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노신선집/노신문학회편역

다림영 2009. 8. 21.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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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해 생각이 미치자 나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윤토가 향로와 촛대를 가지겠다고 했을 때 나는 그가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고 속으로 은근히 비웃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말하는 그 희망이라는 것도 나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낸 우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단지 그의 희망은 현실과 좀 가까운 것이고, 내 희망은 아득한 것일 따름이었다.

 

비몽사몽간에 내 눈앞에는 바닷가의 푸른 모래톱이 펼쳐졌다. 쪽빛 하늘에는 둥근 달이 걸려 있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본래부터 있다고도 할 수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마치 땅위에 난 길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사실 말이지, 길이란 본래부터 있은 것이 아니라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차차 생긴 것이다. "

 

고향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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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길은 없었을 것이다. 길이라는 것은 사람들 한둘이 모여 발자욱을 남기며 생겨났으리라. 나는 이글을 몇번씩 읽어보면서 희망을 생각해 보았다. 그처럼 가까운 희망이 아닌 아득한 희망을 지니고 창밖을 응시한다.

보이지 않는 그 희망의 눈부신 깃발을 마음들판에 단단히 세워둔다. 바람이 불고 눈비가 내려도 그 깃발은 휘날릴 것이고 나는 그곳을 향해 발을 내딛으며 길을 만들며 나아가야 하리라.

 

 

 

 

책갈피 속에 끼워 두었던 나뭇잎

 

등불 밑에서 안문집雁門集을 읽고 있는데 문득 책갈피 속에 끼워 두었던 단풍나뭇잎이 나왔다.

이것을 보는 순간 나는 지난해 늦가을 일이 생각났다. 밤새 된서리가 내리자 나뭇잎은 대부분 떨어졌고 정원에 자란 한 그루의 어린 단풍나무도 빨갛게 물들었다. 나는 그 나무의 둘레를 빙빙 돌면서 잎새의 색깔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것들이 푸르렀을 때에는 한 번도 이처럼 눈여겨 보지 않았던 것이다.

 

 

잎새들은 하나같이 빨간 색이었고 짙푸른 점이 박힌 것도 더러 있었다. 그 가운데 한 이파리에만은 벌레 먹은 구멍이 하나 있었다. 둘레에 까만 테를 두른 것 같은 그 구멍은 붉고 누렇고 푸른 반점들 속에서 맑은 눈동자처럼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병든 잎이구나! 나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그것을 따다 방금 사온 <안문집>갈피에 끼우 두었다. 그것은 이제 곧 지려는 이파리의 색깔을 , 벌레가 먹고 얼룩진 그 색깔을 잠시나마 보존하여 다른 잎새들과 함게 흩날려 버리지 않게 하려는 데서였으리라.

 

 

그런데 오늘 저녁 그것은 누런 꿀 빛깔이 되어 내 눈앞에 나타났다. 그눈동자도 지난해처럼 그렇게 정기가 돌지 않았다. 이제 몇 해만 더 지나면 옛날의 색깔은 내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며 무엇 때문에 그것을 책갈피 속에 끼워 두었던가 하는 까닭조차 모르게 될 것이다.

 

 

없어져 버릴 병든 잎사귀의 아롱진 색깔도 극히 잛은 동안 밖에 볼 수 없거늘 하물며 푸른 녹음은 오죽하리.창 밖을 내다보니 추위에 잘 견디는 나무들도 벌써 벌거숭이가 되어 버렸다. 그러니 단풍나무야 더 말할 게 무엇이랴. 올해 늦가을에도 아마 지난해의 것과 비슷한 병든 잎이 있었으련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가을 나무들을 감상할 여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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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박한 세상속에서 살다보니 나도 모르게 그 오래전 아이처럼 순수하던 마음들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다. 붉게 물든 나뭇잎을 보고도 아무런 마음의 파동을 느끼지 못하며 그저 그런듯이 살아간다.

9월이 동구밖에서 서성이고 있다. 이제 머지 않아 가을바람은 사뭇 텅 빈 마음에 불어닥칠 것이다. 서서히 변해가는 산천초목을 바라보면서 그 가을  나는  어떠한 사색으로 순수하게 깊어갈 것인가?

 

 

 

 

희망

 

나는 마음이 사뭇 쓸쓸하다.

그러나 나는 마음이 자못 고요하다. 사랑도 미움도 없고 슬픔도 즐거움도 없으며 빛깔과 소리도 없다.

나는 아마 늙었나보다. 내 머리에 흰 서리가 내린 것이 사실이 아니란 말인가?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을 것이며 머리에도 틀림없이 흰 서리가 내렸을 것이리라.

그런데 이것은 여러해 전의 일이다.

전에는 내 가슴속에도 피와 쇠, 불꽃과 독, 회복과 복수의 피비린내 나는 노랫소리가 가득차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이런 것들이 불현듯 없어지고 가슴속은 텅 비었다.

 

 

하지만 때로는 일부러 자기를 속이는 덧없는 희망으로 그 텅 빈 자리를 메우려 했다. 희망, 이 희망이란 방패로 습격해 오는 그 텅 빈 어두운 밤을 막아보려 했다. 하긴 이 방패 뒤에도 여전히 텅 빈 어두운 밤이 도사리고 있긴 했지만 그러나 나는 이렇게 거듭 내 청춘을 헛되이 보냈다.

 

 

 내 청춘이 흘러가 버렸다는 것을 내 어찌 모르고 있었으랴. 하지만 내 몸 밖의 청춘은 그대로 있다고 믿어왔다.  별, 달빛, 죽은 나비, 어둠 속의 꽃, 부엉이의 불길한 울음소리, 두견새의 피 마르는 울음 소리, 웃음의 허망함, 사랑의 너울거리는 춤.... 이런 것들이 비록 구슬프고 아리송한 청춘이긴 하지만 그대로 청춘임엔 틀림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찌하여 이렇게도 쓸쓸한가? 그래 내 몸 밖의 청춘마저 다 흘러가 버리고 세상의 젊은이들도 다 늙어버렸단 말인가?

나는 애오라지 나 혼자서 이 텅 빈 어두운 밤을 맞받아 나갈 수밖에 없다. 나는 희망의 방패를 내던졌다. 그리고 페퇴피 샹도르<Petofi Sandor>의 '희망'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희망이란 무엇이냐? 매춘부여,

누구나 유혹하며 모든 것을 바치나니

그대의 가장 귀중한 보배,

그대의 청춘을 다 바쳤을 때

그는 그대를 저버리노라.

 

 

헝가리의 애국자인 이 위대한 서정시인이 조국을 위해 싸우다가 카자흐 병사의 창에 찔려 죽은 지 어언 75년이 지났다. 그의 죽음은 슬프다 하지만 보다 더 슬픈 것은 그의 시가 지금까지도 죽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참담한 인생이여! 페퇴피와 같이 굳세고 용감한 사람도 끝내 어두운 밤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아득한 동녘을 향해 머리를 돌렸다. 그는 말했더라.

 

 

절망이란 희망처럼 허망한 것이어라.

가령 내가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이'허망虛妄'가운데에서 아직도  구태여 살아가야 한다면 나는 흘러가 버린 구슬프고 덧없는 청춘을 찾아가리라. 그것이 비록 내 몸 밖의 것인들 어떠랴. 내 몸 밖의 청춘이 사라진다면 내 몸 안의 황혼도 이윽고 시들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도 별도 달빛도 없고 죽은 나비도 웃음의 허망함도 사랑의 너울거리는 춤도 없다. 하지만 청년들은 자못 조용하다.

나는 애오라지 나 혼자 이 텅 빈 어두운 밤을 맞받아 나아갈 수밖에 없다.  설사 내 몸 밖의 청춘은 찾지 못한다 하더라도 아무튼 내 몸 안의 ㄴ르그막 지는 기운을 덜어버리게 되기는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어두운 밤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은 별도 달빛도 없고 웃음의 허망함과 사랑의 어눌거리는 밤도 없다. 청년들은 자못 고요하다. 그리고 내 앞에서는 마침내 참다운 어두운 밤마저 없어지고 말았다.

절망이란 희망처럼 허망한 것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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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모든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빈 것이다.

부도 명예도 인생도 사랑도 우정도 그 무엇도 모두 허망한 것이다.

기쁨도 슬픔도 희망도 절망도..

그렇다면 이렇게 삶의 굴레에 얶매여 애닳아 하며 살 이유는 있는것인가

나무가 미풍에 흔들리듯 살아야 하리라. 시냇물이 어디론가 흘러가듯 그저 물길
따라 조용한 미소를 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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