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길과 집과 사람사이/안치운

다림영 2009. 8. 8.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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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속 길과 고개 너머 마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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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수 없을 때, 가고 싶을 때 나는 지도부터 달달 외운다. 그러면 어느새 갈 때가 다가온다. 가능하면 포장된 길을 포기하고,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을 찾는 것이 내가 정한 옛길과 오지 마을을 찾아다니는 여행의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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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길은 시간의 흐름과 같고, 옛길에 있는 마을들은 시간 속의 공간과 같다. 길이 시간의 흔적이라면 길에 있는 마을은 삶의 공간이다. 우리는 옛길을 잃어버렸다. 다시 그 옛길을 더듬는다. 그때마다 잃어버린 삶의 공간을 보게 된다. 그것은 그때 내가 길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길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우리의 산하를 찾아 헤매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나는 길과 닮아가고 싶다.

 

 

 

삶과 죽음의 고개, 고인돌

 

"기원 후 약 1000년 까지 이어져온 화순 고인돌 군은, 죽음은 삶보다 영원하고, 삶보다 더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

잘라말하자, 지동마을에서 모산마을까지는 보검재를 가로질러 걸어야 한다. 옷깃을 여미고 걷자. 끄떡없이 긴 세월 동안 산림 속에서, 저 아래 살아 있는 이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돌들 앞에 멈춰서자. 깐돌이 낮아져 허물어진 고인돌의 뚜껑돌을 살며시 손으로 짚어보자. 그것이 선사시대에 묻힌 죽은자들에 대한 예의가 될 것이다.

 

되도록이면 걸어서 재 너머까지 갔다가 되돌아와야 한다. 그것도 아주 천천히, 길이가 약 5km쯤 되는 이 산 길은 삶에서 죽음으로 흘러들고, 죽음에서 다시 삶으로 흘러가는 길이다. 참다운 아름다움은 만사의 끝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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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산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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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만 있는 짐승들은 연애를 할 수 없다. 종로 5가, 동대문에서 출발하는 안내 산행. 단체산행처럼 떼를 지어 산에 오르기보다는 스스로 산을 공부하고 계획을 세워 호젓이 산길을 걷자. 늘 가는 야트막한 동네 뒷산에서 이름  있는 명산에 이르기까지, 올랐던 산길이 늘 새롭게 보이는 것은 휴식년제가 끝났기 때문이 아니라 산이 스스로 날마다 새로워지기 때문이며, 오르는 내가 산처럼 맑아지기 때문이다.

 

 

산은 수많은 이들이 와서 더럽혀도 잃어버리지 않는 깨끗함과 순수함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댓가 없는 베풂이 어디 있겠는가? 말이 말 같지 않은 세상, 온갖 악덕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이만큼 살고 있는 것은 산 덕분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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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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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것은 행복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심연 속으로 파고드는 행위이기도 한다. 귀둔과 양양을 잇던 강원도 점봉산 곰배령 길을 꽃을 밟지 않고는 한 걸음도 걸을 수 없는 아름다운 길이다. 그 길을 자신의 고독의 그림자와 더불어 밟고 간다고 생각해보면 그 길은 가장 내밀하고도 밀도 있는 길이 된다. 길을 걷는 것은 자신의 존재방식을 선택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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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고전은 옛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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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사뭇 책과 같은 운명을 지녔다. 그것들은 무엇인가로 안내하기 때문이다. 길과 책이 없다면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고 또한 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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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을 고전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옛길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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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는 것은 책을 읽는 것이고, 책을 읽는 것은 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고, 내 안에 나만의 길을 내는 일이다. 그 길은 나만의 옛길이 된다.

 

 

숨쉬고 있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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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씨앗 속에 있다. 비유하자면 집은 씨앗이다. 씨앗으로서 집은 경험과 지식이 축적된 공간이다. 그 속에 있는 꽃과 같은 경험들은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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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살던 집과 다녔던 학교 운동장을 어른이 돼서 가보면 작게 보인다. 그 공간들은 우리들 기억속에 존재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고유한 냄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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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오지 산골로 들어가면 특유의 냄새가 내 몸을 자극한다. 군불을 때는 연기가 향기롭고 매큼하게 다가온다.

그곳에 가면 집이 숨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런 감각들은 집이라는 공간 경험을 극적으로 표현하게 하고, 사람들을 길들인다. 공간을 떠나 있을 때 감각은 자신의 처소를 그리워 한다. 우리가 대상을 그리워 한다는 것은 길들여진 감각이 대상과 떨어져 있어 불충분 할 때다. 감각은 공간적 환상을 창조한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도 그런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집에 숨고 싶은 순수한 그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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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정해진 장소라면, 길은 열린 공간이다. 집과 길에 사는 이들은 그 안에서 수많은 경험을 간직하게 된다. 집은 하나의 안정된 장소로 인식된다. 노랫말처럼 '홈 스위트 홈'을 지향하는 , 사는 이들의 안식처며, 고요한 중심이다. 공간으로서 길은 움직임과 자유의 상징이며, 이곳에서저곳으로 이어지는 개방이며, 알지 못하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공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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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집을 떠나 잇을 때 집을 그리워 한다. 사람이 살지 않으면 집이 허물어지는데, 그것은 집이 그리움에 지쳐가고 있는 모습에 다름아니다. 지붕이 내려앉고, 기둥이 빠지고, 벽에 구멍이 송송 나는 것은 집이 더 이상 자신을 지챙할 수 없을 정도로 야위어 가고 있다는 증거다. 영역이었고, 가치의 중심지였던 집이 사위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집도 쓰러지는 순간 앓는 소리를 낸다.

휠덜린<Johamm C.F. Holdrlin>이 "내 어린 시절의 숲들아, 내가 돌아온다면 고요함도 다시 올까"라고 한 것만큼 집도 사람을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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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삶의 가치를 부여하는 추상적인 공간으로 영원한, 아주 오래된, 개별적이며 집단적인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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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은 사람이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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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등반처럼 자신을 포기해야 하는, 소멸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숨이 가빠져 걸음이 느긋해지는 그런 소멸을 이 성당은 신자들에게 맨 처음 요구한다. 여기에 오기 위해서는 자신이 내는 숨소리를 먼저 듣고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신앙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시 짜 맞추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과 사람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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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그만큼 닫힌 곳이 많다. 열린 곳은 만족을 시켜줘야 한다. 닫힌 몸이 가벼워질때까지 우리는 애무란 것을 한다. 닫힌 몸이 열리면 열린 몸에서 소리가 난다. 그것이 말이다. 말은 열린 몸, 열리는 몸의 소리다. 말은 몸에서부터 나온다. 닫힌 것에서 열린 것이 새어나오는 것, 닫힌 표피를 깨고, 표피를 울리며 나는 소리, 그래서 피리와 같은 악기는 아예 몸에다 소리나는 구멍을 뚫었다. 피리를 불기 위해서도 역시 몸인 피를 애무해야 한다. 그것이 숨쉬기, 숨으로 피리의 몸을 달궈 놓는 일이다.

 

 

 

예술은 삶의 저장이고, 그것은 모든 이들을 경계없이 만나게 하고, 서로 이해하게 하는 것임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 여행이었다. 그 깨달음 이 내게 명령한다. 새롭게 한다고 하면서 옛것을 없애지 말것, 새로운 것, 옛것, 편리한 것, 불편한 것을 기르지 말 것, 그것들을 모두 삶 속에서 아우르는 노력을 다 할 것. 삶도 자연처럼 흐르고 흐르는 것, 다시 정성을 다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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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말 가운데 하나는 바캉스란 낱말이다. 바탕스는 일을 중지하는 휴가가 아니라 삶의 모든 예외를 인정하는 특수한 단어다.바캉스<Vacances>란 단어의 어원 vac, voc는 텅 빈 상태를 뜻한다. 바캉스는 텅 비어 있는 ,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움을 뜻한다.프랑스 소설가 레이몽 라디게가 죽음을 끝없는 바캉스라고 말하는 것처럼 , 바캉스는 삶뿐만 아니라 죽음에 이르기까지 비유로 쓰이고 있다.

 

흔히들 프랑스 사람들은 바캉스를 위해 사는 것 같다고 말한다. 바캉스는 일상의 삶이 추구하는 희망봉이고, 바캉스를 통해 이들은 새롭게 태어나는 것 같다.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바탕스를 보내기 위해 일한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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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버스와 지하철에는 우리나라 지하철처럼 노인을 위한 자리가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노인과 장애인, 상이군인, 임신부, 어린아이를 위한자리다. 이 보호석 위에는 앉을 우선권이 적혀 있었는데, 상이용사가 첫번째이고 그 다음으로 시각장애자, 기타 불구자, 임신부, 4세 미만 어린이고 맨 끝이 75세 이상의 노인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날, 내가 타고 가는 버스 보호석에는 한 프랑스 할머니가 앉아 잡지를 보면서 손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오랜만에 외출하는 것처럼 맵시 있는 옷을 입고있었고, 얼굴에는 화장을 했다. 다음정거장에서 장바구니를 든 흑인 할머니가 버스에 올랐다.

 

흑인 할머니는 보호석 앞으로 다가가 앉아 있던 백인 할머니가 자신을 보고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백인 할머니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자, 흑인 할머니는 백인 할머니에게 주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줄 것을 요구했다.

 

 

흑인 할머니의 말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내가 보기에 내가 당신보다 더 나이가 든 것 같구려, 그러니 내게 이 자리에 앉을 권리가 있어요. 혹시 일흔다섯 살이 지난 내 나이를 확인하고 싶으면 체류증을 보여줄 수 있어요" 백인 할머니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책 보는 일과 뜨개질을 계속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흑인 할머니는 백인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하든지, 주민등록증을 보여주든지 하라고 말했다.

 

 

나는 두 할머니의 대립이 어떻게 끝날 것인가를 알기 위해 내릴 곳을 지나쳐버리고 말았다.참다 못한 백인 할머니는 주민등록증을 보여줄 뜻이 전혀 없다는 듯이, 그러니까 나이를 견줄 필요가 없다는 뜻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긴 내 나이라야, 그러므로 당신에게 양보할 수 없어" 흑인 할머니가 이를 듣고 말했다.

 

 

"맞아요, 나는 지금 당신의 나라에 와 살고 있지만, 예전에는 당신들이 내 나라에 허락도 없이 와서 살았어요. 세금도 안 내고, 그러나 난 세금을 내고, 집세도 내면서 살아요. 그러니까 앉을 권리가 있어요. 어서 일어나세요" 백인 할머니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은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버스는 센 강변을 따라 에펠탑 쪽으로 가고 있었다.

 

 

참다 못한 흑인 할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아, 당신은 나처럼 서 있을 수 없는 거야. 날 봐, 난 당신보다 훨씬 튼튼한 다리를 가졌어. 내 땅은 내게 이렇게 서 있을 수 있는 힘을 주었어. 난 이렇게 늘 서 있을 수 있어."버스안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아프리카 할머니의 말 속에 얼마나 긴 세월이 담겨 있는가! 흑인 할머니는 뿌리 깊은 나무 같아 보였다. 나도 손에 힘을 주어 더욱 세게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흔들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새해에 내가 이웃들과 나누고 싶은 덕담은 아프리카 할머니가 보여준, 역경의 교훈이 주는 거룩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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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을 하면서 외국 사람들보다 동포들을 더 많이 만났다. 특히 중앙아시아에서는 어딜 가나 김치를 만들어 파는 한인들을 바자르라는 시장에 가면 만날 수 있었다.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 남의 나라에사는 설움과 더불어 냉대를 견뎌온 '동포들'의 고통을 절실하게 깨달을 수 이었다. 나는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그들을 통해 한국 근대사의 요동<搖動>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고,'나'라는 존재와 결코 떼어낼 수 없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개념을 체득할 수 있었다. 정말이다. 그 깨달음은 몸으로의 깨달음인데, 이것은 아는것을 훨씬 넘어선 것으로 결코 잊혀질 수 없는 경험이었다. "

 

 

 

 

안치운

 

연극공부와 산 공부를 같이 하고 있으며 춤과 건축에 관한 글을 계속 쓰고 싶어하는 저자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연극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정부 장학생으로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국립 3대학<소르본 누벨>에서 연극교육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극 평론가로 활동하면서 호서대학교 예술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연극 비평서로 <공연예술과 실제비평><추송웅 연구><연극제도와 연극읽기><한국연극읮 ㅣ형학><연극, 반연근,비연극><추송웅 배우의 말과 몸짓>등이 있으며 <옛길><그리움으로 걷는 옛길>의 기행 산문집과 번역서 <연극인류학:종이로 만든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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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은 화창하고 매미소리는 요란한데 참 이상하다. 마음이 모아졌다.

사실 오늘 다 읽기가 벅찬 책이었다.

어느날부터 책에 열중하기로 했다. 또 어느날부터는 길을 걷기로 했고

나는 흙집에 대한 생각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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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했다.

모든 것이 우연처럼 이렇게 모아졌다.

우연이 아닌 필연같았다. 운명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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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급하게 빼어든 책이었다. 이상했다.

 

 

어느때엔 글자들만 낱낱이 읽는 것 같았고

또 어느때엔 특별한 단어들만 들어오는 것 같았고

무슨내용 이었더라 하면서 다시 돌아가 읽기도 했다.

 

오늘은 다른날과는 조금 달랐다.

밖으로만 향하던 마음들이 안으로 더 안으로 고요히 걸어들어왔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님을 문득 깨닫게 되었다.

다시 또 밖으로 향할 마음인줄 안다.

그러나 가다가다 한번이라도 이렇게 깊히 빠져들며 고요해지는 나를 만나게 되는때가

한번에서 두번으로 두번에서 네번으로 그렇게 만나면 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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