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 보면 여기 저기에 붙어 있는 노래방 간판을 보게 된다. 그때마다 어릴 적 추억이 생각난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반에서 제법 공부깨나 했던 나는 서울시 국민학교 합창 경연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구성된 교내 합창단원으로 뽑혔다. 합창단의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무척이나 자랑스럽기도 하고, 무대에 서게 되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마냥 부풀어 올랐다. 첫날은 지정곡과 자유곡의 계명과 음을 반복해서 익혔다.
연습을 시작한 지 이틀째가 되는 날이었다. 연습을 시키던 선생님께서 풍금을 치시다가 일어나더니 노래를 부르는 합창단원 사이를 오가며 학생 한 명 한 명의 노랫소리를 자세히 들으셨다. 그러더니 내 앞에 와 멈추고는 나의 노랫소리를 유심히 듣다가 "너는 입만 벌리고 소리는 내지 말아라" 고 말씀하셨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선생님께서는 음정을 맞추지 못하는 내가 마음의 상처를입을 까봐 합창단에서 빼지를 않고, 대신 합창이 엉망이 되면 안 되므로 입만 벙긋거리라고 하셨던 것이다.
나는 부끄럽기만 했다. 선생님의 지시대로 몇 번은 입만 벙긋벙긋 벌렸지만 자존심이 상해서 더이상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설마 이 많은 학생이 노래를 부르는 데 내 목소리 하나가 들려야 얼마나 들리겠느냐'하는 생각에 또다시 소리를 내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잠시후 선생님께서 다시 오시더니 나를 아예 합창 연습에서 빼셨다. 나는 멋쩍은 얼굴이 되어 고개를 숙이고 합창단에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1주일 후, 합창경연대회에서 우승 상품으로 하모니카를 받아들고돌아오는 합창단원들을 나는 무척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후 나는 내가 다니던 종교단체의 합창단에 들어 열심히 노력하여, 어느정도 남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옛날의 그 작은 '실퍠'가 지금 내게 단지 노래를 잘 부르게 해 준것만은 아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나는 음정만 틀린 게 아니라 합창단원이 지녀야 할 '하모니'를 몰랐다.
남의 소리를 들으며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음정이 어긋난 내 소리만 크게 내려고 했던 것이다.
노래방 간판을 볼때마다 빙긋 떠오르는 웃음과 함께, 우리 사회에는 남의 소리에 귀기울일 줄 모르고 자신의 소리만 크게 내려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생각이 들곤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월간 여의주<1996년.5>-책 '국어시간에 수필읽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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