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저 연숙이랑 헤어졌습니다. 아니, 연숙이가 일방적으로 다른 남자가 더 좋다고 저를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제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요. 너무나 마음이 아파 심장이 꼬깃꼬깃 졸아들어 아주 딱딱한 차돌멩이가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선생님, 어느 유행가 가사에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요'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쓰신 어느 글에도 '아프게 짝사랑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노래도, 선생님도 다 허위입니다. 떠나간 사람에 대한 지독한 그리움은 너무나 아파서 절대로 감사할 수 없습니다.
짝사랑의 고통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숨이 턱턱 막히고 지독한 두통으로 구역질이 납니다.
선생님, 여전히 제 마음을 가닥가닥 모조리 휘어잡고 휘두르고 있는 연숙이를 어떻게 내쫒아 버려야 할지요. 어제 연숙이와 함께 가던 음악카페를 지나는데, 이제는 그곳에서 더 이상 기다릴 사람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눈을 감으면 그 애가 턱을 쳐들고 해맑게 웃던 모습만 보입니다.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선생님 , 절 구해 주세요.
지난 여름 준영이는 낭떠러지에 매달려 필사적으로 소리치듯 '구해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준영이는 나의 고등학교 동창인 명애의 아들이자 작년에 내 교양영어 수업을 들은 제자이기도 하다. 같은 과목을 수강하던 연숙이를 열렬하게 쫒아다녔지만 예쁘고 새침한 연숙이가 마음을 열지 않아 안타가워하더니 학기가 끝날 무렵에는 연숙이도 준영이의 구애에 감동받아 소위 말하는 '캠퍼스 커플'이 되었고, 가끔씩 손잡고 다니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영작 숙제를 내주면 그저 짧은 문장 몇 개로 때우던 준영이가 몇 장에 걸쳐 쓴 편지를 읽으며 조금은 전통적인 '사랑의 증세'에 슬며시 미소짓다가, 그냥 지나치는 사랑의 열병으로 치기에는 묘사가 너무 절박해서 나도 은근히 긴장이 되었다.
사실 나는 준영이가 첫사랑에게 버림받고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잊을 만하면 가끔씩 소식을 주는 명애에게서 아들의 실연에 대해 짤막한 이메일이 왔었기 때문이다.
명애는 '실연당한 자식을 보는 게 이렇게 괴로운 줄은 몰랐단다. 저 싫다고 더난 여자애를 생각하며 밥을 남기는 못난 자식이 너무나 밉고, 그래도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면 또 너무나 마음이 아프단다. 사랑을 버린 죄에 대한 벌이 이렇게 혹독할 줄 알아야 ,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이제도 가끔씩 문득 그 사람이 생각나고 미안한 생각이 든단다'라고 쓰고 있었다.
'사랑을 버린 죄'- 하도 오래전 일이라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명애는 준영 아빠와 결혼하기 전에 당시 민주화 운동을 하던 어떤 남학생과 열렬하게 연애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졸업과 동시에 명애는 오랫동안 사귀던 그 남자 친구와 결별하고 소위 조건이 좋은 준영 아빠랑 결혼했고, 그 남자 친구는 배반의 상처가 너무나 깊어서 자살 소동까지 벌였다.
그런데 너무나 놀라운 사실은, 알고보니 아들 준영이가 목숨 걸고 좋아한 연숙이는 명애에게 버림받고 나서 독일로 유학 간 이후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옛남자 친구의 딸이더라는 것이었다. 암만 생각해도 믿기지 않고 무슨 TV연속극에나 나옴직한 이야기지만, 나는 '인연'이라는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문장 끝에 마침표를 찍듯, 매정하게 끊었던 사랑이 먼 훗날 어떤 인연으로 연결되어 다시 부딪히고 그 마침표는 쉼표, 느낌표로 변하여 문장은 다시 계속되고.... 물론 순전히 우연의 일치였지만, 과거의 사랑을 생각하며 아름다운 추억보다는 죄나 벌을 떠올려야 하는 명애가 가슴 아팠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사랑을 버린 죄'는 마치 가슴 한구석에 무거운 돌을 달아 놓은 듯, 가끔씩 마음을 흔들어 놓는 무게로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나는 '구해달라'는 준영이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써 보냈다.
'준영아, 영국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은 말했단다. "사랑하고 잃는 것이 사랑을 하지 않는 것 보다 낫다<It is better to have loved and lost than not have loved at all>"라고 . 짧은 동안이나마 그렇게 온 마음 다해 사랑할 수 있었던 연숙이를 만난 것 자체가 행운이었다고 생각하렴.....'
사랑의 후유증으로 한 여름 아파하던 준영이는 지금은 군대에 가서 잘 지내고 있다. 아마도 제대할 즈음에는 '선생님, 이제는 저의 대학 1학년을 송두리째 바친 연숙이라는 존재가 흐릿하고 그 애가 턱을 쳐들고 해맑게 웃는 모습이 잘 생각나지 않아 슬픕니다. 그런데 오늘 난 미애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사랑은 버리고 버림받고 만나고 헤어지고 끊엄없이 이어지는 거대한 흐름인가 보다. 때로는 사랑에 상처받고 다시는 사랑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해 보지만 어림도 없는 일, 어느덧 다시 그 흐름에 휩쓸린다.
사랑의 순환처럼 세월도 흘러 어느덧 찰스 강에 낙엽이 하나 둘씩 떨어진다. 치열했던 여름이 지나도 월든 호수에 비친 단풍나무가 가슴 저리도록 아름다운 가을이 왔다. 또한 가을은 찬란한 신파의 계절! 스산한 바람 속에거 떠난 사람을 생각하면서 눈물 한 방울 쯤 떨어뜨려도 괜찮을 것 같은 계절이다.
그리고 사랑을 버린 사람이든 사랑에 버림받은 사람이든, 다시 한 번 가슴 아프게 떠올리며 보석 같은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랑의 추억이 있다는 것은 이 가을에 한껏 누릴 수 있는 커다란 축복이다.
장영희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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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이 글을 그러고 보니 가을에 쓰셨다. 가을이면 더욱 깊은 울림으로 새겨졌으리라. 반쯤 발을 들여 놓은 봄이 깜짝 놀라 숨어버린 3월.. 난로를 잠깐씩 쬐며 그분의 수필집을 들었다. 사랑의 추억이 있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도 커다란 축복이 아닐 수 없는 것이라 말씀하시니 때로 혼자있으며 무료할때 계절이 바뀌며 쓸쓸해져올때 흐르는 냇물과 함께 거닐때.... 보석같은 추억을 가슴에서 꺼내어 보며 행복해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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