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없습니다. 부유하다고 해서 늘 부유하란 법 없고, 지금 가난하다고 해서 계속 가난하란 법 없습니다. 무상하다는 것은 어떤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의지와 창조적인 노력으로 무엇인가를 축적할 수도 있고,있던 것을 하루아침에 날려 버릴 수도 있습니다 .
우리가 살 만큼 살다가 세상과 작별하게 될 때 무엇이 남습니까? 홀로 있는 자기 자신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지고 가는가? 평소에 지은 업을 가지고 갑니다. 좋은 업이든 나쁜 업이든 평소에 지은 업만 그림자처럼 따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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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떤 말과 행위를 하는가가 곧 다음의 나를 형성합니다. 누군가가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매 순간 스스로가 다음 생의 자신을 만들고 있습니다.
옛 선사의 법문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불도를 배운다는 것은 곧 자기를 배우는 것이다. 자기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자기를 잊어버릴 때 모든 것은 비로소 자기가 된다"
어려운 처지의 이웃을 보고 선뜻 나서서 돕는 일에는 자신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무심코 그런 행동을 하게 됩니다. 남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할 때 비로소 내 마음이 열립니다. 선행이란 그런 것입니다. 개체로부터 전체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누구나 그런 마음은 가지고 있지만 보리심을 발하지 않기 때문에 묵혀 있을 뿐입니다.
먼 길을 가려면 짐이 가벼워야 합니다. 등산만이 아닙니다. 짐이 무거우면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어제 류시화 시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라다크 같은 높은 지대에서 트레킹을 할 때는 고산병이 생길 수 있으므로 미리 대비해서, 물도 배낭 가득 지고 가서 지속적으로 마셔야만 한답니다. 그런데 그 물이 무거우니까 정작 얼마 못가서 한 병씩 버려야 햇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극히 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불필요한 것을 많이 지니면 짐만 무거워져 우리의 발걸음을 주저 앉힙니다.
먼길을 가벼워야 하듯이 한평생 청정한 수행자의 길을 가려면 불필요한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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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기는 아깝고 지니기에는 짐이 되는 것들은 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넘겨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학인시절부터 행해야 합니다. 여기는 배우러 온 곳이기 때문에 그런것부터 배워서 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홀가분합니다.
저는 마음이 흐트러지려고 하거나 이것저것 물건과의 관계에서 갈등이 생길 때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는 법문을 떠올립니다. 모든 선사들이 본래무일물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빈손으로 왔습니다. 또 우리가 한 생각 일으켜서 절에 들어올 때 재산을 가지고 오지는 않습니다. 빈 몸으로 옵니다. 살 만큼 살다가 인연이 다해서 갈 때도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결국 무일물은 물건과 관계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래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떤 목적만을 위해 과정을 소홀히 한다면 한다면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가령 차를 타고 어디로 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가는 동안 많은 사람과 사물을 보면서도 시간 맞춰 목적지까지 가려는 의식 때문에 도중에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목표지점보다는 그곳에 이르는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그 과정이 곧 우리들의 일상이자 순간순간의 삶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삶은 미래가 아닙니다. 지금 이순간입니다. 매 순간의 쌓임이 세월을 이루고 한 생애를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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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자기 중심적으로 살려고 하면 그 길이 막힙니다. 여럿이 어울려 사는 세상이기 때문에 남의 처지를 살펴야 합니다. 관계의 이웃을 고려하여, 그 속에서 자신을 찾고 닦아야 합니다.
옛스님의 글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옳거니 그르거니 상관 말고
산이든 물이든 그대로 두라.
하필이면 서쪽에만 극락세계랴.
흰 구름 걷히면 청산인 것을 .
시시비비를 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될 때로 됩니다. 다 제 길을 가게 됩니다. 모든 것을 있을 자리에 있을 것이기 때문에 , 참견하지 말고 그대로 두라는 말입니다. 극락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분별 망상을 쉬면 본래 자기 모습이 드러납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선지식으로 생각하십시오. 누가 차갑게 대하면 나 자신은 그렇게 차갑게 대한 적이 없는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의 현장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이 순간을 회피하면 자기 존재가 사라집니다. 늘 불확실한 미래 쪽으로 눈을 팔기 때문에, 현재의 자신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행복은 미래의 목표가 아니라 현재의 선택입니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하기로 선택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은 행복하게 살 줄 알아야 합니다.
게으름은 어떻게 해 볼 재간이 없습니다. 부지런해야 합니다.
다시 <법구경>의 구절입니다.
게으름에 빠지지 말라.
육체의 즐거움을 가까이 하지 말라.
게으르지 않고 생각이 깊은 사람은
큰 즐거움을 얻게 되리라.
커다란 침묵과 하나 될 때 내가 사라집니다. 무아의 경지에 듭니다. 어딘가에 순수하게 집중하고 몰입할 때 나라는 존재가 사라집니다. 내가 없는 그 무한한 공간 속에 강물처럼 끝없이 흐르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일입니다.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다고 해서 혼돈 상태가 아닙니다. 정신은 또렷하고 아무 번뇌 망상 없는 그 침묵 속에 강물처럼 흐르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자유가 있지만 궁극적인 자유는 자기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자기 하나의 무게를 어찌하짐 ㅗㅅ해서 이 세상을 도중하차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결국 자기 문제입니다. 자기로부터의 자유는 본질적인 자유입니다.
무엇인가에 집중하는 것은 현재를 최대한으로 사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불행과 슬픔에 젖어 있다면 그는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시간 앞에 아직도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최대한으로 산다면 과거도 미래도 없습니다. 집중력이라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침묵의 세계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삶의 과제들이 주어져 있습니다. 누구에게는 앓는 일로, 누구에게나 재산적 손해로, 또 누구에게는 정신적인 갈등으로. 그것을 딛고 일어서야 합니다. 그래야 생에 연륜이 쌓입니다. 육신의 나이만 먹어서는 동물과 다를 바 없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다가올 때 회피하지 말고 맞닥뜨려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존재에 깊은 물음을 던져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왜 나에게 이런 문제가 닥쳤는가?" 그것을 화두 삼아야 합니다. 자기 삶의 과정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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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을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온갖 집착에서, 작은 명예에서, 사소한 이해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자기를 텅 비울 때 모든 것이 비로소 하나가 되며, 자기를 텅 비울 때 그 어떤 것에도 대립되지 않는 자유로운 자기 자신이 드러납니다. 이를 불교적인 표현으로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합니다. 즉, 텅 비울 때 오묘한 존재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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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타니파타>의 '성인의 장' 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홀로 행하고 게으르지 말며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말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남에게 이끌려 가지 않고
남을 이끄는 사람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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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를 말의 틀에 끼워 맞추려고 하지 마십시오. 나를 지켜보는 그와 떨어져 있지말고 순간순간 그를 의식하면서 그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는 붙잡으려고 하면 멀어지고, 찾으려고 하면 사라집니다.
눈을 안으로 향해야 합니다. 그 안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자신의 목소리 속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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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결국 자기 자신입니다. 빠르게 더 멀리 뛰어 보았자 결국 제자리입니다.자기자신으로 돌아옵니다. 자동차를 타고 갈 때면 저도 가끔 그런 실수를 범합니다. 흔히 도착지를 먼저 생각합니다. 몇 시 까지 어디에 도착하겠다는 집념 때문에 그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목적만을 위해서 수단을 무시하게 됩니다. 교통사고도 거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과정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의 인간으로 성장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나의 씨앗이 ㄷ땅에 묻혀서 꽃피고 열매 맺기까지는 사계절의 순환이 필요합니다. 여기에는 기다림과 그리움이 동반됩니다. 삶을 살 줄 아는 사람은 당장 움켜쥐기보다는 쓰다듬기를 좋아합니다. 목표를 향해 곧장 달려가기보다는 여유를 가지고 구불구불 돌아가는 길을 선택합니다. 직선이 아닌 곡선의 묘미를 압니다. 여기에 삶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불행해하지 마십시오. 그 나름의 의미가 다 있습니다. 때로는 천천히 돌아가기도 하고, 가다가 쉬기도 하고, 또 길을 잃고 헤맬 수도 잇어야 합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국도나 지방도로를 달리면 훨씬 여유가 있습니다. 둘레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시간에 쫒기는 사람은 한마디로 죽으러 가는 사람입니다. 출퇴근 시간 바쁠 때 보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가 앞서려고 합니다. 만약 화장터나 묨지,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면 서로 뒤처지려고 할 것입니다. 시간을 즐기는 사람은 영혼의 밭을 가는 사람입니다. 어떤일을 하면서도 그 일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그 일을 자기 삶의 소재로 생각하고 모든 과정을 즐길 줄 압니다.
모든일을 삶의 소재로 삼으십시오. 그래야 일을 하되 그 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화엄경>에서는 보살이 중생을 가르치는 것을 '유희삼매遊戱三昧'라고 합니다. 아이들이 소꿉장난 할 때 아무 잡념이 없습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어머니가 기다리는 것도 잊고 그 자체가 즐거워서 몰입합니다. 어떤 일을 하면서 그 일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것입니다. 일에 갇히면 그 일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일상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평소 아무 생각없이 아이들이 흙장난 하듯 무심히 할 때는 아주 잘 됩니다. 그런데 전시회에 내거나 누구한테주거나 하는 목적이 있을 때는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심의 경지에서 하는 것은 바른 것입니다.무심하지 않고 분별이 개입하면 제대로 될 수가 없습니다.
아무 분별 없는 그 자체가 기쁨입니다. 무슨일이든지 그 일에 온 마음을 기울여 순수하게 몰입하면 그 자체로 환희의 상태입니다. 많이 아는 것은 더 구할 것이 없는 상태보다 못합니다. 달마스닙의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에 '무소구행無所求行'이란 말이 있습니다. 더 구할 것이 없는 행, 더 구할 것이 있으면 채워야 하니까 더 보태고 덜어 낼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것은 불완전하다는 말입니다.
도인이란 일 없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무사인無事人이라고 합니다. 일이 없다고 해서 빈둥거리며 노는 존재가 아닙니다. 일을 하면서 그 일에 걸림이 없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일이 나를 구속하지 않습니다. 아무 분별이 없기에 그렇습니다. 그 일 자체를 삶의 내용으로 알고 기쁨으로 알기 때문에 무심히 할 뿐입니다.
시간은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되돌릴 수 없습니다. 잠자는 시간은 휴식이기도 하지만 한도를 넘으면 죽은 시간입니다. 깨어 있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자다가 깨면 다시 잠들려고 하지 마십시오. 깨어 있는 그 상태를 즐겨야 합니다. 한밤중의 그 고요와 적막을, 맑고 투명한 그 의식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남을 돕는 일에 어떤 보상이 따른다면, 그 보상이란 곧 내 가슴이 그만큼 따뜻해지는 일일 것입니다. 또 내 시야가 그만큼 넓어집니다. 삶의 의미가 그만큼 깊어집니다. 남을 도우면 존재의 깊은 의미를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보시를 제 1바라밀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바라밀이란 우리가 세상을 건너는 일, 세상을 사는 일입니다. 세상을 사는 일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덕이 무엇인가? 보시라는 것입니다. 남을 돕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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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보이지 않을때 다시 돌아와 읽고 또 읽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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