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헤르만 헤세

다림영 2009. 5. 16.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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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는 맑고 밝은 곳에 있다.

 

자연은 권태를 모른다. 권태는 도시인들의 발명품이다.

 

아름다운 책속에서 헤매고 있는 순간 나는 이 세상의 어떤 장관이나 왕이 몇 년에 걸쳐 이루어 낸 일보다 더 훌륭하고 현명하며 더 가치있는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이 파괴한 것을 건설하고, 그들이 흩어 놓은 것을 수집하며, 그들이 부정하여 십자가에 못박은 신을 사랑한다.

 

욕망의 시선은 불순하고 일그러져 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곳에서 , 우리의 시선이 순수한 관찰이 되는 곳에서 비로소 사물의 영혼이,아름다움이 열린다. 구입하거나 벌목하거나 저당을 잡으려고 하는 숲을 바라볼 때면 나는 숲을 보는 것이 아니라 숲이 나의 욕망과 맺고 있는 관계만을 보는 것이다. 숲에 바라는 것이 하나도 없어야, '사심없이'숲의 푸른 깊이를 쳐다보아야 비로소 숲은 숲이 되며 자연과 초목이 되고 아름다움이 된다.

 

누군가 던진 공처럼 인간에겐 갈 길이 미리 그려져 있다.운명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조롱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오래전에 정해진 노선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운명'은 우리 안에 깃들인 것이지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눈에 보이는 인생의 표면은 중요하지 않다. 이렇게 보면 일반적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이거나 심지어 비극적이라고 부르는 것도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비극적인 겉모습에 무릎을
꿇는 사람들은 대단치 않다고 생각해 온 사소한 일 때문에 고통을 받고 몰락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야 아름다운 것이 흔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공장과 대포 사이사이에 꽃이 피어 있다는 것이, 신문과 전단 사이사이에 문학이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적인지를....

 

젊음이 바라는 건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겁니다. 노년이 바라는 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었으면 하는 거지요. 정신적인 삶은 이 양 극단 사이를 돌아다니며 놀아야 합니다. 젊음의 임무와 동경과 의무는 변화요, 성숙한 인간의 임무는 자신을 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꽉 찬 인간이, 진정한 개성이 되어야 합니다. 개성을 제물로 바치기 전에 먼저 개성화의 고통을 겪어 보아야 합니다.

 

 

최악의 순간이 온다 해도 내가 절대 원하지 않는것이  미지근한 선과 악의 중간이다. 차라리 급 커브가 낫다. 고통이 심해져서 그 대가로 행복의 순간이 더 풍성해지는 것이!

 

 

가까이 있을 수록 서로를 알기가 힘들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은 각자 자신만을 가리킬 수 밖에 없다.

 

세상의 모든 고통을 느껴보세요. 하지만 당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곳에다 힘을 쏟기 보다는 당신이 도와 줄 수 있고 사랑과 기쁨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이웃을 도우세요.

 

 

 

우리의 목적은 대립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것들이 단순히 대립으로밖에 안보이지만, 그 대립들은 결국에는 하나가 되는 양 극단입니다.

 

 

인간의 정신은 진리에 복종할 때에만 자비롭고 고귀하다. 진리를 배반하는 순간, 경외심을 버리는 순간, 진리를 돈으로 살 수 있고 멋대로 주무를 수 있게 되는 순간 정신은 악마의 요소를 잉태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의 정신은 자연의 순진함을 조금이나마 간직하고 있는 동물적이고 충동적인 행위보다 훨씬 더 잔인해지는 것이다.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자신이 진정한 욕망이 구하라고 시킨것은 무슨 수를 쓰고 찾고야 만다.

 

문제는 풀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란 삶에 필요한 긴장을 생산해 내는 양 극단 일 뿐입니다.

 

 

인생은 무의미하고 끔찍하고 한심스럽지만, 그럼에도 찬란합니다.

삶은 인간을 조롱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인간을 지렁이보다 더 배려해 주는 것도 아니랍니다. 유독 인간만이 자연의 변덕이요, 자연의 무자비한 장난이라는 생각은 잘 난 체 하는 인간들이 만들어 낸 망상입니다.

우리 인간의 삶은 새나 개미의 삷보다 힘들지않습니다. 휠씬 수월하고 아름답지요.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절망을 이겨냄으로써 우리는 인생이 무자비하다는 사실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연의 지독함을 자연의 무의미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이런 야만적인 무의미에 대항하여 의미를 길어 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니까요. ..

 

 

우리의 기질은 늘 자기가 무슨 세계관이라도 되는 듯 가장하는 놀라운 능력을 갖추고 있다.

 

나는 영혼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다. 나는 내 꿈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니까. 다른 사람들도 꿈 속에서 살고 있지만 자기네 꿈 속에서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이 나와 다른 점이다.

 

 

 

현실은 돌 속에 갇혀 움찔거리는 섬광이다.네가 그것을 깨워 주지 않으면 돌은 변함없이 돌이고, 도시는 변함없이 도시이며, 아름다움 은 그대로 아름다울 것이고, 권태는 여전히 권태로울 것이다. 네가 '현실'이라는 천둥 번개를 이용해 넘치는 너의 강물에 빠뜨려 줄때까지 모든 것은 사물의 꿈에 빠져 있을 것이다.

 

 

 

직업은 언제나 불행이다. 또한 속박이요 체념이다.

 

지금은 새롭고 흥미로운 것도 모레가 되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수천 년을 견디며 살아남아 지금까지 잊혀지거나 사라지지 않은 것은 우리의 살아 생전에도 그 가치 평가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향락의 힘과 기억의 힘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향락은 과일에서 남김없이 즙을 짜내는 것이다. 기억이란 한때 즐겼던 것을 꽉 붙들어 자꾸만 순수하게 만들어 가는 기술이다.

 

 

 

명랑함은 장난도 아니며 자기 만족도 아니다. 그것은 최고의 깨달음이며 사랑이고 모든 현실의 긍정이며, 깊은 곳 낭떠러지 끝에서 깨어 있음이다. 그것은 미의 비밀이며 예술의 진정한 핵심이다.

 

나는 삶 그것 하나 때문에 살고 싶지 않습니다. 여자 때문에 사랑을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내 인생에 만족하려면, 내 인생을 견딜 수 있으려면 예술을 거쳐가는 에움길이 필요하고, 예술가의 고독하고도 기발한 즐거움이 필요합니다.

 

 

자비와 도는 항상 우리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것은 빛이요, 신 그 자체입니다. 한순간 마음을 열고 있는 곳에서 그것은 우리 안으로 걸어 들어옵니다. 모든 아이에게로, 모든 현자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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