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로변 국화밭에서 어머니는 꽃잎을 꾹꾹 눌러 한 광주리 따옵니다. 담장 위에 노란 꽃을 하염없이 널어 놓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 베갯속에서 쌀겨를 털어내고 말린 꽃잎으로 속을 채워드립니다. 나는 그만 쓸슬해져 노래를 부릅니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네
내 동무 어디 두고
이 홀로 앉아서
이 일 저 일을 생각하니
눈물만 흐르네
도시를 떠나지 못한 나는 도시에서 국화를 만나면 자꾸만 샛길로 접어드는 기분이 되지요. 길을 걷다가 빌딩 가에 놓여 있는 국화분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국화를 꼭 쥐었다가 놓습니다. 손바닥을 코에 대어보면 손금 사이로 국화향이 배어 있다가 새어나옵니다.
이따금 국화를 몇 잎 따서 팔소매에 놓고 소매를 접어놓기도 합니다. 오랜 후에 자동응답기에서 당신의 목소릴 듣습니다. 나야, 나 결혼했어.
늦봄, 혹은 초여름. 긴 골목의 장미곷이 만발한 담벼락엑 귀신처럼 몸을 붙이고 나는 피곤하게 중얼거렸습니다.
이젠 나도 내 집으로 가고 싶어. 오랜 후에 자동응답기에서 당신의 목소릴 다시 듣습니다. 나야, 나 딸 낳았어.
더이상 당신의 목소린 들려오지 않습니다. 어디선가, 딸을 데리고 살고 있겠지요. 잠결에 뒤척이다 이마에 손을 얹게 되면 접힌 소매 속에서 향기가 납니다.
꽃은 여전히 순한데 우리는 이제 익명이 되었습니다.
<신경숙의 산문집/아름다운 그늘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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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길을 걸을때면 가끔 함께 나서는 익명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추억은 인생의 순한 향기입니다.
향기가 있어 여정이 더욱 아름답습니다.
길을 나서는 것은 어쩌면 향기와 함께 하기위한 작업일지 모릅니다.
순한향기만 지닌채 우리가 늙어갑니다.
우리의 향기는 길처럼 영원하여 쓸쓸하지만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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