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존재하는 것과 행하는 것

다림영 2009. 2. 14.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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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행자가 여행 안내서를 들고 박물관에 들어가 열심히 중요한 것들을 모두 살피고 나왔을 때 그는 들어가기 전보다 더 생기를 잃어 버릴 수 있다. 그는 모든 것을 보았으나 동시에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그는 많은 일을 했으나 그것은 다만 그를 피곤하게 만들 뿐이었다. 만약 그가 잠시 동안 멈추어서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그림을 보다가 다른 것들을 모조리 잊어버렸다면, 그는 시간을 완전히 낭비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위로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외부에서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서도 무엇인가를 발견한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 안에서 존재의 새로운 깊이를 인식할 것이며, 또 새롭게 존재하고 새롭게 행위할 수 있기 때문에 그의 삶은 풍요로와질 것이다.

 

우리의 삶은 단지 활동이나 경험에 의해서는 풍요로와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행위와 경험의 질이다. 올바르게 행해지지 않은 수많은 행위와 경험들은 다만 우리의 삶을 피폐시키고 고갈시킬 뿐이다.  올바르지 못하게 행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욱 실재하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실재하지 못하면 못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불행해지고 죄의식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의 양심의 순결은 우리의 삶의 깊이와 행위의 질에 정비례한다. 우리의 활동이 늘 무질서할 때 우리의 흉한 모습을 한 양심은 우리에게 행위의 양을 증가시키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더욱더 나빠져서 우리 자신을 피폐시키고 우리의 전 삶을 텅 비게 하여 절망에 빠지고 만다.

 

나의 견해는 내가 한 일에 대한 숭배로 인해 왜곡되기 마련이다. 나 자신에 대한 나의 환상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환상으로부터 전염되어 자라난다. 우리 모두는 서로의 날조된 위대성을 모방하고자 노력한다.

 

내가 진정한 나를 알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주위 사람들이 원하는 종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는 내 자신에게 진정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되기를 원하는 지 물어본 적이 결코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칭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때 나는 비로소 진정으로 살기 시작한다.  나는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을 말해야 할 의무에서 , 그리고 하느님의 진실과 나자신의 영혼의 고결함을 배신하는 행위를 해야 할 고통스러운 의무에서 해방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우리는 결코 원치 않는 것이 되기 위해 우리의 삶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창조된 목적과 정반대 되는 일을 하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결코 우리 자신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분별없고, 기계적인 활동이 우리의 영혼을 혼돈 속에 빠뜨리는 한 자기 인식은 불가능하다.

 

 

우리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모든 활동을 그치고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무익할 수도 있고 또 우리들 대부분에게는 상당한 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행위들에 대해 고요하게 그리고 합리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때까지 우리의 모든 활동을 중지해야 한다. 우리가 왜  그 일을 하는지 그 진정한 이유를 알기까지는 우리 자신을 알기 시작할 수 없다.  또 우리 의 행위가 우리의 의도와 일치하고 우리의 의도가 우리 자신의 상황에 적합한 것이 될 때까지는 우리 자신이 될 수 없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우리가 반드시 모든 일에서 성공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한 일에서 아무런 수확도 거두어 들이지 못한 사람도 완전할 수 있고, 또 아주 작은 것을 성취할 수 있는 사람이 아주 많은 것을 성취한듯 보이는 사람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일 수 있다.

 

올바르게 실패한 사람은 그릇되게 성공한 사람보다 더 위대하다. 자신이 가진것에 만족하고, 필연적으로 삶에서 많은 것을 잃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은 것을 가졌으나 항상 잃을 까봐 걱정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낫다. 우리의 마음이 언제나 진정한 나와 그렇지 않은 나로 분열된다면 우리는 결코 최선의 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평가가 낮아지고 우리의 기대가 적어질 수록, 우리가 가진 것을 사용할 기회를 더 많이 우리가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것을 결코 올바르게 평가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행위와 존재의 새로운 질서를 깨닫기 위해서는-그리고 우리 안에서 우리는 결코 할 수 없는 일들을 이루시는 하느님 자신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이 약한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언제나 열정의 절정에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행복해질수 없다. 행복은 열정의 문제가 아니라 균형과 질서와 리듬과 조화의 문제이다.

 

 

음악은 소리만이 아니라 그안에 침묵이 있기 때문에 즐겁다. 소리와 침묵이 교체되지 않는다면 리듬이 있을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삶의 모든 침묵들을 소리를 채움으로써 행복해지고자 한다면 삶의 모든 여가를 일로 메꿈으로서 생산적이고자 한다면, 우리의 모든 존재를 행위로 대체해 버림으로써 실재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오직 지구상에 지옥을 만들어 내는 일만 성공하고 말 것이다.

 

 

우리에게 침묵이 없다면 하느님은 우리의 음악을 듣지 못하신다. 우리에게 휴식이 없다면 하느님은 우리의 일을 축복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우리의 삶삶의 모든 구석을 행위와 경험으로 채우기 위해 우리의 삶을 찌그러뜨린다면 하느님은 조용히 우리의 마음에서 떠나 우리를 텅 비게 하실 것이다.

 

그러니 불완전한 행위를 버리고, 우리가 잃고 있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하지 말고 다른 것으로 나아가도록 하자. 사실 우리는 잘못을 많이 저지른다. 그러나 그것들 중에서 가장 커다란 잘못은, 마치 우리가 결코,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줄 알았다는 듯이, 잘못을 저지른 것에 대해 놀라는 것이다.

 

 

실수는 우리의 삶의 일부이지, 중요한 부분이 절대로 아니다. 우리가 겸손한다면, 그리고 하느님의 섭리를 믿는다면, 우리의 실수는 단지 불가피한 악이라는 것, 즉 뉘우쳐야 하고 잘못했음을 인정해야 하는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실수들은 우리의 존재의 바로 그 구조속으로 끼어든다.  실수를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뿐만이라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경험을 얻는다.  우리의 경험은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똑같은 실수를 여러번 하는 것을 막지만, 반복된 경험도 역시 실제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거의 모든 것의 의미를 놓치기가 쉽다.  삶은 모든 것에서 무엇인가를 얻는 문제가 아니다.  삶 자체는 불완전하다. 모든 피조물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가기 시작하고 어느 누구도 절대적으로 완전하게 되지 않으며, 그렇게 살수는 더군다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각 개체는 단지 그것의 특별한 종을 위해 계획한 이상의 스케치 일뿐이다. 그것에게 더 이상 무엇을 요구하겠는가.

 

 

만약 피조물에서 절대적인 완전을 발견하기를 갈망한다면 그것이 유일하게 발견될 수 있는 곳에서, 즉 하느님에게서 완전을 찾으려 하지않게 된다.  모든 것들의 불완전, 그것들의 무상함, 그것들의 덧없음, 그것들의 허무함의 비밀은, 그것들은 다만 자신들에게 존재를 주신 하나의 '존재 '의 어렴풋한 표현에 불과하다는 데 있다. 그들이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그 자체로서 불변하다면 그들은 하느님에게 영광을 드리는 자신들의 소명을 게을리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아담과 이브로 하여금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맛보게 했던 '신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망' 자기 자신의 존재로써 언제나 완전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변하지 않는, 언제나 똑같은 남자와 여자보다 더 지루하고 재미없는 것이 있을까. 우리가 지상에서 사는 한 우리의 소명은 바로 우리 자체만으로는 불완전하고 미완성이고, 불충분하고, 변화하고 불행하고, 가난하고, 허약하고, 무덤을 향해 서둘러 가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전능과 그분의 영원하심과 그분의 평화와 그분의 완전하심과 그분의 영광은, 반드시 우리의 삶속으로 들어와, 우리가 여기에 사는 동안 그분께서 우리에게 뜻하신 대로 그분 안에서 영원히 살도록 한다.  이제 그분 안에서는, 즉 우리의 영원히 살도록 한다. 이제 그분 안에서는, 즉 우리의 영원한 생명안에서는, 타락을 의미하는 변화는 결코 없을 것이며 오직 끝이 없는 다양한 변화, 새로운 삶, 그분의 무 한한 깊이로의 나아감만이 있을 것이다.

 

 

거기에서는 휴식과 행위가 교체 되지 않고 하나가 될 것이다. 모든 것은 비어 있으면서 동시에 충만해 있을 것이다.  우리가 공허와 충만, 선한 의지와 무관심한 결과, 실수와 성공, 일과 휴식, 고통과 기쁨, 이 모든 것들을 우리의 선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협력하여 일하도록 결합하는 법을 알기만 한다면 우리가 이러한 삶에서 얻어야 하는 상대적 완성은 하루 24시간 내내 완전한 덕행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하고 극복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러한 이타적인 사랑의 완성에 주된 장애물이 되는 것 중 하나는 모든 것에서 최고의 것을 얻으려 하고, 자신의 눈과 다른 사람들의 눈에 눈부신 성공을 거둔 사람처럼 보이고자 하는 이기적인 근심이다.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거의 모든 것에서 약간을 잃는 것에 만족할 수 있어야만 이 근심을 없앨 수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습득하고 모든 것을 맛보고, 모든것을 이해하고, 모든 것을 속속들이 다 경험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거의 모든 것을 가버리게 놔 둘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잇다면, 아마도 우리에게 필요한 한가지것-그것이 무엇이든-을 보유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갖기를 갈망한다면 분명히 우리가 필요로 하는 그 한가지 것까지도 놓치고 말 것이다.

 

행복은 바로 우리의 삶에 '필요한 한 가지 것' 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데에, 그리고 기꺼이 나머지 것들을 포기하는 데에 있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필요로 했던 그 한가지 것과 함게 다른 모든 것도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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