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욱: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서양화과에서 미술이론을 전공했다. 약 3년간 강남구 청담동의 갤러리 서미에서 큐레이터로 일했다.
오후에는 출근해도 되는 공인받은 게으름뱅이 큐레이터로 밤에는 인근에 있던 선후배 작업실을 돌아다니며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고 몸이 근질거려 주로 당구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작가로서의 꿈을 접고 이리저리 현실에 떠밀려 다니다, 삶과 예술을 한데 묶어 화해시키지 않으면 그림을 그릴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에, 1990년 5월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시골행을 선택했다.
할머니 혼자 사시던 경북 상주 시골집으로 내려온지 15년, 오래된 빨간 양철지붕 아래서 아내와 고등학생인 아들 영준이와 텃밭을 가꾸고 풀꽃을 들여다보며 소풍 나온 듯 살고 있다. .
"미국의 여류화가 조지아 오키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아무도 꽃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꽃은 아주 작고, 우리는 바쁘다. 그리고 본다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친구를 사귀는 일이 시간 걸리는 일인것처럼"
그게 어디 꽃뿐이겠습니까. '구름은 너무빠르다. 우리는 빠르고' , '여름은 너무 짧다. 우리는 너무 바쁘고' . 우리는 너무도 바빴기 때문에 아무것도 제대로 보지 못했고, 끝까지 듣지도 못했고 조금 더 기다려주지도 못했던 걸까요. 사랑한다고 말할 시간도 없이 바쁘게 살아왔지만 여전히 제대로 하지도 못한 일들만 잔뜩 쌓여 있다는걸 어느 날 갑자기 깨닫게 되는 걸까요.
너무 바빠서 그런걸 깨달을 수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한가함으로 신에게 가까이" 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다시 새겨 봅니다. 저같은 게으름뱅이들이 좋아하는 말이지요. 될 수 있는대로 번거로운 일을 만들지 말고 아무 데도 마음 두지 않으려 애쓰고 있습니다만, 요샌 간이 작아져서.... 박형, 여름이 다 가기 전에 담양 부근 어둑어둑한 대밭 속 대나무 평상에서 대나무 베고 죽부인 안고 자다 감기나 한번 들어 보는게 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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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은 폭삭 내려 앉았고 허물어진 흙벽이 여기 저기 남아 있다. 겨울 오후 짧은 해가 질무렵, 얼룩덜룩 남아 있던 잔설에 흙먼지가 누런.
초가집이 있던 자리가 어느새 보리밭으로 변했다. 가만있자. 이 골짜기가 맞나? 여기 쯤이었을까? 아니면 저기쯤? 어쩌면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니. 사람들은 야속하기도 하지. 삶이란 허망하기도 하여라.
'나의 희망' 이 칠판에 기대어 있었다. 얼마나 오래 쳐다보았는지도 잘 모르겠다. 달리 바라볼 그림이 없기도 했지만 볼수록 신기했다. 어떻게 이 그림이 여기 있을까. 왜 이 그림 하나만 이렇게 남아 있을까. 수많은 나날동안 수많은 생각을 했지만, 답은 오로지 하나밖에 없었다. 모든 걸 다 앗아갔지만 씨앗, 아주 중요한 씨앗 하나를 내 손에 남겨놓은 것이다.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소중한 씨앗. 그래 .여기이 작은 씨앗하나가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는 튼튼한 나무로 자라나리라. 하늘높이 아름다운 무지개를 피워 올리리라.
다시는 물에도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으리라. 꽃이 만발하고 열매가 찬란하여 향기가 천지에 자욱하리라.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 작은 씨앗하나의 속뜻은 그런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나서 나는 '희망'을 새로 얻은 것이다. 그토록이나 애를 써도 늘 멀리서 희미하게 흔들리기만 하던것이, 이런식으로 분명하고 단단해지는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절이든 소통이든 인생의 변화에는 확실히 어떤 계기가 필요한가보다. 그리하여 희망은 나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며 평생의 숙제가 되고 말았다.
...
처음 시골로 내려와서부터 8년 넘게 아궁이에 장작불을 땠다. 큰 무쇠 솥에 늘 물을 데워썼다. 크지 않은 대청마루에 유리문을 달고 조그만 싱크대를 들여놓긴 했지만 6년전 보일러를 들이기 전까지는 한겨울에도 찬물에 설거지를 해야 했다. 비오는 밤에 대밭 뒤 재래식 변소에 가려면 플래시 들고 우산 들고 큰맘 먹어야 한다.
북향마을에 북향집이라 겨울엔 춥고, 양철지붕이라 여름엔 얼마나 더운지 모른다. 집안은 좁고 마당과 텃밭이 넓어 한도 없이 풀이 돋아나고 나무가 우거진다. 뒷산에 가로막혀 TV도 잘 안나오고 비만 오면 지하수가 누렇게 변한다. 94년 차를 살 때까지는 두 시간에 한번 다니는 버스를 타고 장을 보러 다녔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15년을 살았다. 사람들은 우리부부가 수많은 갈등과 인내와 눈물의 바다를 건너온 걸로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린 그렇게 힘든 줄 모르고 살았다. 어떻게?잠깐만 생각해보면 누구나 금방 알 수 있다.
어렵고 불편하고 괴로운 생활을 15년씩이나 억지로 참고 견딜 수 있을까? 우리가 무슨 대단한 수행을 한다고, 내가 무슨 불굴의 투사라고 그 세월을 무조건 참아내겠는가 말이다.
우리는 이런저런 단점과 불편을 뜻밖에도 쉽게 받아들였다.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우린 그저 '잠깐소풍을 나온 것처럼 가볍게' 살았던 것이다. 아내는 그걸 '소꿉장난'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내가 그림만 그릴 수 있다면 다른 모든 건 웃으며 받아들일 작정이었다. 중요한 한 줄기만 확보되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우린 둘다 주어진 주변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써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즐길 수 잇게 되기까지는 어느정도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때는 잘 몰랐었지만 지금에 와서야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우리는 그렇게 가볍게 웃어넘김으로써 이런저런 어려움을 어느정도 쉽게 이겨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내말로는 우리가 둘다 워낙 낙천적인 성격이어서 그렇단다. 나도 타고난 개구쟁이 기질에 밑도 끝도 없이 농담을 지껄일 수가 있어서 아무리 힘들고 곤란한 일이 있어도 일단 한 번만 웃고 나면 그일은 벌써 쉽고 재미난 일이 된다는 것이다. 농담은 무거운 일을 가볍게 만드는 최선의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소풍 나온 사람들한테는 지나가는 소나기도 즐거운 법이다. 웬만한 어려움도 같이 웃어가며 받아들이고 즐기고 해결한다. 그런 면에서 가장<보이스카우트 지도자처럼>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단다<아내의 말> 따지고 보면, 어떤 고난에도 당황하지 않고 정확하고 재치있게 대처해 재미있고 의미있는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내는 능력은 일이나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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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말씀이 , 제 밥 다 먹고 제 물 다먹고 제 똥까지 모조리 다 주워 먹고는 배고프다고 먹을 것 더 달라고 하루 온종일을 컹컹 짖어대니 사료도 사료지만 동네 사람들이 시끄러워 잠을 못잔다며 이집 저집에서 말이 많더라는 것이다. 할머니 할아버지야 두분 다 귀가 안 들리니 잘모르시겠지만, 그놈 먹성이 엄청나다보니 덩치는 일찌감치 송아지만해진 데다 목청이 유별나서 짖는 소리가 얼마나 큰지 우리 집 전체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오죽하면 내가 자다 말고 뛰쳐나가 돌을 다 던졌을까. 사방에서 민원이 쇄도하니 별수 없이 옆집 개는 일찌감치 솥뚜껑 밑의 이슬로 사라지고 새로 산 강아지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이다. 제 딴엔 좀 더 먹어보자고 그저 조금 더 살아보자고 짖었을 뿐인데 결과적으로는 명을 재촉한 꼴이 되고 말았으니 개의 입장에선 기가 막힐 노릇이겠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났을 즈음, 할아버지 말씀이 우리 개가 새끼를 낳으면 한마리 달라신다. 강아지가 잘 자라고 있는데 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이번 개는 또 너무 안짖는다는 것이다. 낯선 사람이 와도 통 짖지를 않으니 뭐 저런 개가 다 있느냐며 이해가 안된다는 것이다.
저개는 또 왜 안짖을까? 그러고 보니 통 개 짖는 소리를 못들은 것 같기는 하다. 혹시 저번 개가 너무 짖다가 일찍 돌아가셨다는 걸 알아차리고 자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입을 다물어 명을 보존하기로 한게 아닐까?
결국 개들도 적당히 짖어야만 목숨을 보존할 수 있는데 그 '적당'의 기준은 전적으로 사람한테 있으니, 눈치가 빠른 개만이 살아남을 수 있나보다. 그것은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너무 짖어도 탈이나고 너무 안 짖어도 탈이다.
......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예술가들의 책을 들여다 보아야 하겠다.
미치지 않고는 무엇이든 이룰 수 없는 것이 분명하겠다.
좋은글도 참 많았고..
특히 "누구나 가슴속에는"..그 글에서 마음을 모두 주어 버렸다.
행복한 책읽기였다.
다음은 어떤 예술가의 길을 엿보며 즐거워 하게 될까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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