥이 튕겨 나오지 않게 되는 것이다.

 

..

동쪽으로 흐르는 강들은 동쪽으로 가고, 서쪽으로 흐르는 강들은 서쪽으로 가니, 그들은 바다에서 나와서 바다 그 자체로 가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다시 바다와 하나가 된다. 그러나 그들은 개별의식. 즉 '나는 이 강' '나는 저 강'이라고 의식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 존재에서 나온 이 세상 모든 것도 '우리가 그 존재에서 나왔다'고 깨닫지는 못한다. 다만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았든 간에 호랑이, 사자 이리, 돼지, 곤충 ,여치, 파리, 혹은 모기 , 그 무엇이었든 간에 모두 그 존재 자체가 되는 것이다.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제 6장 10편 1절~2절>

 

"이 소금을 물에 담그고, 내일 아침에 와 보아라."

아들은 그대로 했다.

아침이 되자 아버지는 아들 슈웨따께뚜에게 말했다.

"네가 어젯밤에 담가 두었던 소금을 꺼내거라."

아들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소금을 찾을 수 없었다.

"총명한 아들아, 소금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소금은 그대로 그 안에 있다.

이제 맨 위 표면에 있는 물의 맛을 보거라.

맛이 어떠냐?"

"잡니다."

"그럼 물속 중간쯤에 있는 물의 맛을 보아라."

"짭니다."

"그래 , 그 물을 버리고 다시 내게 오너라."

아버지 말씀에 따라 물을 버리면서 슈웨따께뚜는 생각했다.

'소금은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계속 그 안에 있었구나.'

"네가 그 존재를 볼 수는 없지만 그 존재는 여기 있는 것이다."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제 6장 13편 1절~2절>

..

 

소금물의 핵심은 바로 소금이다. 그럼 사람의 핵심은 무엇일까?바로 모습도, 소리도, 흔적도 없는 아뜨만이다. 소금처럼 맛이 있다면 혀로 알 수 있겠지만, 아뜨만에 대해 우리의 감각이 느낄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뜨만은 감각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마음을 비우고 아무런 잡념도 없는 순수한 상태가 될 수 있다면, 자신 안에 든 자기의 참모습인 아뜨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아뜨만을 깨닫는 일은 정말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근원존재가 소금물 속의 소금 알갱이처럼 해변의 모래 알갱이 같은 무수한 생명체 하나하나에 똑같이, 아무런 차이가 없이 속속 깃들어 있다니.

 

 

변하는 것들로 된 세상

모든 것은 신<브라흐만>으로 덮여 있다.

그러니 인간이여

내버림의 지혜를 가져

어느 누구의 재물도 탐내지 말지어다.

 

인간이여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며

백 년 살아갈 소망을 가질지어다.

그대에게 이 길 말고

업보에 얽매이지 않을 다른 길이 없으리니<이샤 우파니샤드 제 1절~2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환영과 같다고 해서 사실이 아니라거나 거짓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것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킬 때 , 달이 아닌 손가락만 보고 있는 격이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 사는 시간이 영원에 비하면 잠깐이기 때문에 환영과 같다고 표현한 것일 뿐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바로 이 환영과 같은 세상에서 자기 안에 있는 자기의 참모습, 근원과 통하는 자기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 잠깐 존재하든 좀 더 긴 시간 동안 존재하든, 우리에게는 자신의 귀한 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무대라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중심에 있는 아 이뜨만은 쌀알보다도, 보리알보다도, 작은 겨자씨보다도, 조보다도, 껍질을 깐 좁쌀 한 알보다도 더 작도다. 또 나의 중심에 있는 이 아뜨만은 땅보다, 대공<大空>보다, 천상보다, 또는 이 모든 것을 합한 것보다 더 크도다.<찬도기야 우파니샤드 제 3장 14편 3절>

 

우리는 마음을 어떻게 갖는가에 따라 운명이나 능력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아뜨만이 가장 작은 존재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존재이기도 하듯이, 인간은 어쩌면 처음부터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100%가능성을 가진 존재들인지도 모른다.그래서 자만심이라는 곳곳의 함정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만심이야말로 가능성을 없애는, 참존재에 도달하는 길을 막는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단계에 이르게 하는 것을

'요가'라고 부른다.

구도자는 조금의 자만심도 갖지 않는 경지에 이를 수 있나니

요가로서 마음의 내달림과 평온함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까타 우파니샤드 제 3부1장10절~11절>

 

 

자세나 스트레칭 같은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마음과 감각을 통제하는 것을 요가라고 한다. 요가라는 말은 원래'yuj'<붙잡아 매다>'라는 말에서 나왔다. 말을 몰고 가는 사람이 말고삐로 말을 통제하는 것처럼 마음을 한 곳에 붙잡아 매고 생각을 모두 붙잡아 맨다는 뜻이다.

그래서 여기저기 방황하거나 현혹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자기 참모습이란 세상의 참모습이고 모든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에, 이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인생을 사는 목적이다. 목적을 달성한 사람은 다시 고통의 바다인 이세상에 태어나지도 않고 완전히 자유로운 행복 속에서 내것 네것 따질 필요 없는 전체의식, 즉 생명의 근원자체로 돌아가게 된다.

 

 

 

우파니샤트는 '비밀스런 지혜'로 전해진다.'우파<upa>'는'가까이','니<ni>는 '아래로', '샤드<sad>'는 '앉는다'로서 '가깝게 아래로 내려 앉는다'는 뜻이다.

다시말해 아무에게나 말하지 않는 비밀처럼 은밀하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것은 자격을 갖춘 스승과 자격을 갖춘 제자 사이에서, 즉 스승이 아끼는 제자에게 무릎이 닿도록 가가이 앉아 비밀스럽게 전해주는 지혜인 것이다.

..

불교는 우파니샤드의 주제를 공유하기는 했지만, 존재의 참모습<아뜨만> 이 아닌 '공空'을 추구했다. 부처는 이러한 문제를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했다. 우파니샤드가 삶의 고통을 나의 완성<존재의 참모습 발견>을 통해서 극복하려고 했다면, 불교는 그것을 '나'에 연결된 집착을 버림으로서 이룩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이재숙:한국외국어대학교 인도어과졸업.인도 델리대학원 산스끄리뜨 학과에서 철학박사학위취득. 현 한국외대와 경희대 산스끄리뜨, 인도철학, 인도문학사 강의. 산스끄리뜨원번 번역 인도학 연구. 주요논문 <산스끄리뜨문헌의 언어철학적 요소><상까라의 헛됨>과 불교의 찰나설. <마누법전의 다르마 사상>,<인도 대서사시의 종교문학적 성격:마하바라따를 중심으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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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파에 시달리는 일들은 무덤에 가기전까지 지속될 것이다.

요즘 나는 집착을 버리고 빈마음이 되는 것에 생각이 닿아있다.

이러한 때 '우파니샤드'를 읽게 되었다.

모든 것에 현혹되지 않고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평온함을 유지하는

그 근원에 도달해야 하는 것....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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