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상상력 결핍 증상에 시달리고 있다. 사실 원래부터 상상력이 별로 없긴 했다. 하지만 냉정하게 스스로를 돌아봐도 요즘 머릿속에는 흔하고 뻔한 생각들만 들어차 있다. 아무래도 창작이나 디자인과 관련된 일을 하다 보니 괜히 조바심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남의 탓을 하는 것이 대세인 세상이니 괜히 엉뚱한 데서 책임을 찾으려 할 때도 있다. 서울의 빡빡한 일상, 그 일상의 지루함, 생존을 위한 지루함에 대한 인내, 아니면 뭉뚱그려서 그냥 너 때문,
하지만 다른 것한테로 책임을 넘기는 순간 스스로가 너무 초라해진다. 기것 나는 남이 잘 받쳐줘야만 상상력이 조금 생기는 그저 그런 인간이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나의 탓을 한다. 서른넷밖에 안 되었으면서 화강암처럼 굳어버린 나의 뇌 탓을 한다.
어떻게 보면 뇌의 탓을 하는 것도 책임을 넘기는 셈이 된다. 상상은 머리로 하는게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 심장 탓인가? 그것도 아니면 나의 무의식이 나의 의식에 의해 억압받고 있기 때문일까? 상상하는 것은 모두 다 이루어지는 세상이 되었기에 인류 전반적으로 상상의 필요성이 점차 옅어지는 것일까?
결국 별 새롭지 않은 생각들만 머릿속을 채운다. 지루하다. 나는 좀 더 멋진 상상을 하고 싶다. 로또에 당첨되는 상상조차 식상하다. 보랏빛 피부의 외계인도, 가슴이 큰 귀신도, 엄동설한에 춥다고 우는 청개구리도 그냥 심드렁하게 어디선가 살고 있을 것 같다.
어쩌면 남의 탓을 하는 대신 남에게 기대하는 것도 한가지 방법일 것이다. 세상에 나보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은 생각보다 많을 테니 말이다. 나는 그저 상상력이 뛰어난 다른 사람들이 더 멋지고 더 재미있으며 더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어주는 상상이나 하고 있는게 세상을 돕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했다.
-조선일보 一事一言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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