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따뜻하게 해주는 것은 불이지, 불에서 나오는 연기가 아니다. 우리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게 해주는 것은 배이지, 배가 지나간 자국이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참모습은 우리 자신의 존재의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 찾아지는 것이지, 우리 자신의 행위에 대한 외적 성찰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진정한 자아는 우리의 존재의 충격에 의해 생겨난 거품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행위들의 본원인 우리 자신의 영혼에서 찾아야만 한다.
그러나 나의 영혼은 숨겨져 있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나 자신으로 부터 숨겨져 잇기 대문에 나는 그것을 직접 볼 수 없다. 또한 나 자신의 눈도 볼수 없다. 그것들은 너무나 가까이 있기 때문에 나는 그것들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눈은 자기 자신을 보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눈으로 다른 것들을 볼 때에야 내게 눈이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거울에서는 내 눈을 볼 수 있다. 나의 영혼도 역시 자신의 행위의 거울 속에 자신을 비출 수 있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것은 나의 진정한 존재가 아니라 나의 그림자일 뿐이다. 말과 행위의 겨울은 나의 존재를 다만 부분적으로만 보여준다.
나 자신으로 부터 나와 나 자신의 외부에서 이루어지는 말과 행위들은 그것들의 근원인 '숨겨진 생명'에 비교하면 죽은 것들이다. 이 행위들은 일시적이고 피상적이다. 그것들은 재빨리 사라져 버리고 그 결과는 아주 잠시 동안만 지속될 뿐이다. 그러나 영혼 자체는 남아 있다. 영혼은 자신의 행위의 거울에서 자신을 본다.
나의 영혼은 활동하지 않으면 자신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활동해야 한다. 활동하지 않고 정체되어 있는 영혼은 죽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나의 영혼은 완전히 그것의 활동으로 말미암은 외적인 효과로만 나타나서는 안된다. 나는 나 자신을 볼 필요는 없다. 나는 나 자신을 볼 필요는 없다. 나는 단지 나 자신이기만 하면된다. 나는 살아 있는 존재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나 나의 자아 전체를 생각하고 행하는 것에 몰입시킬 필요가 없으며, 또한 항상 내가 한 일에서나 자신을 찾으려 할 필요도 없다. 자신을 완전히 활동에만 투사하는 영혼은, 마치 사람이 조용하고 따듯한 자기 집을 놔두고 자기 집 앞의 길가에서 잠자는 것과 같다. 영혼이 자신을 집밖으로 내던져 자신이 행한 일의 결과 에서 자기 자신을 찾으려 하는 것은 마치 불이 타기는 원하지도 않고 다만 연기만 피워 올리고자 하는 것과 같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보기를 갈망하는 이유는 그들이 진정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완전히 믿지 못한다. 하느님을 믿는 다고 말은 하면서도 자신들의 믿음을 실천에 옮기지 않는 사람들과 믿음을 가지려고도 하지 ㅇ낳는 사람들도 이와 똑같다.
어느 경우에든 믿음의 상실은 곧 실재한다는 생각의 완전한 상실을 의미한다. 진정한 자기를 미워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존재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 자신의 실재<그것은 하느님의 실재를 투사한다>에서 평화를 얻을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진정한 존재를 회피하기 위해 몸부림쳐야 하며, 끊임없이 자신들이 행한 일을 봄으로써 거짓된 존재를 확인한다.
그들은 확인하기 위해 거울 속을 계속 들여다 보아야 한다.그들은 무엇을 보고자 하는가?그들 자신은 아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미치광이 같은-불사신같고, 강력하고, 무한히 현명하고 지극히 아름답고, 소멸될 수 없는-행위에 의해 그들이 되고자 소망하는 신이 되었다는 어떤 표징을 희망하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거울에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보고 또 볼 땨, 그의 영혼이 가지고 있는 두개의 비전을 그를 두 사람으로 분열시킨다. 그리고 만약 그가 자신의 눈을 지나치게 써서 상하게 한다면 그는 어느 것이 진짜인지를 잊어버린다. 사실상 실재는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서 도 또 그의 그림자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실체는 그 자체에서 빠져 나와 그림자 속으로 이미 가버렸기 때문에, 그는 하나의 진정한 살마이 아니라 두개의 그림자가 되어 버린다.
그렇게 되면 싸움이 시작된다. 한 그림자는 한편으로는 다른 그림자를 칭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비난한다. 그를 찬양하기 위해 했던 행동은 그를 꾸짖고 저주한다. 그것은 결코 실재하지 않는다. 결코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존재하지 않으면 않을 수록 점점 더 행위해야 한다. 그는 자기 자신의 노예 십장이 된다. 다시 말해서 그는 하나의 그림자를 죽일 정도로 채찍을 매질하는 또 하나의 그림자가 된다.
왜냐하면 그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실재할 수가, 즉 무한히 실재하는 본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면 두려움이 엄습한다. 그림자는 그림자를 두려워 하게 된다. '존재하지 않는' 그는 자신이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는 잠깐 동안은 무한한 힘, 초자연적인 존엄성<그가 자신의 덕행의 거울을 보고 상상할 수 잇었던 것>에 대한 환상을 가졌지만, 이윽고 모든 것이 바뀌어 버린다. 그가 행위를 하려고 할 때마다 자신속에서 비실체, 무기력, 절망의 파도가 물결친다.
그러면 그림자는 좋지 않은 그림자, 그리고 전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림자를 비판하고 미워한다.
자기 응시는 가장 지독한 절망, 그 자신을 죽도록 미워하는 신에 대한 절망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모상대로 닮게 창조된 인간, 무한한 선을 영원히 그리고 완벽하게 사랑하도록 창조된 인간의 구극의 타락이다.-인간은 자기 자신속에서 삶으로써만 그 선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자신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일을 그만두어야 하며, 우리의 공허한 거울속에서 우리 자신을 점검하고 확인하는 이릉ㄹ 그만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분 속에 존재하고 그분이 뜻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나 행하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또한 유한한 우리 자신의 환상에 의해 우리의 행동을 판단하지 말고, 우리와 함께 살악사는 사람들과 사물들을 에워싸고 계시는 그분의 실재에 의해 판단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과 평화롭기를 원한다. 우리는 우리자신의 존재에서 결코 안식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하느님과 소통할 수 있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과 친교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자기 자신과 평화롭지 못한 사람은 반드시 내적 싸움을 그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회에 투사시켜 사방에다 싸움의 전염병을 퍼뜨린다. 그는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하는 법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 노력할 때조차도 그의 노력을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는 빗나간 이상주의를 머리에 담고 다른 살마들을 행복하게 해주려한다. 그렇지만 그는 자기 자신의 불행으로 인해 그들을 파멸시키고 말 것이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살마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을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발견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일 속에 내던진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혼란과 분열과 불행을 초래할 뿐이다.
우리가 행한 모든 것에 만족해 함으로써 자신에게 평화로와 지고자 노력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 자신의 존재의 고요 속에서 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행위의 결과에서 자유로와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권한 밖인 결과들에 대해 어느 정도는 초월해야 하며, 우리의 내적 생명의 고요한 표현인 선한 의지와 일에 만족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사는 것, 즉각적인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일하는 것, 순간적인 만족을 구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 그리고 어떠한 특별한 인식도 바라지 않고존재하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평화로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으로 부터 자유로울 때 뿐이다. 실제의 우리보다 우리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울 때뿐이다. 실제의 우리보다 우리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울 때뿐이다. 실제의 우리보다 더 위대한 윌 자신을 찾기 위해서 우리를 우리의 영역 밖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영역빡으로 확장하려 한다면, 우리의 일에서 결코 행복을 발견하지 못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운명은 사실 위대한 것이다. 그러나 위대해지고자 하는 생각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위대성을 실현 할 수 없다. 우리의 위대성이라는 관념은 착각을 일으키기 쉬운데, 만약 우리가 그것에 지나치게 관심을 둔다면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존재의 평화와 안정을 잃어버릴 것이며 또한 우리가 우리 스스로 창조하였다는 신화속에서 살고자 할 것이다. 그러므로 작아지는 것,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은 매우 위대한 일이다. 우리가 참으로 우리 자신이 될 때, 우리가 얼마나 큰지 알기 위해서 늘 다른 살마들과 비교하게 하는 헛된 자의식이 없어진다.
우리의 존재는 반드시 행위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행위하기를 그만두면 존재하기를 그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무엇인가를 하기'우해서만 그것이 무엇이든 -사는 것이 아니다. 호라동은 바로 생명의 정상적인 표현중의 하나이며, 그것이 표현하는 생명은 행위의 질서정연한 조직에 의해 자신을 강화시킬 때 에 가장 완전하다. 이 질서는 활동과 휴식의 현명한 교체를 요구한다.우리가 단지 전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많은 것을 경험한다고 해서 더 완전하게 사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로 우리는 보통보다 더 적게 일하고, 보고, 맛보고, 경험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만 비로소 보다 더 완전하게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P49~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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