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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정숙아

다림영 2008. 9. 20.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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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정숙아 , 칠 년 전인가 어느 날 문득 너는 내게 날아 왔었지. 하늘하늘한 잠자리 날개 같은 치마를 입고 꽃무늬가 그려 있는 참 예쁜 신발을 신고. 그러나 너의 목소리에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들이 잔뜩 서려있었어, 그래 그랬지.
 귀한 아들과 공주 님은 둘이나 있고. 네가 모두 얘기하지 않아도 환한 너의 그 배경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을 넓은 세계에 내 보내야 한다는 네 남편의 의지 때문에 편하게 살고 싶었던 너는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어미 잃은 작은 새처럼 떨었다. 학교 다닐 때에도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너였음을 너는 자꾸 말했어. 어찌 그 다른 세상으로, 일가친척 하나도 없는 그곳으로 달랑 너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날아가라 하다니 말이다.
 어수선하던 나의 안양 역 조그만 판자대기 가게에 들러 그 떨림과 무엇을 전하던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7년이란 세월이 훌쩍 흘러버렸구나.
 이런 저런 일들이 많았겠지.. 그래 그랬을 꺼야....
 암담하기만 했을 모든 상황을 잘 견디어내고 네 남편의 의지대로 너희 가족은 참으로 근사하게 변했구나. 난 너의 우울은 한번도 떠올리지 않고 그저 부러웠단다.


 그래 넌 어머니였어. 존경스러운 어머니 말이다. 여자가 아닌 어머니로 살았기에 모두 이루어낼 수가 있었던 거였다. 가만 네 관상을 떠올려 보니  그래 ....참 잘 살... 그런 얼굴이었다. 나 대단하지? 후후.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이런저런 책 뒤적이고 어른들 말씀 새겨듣다 보니 사람 보는 눈이 생긴 것 같다. 어쩌면 우리 모두 그럴 거야. 삶의 고초를 겪으며 반평생을 살아왔으니 말이다.
 우리 이 억 만리 떨어져 있지만 그동안 하지 못했던 얘기, 삶의 고뇌 한올씩 풀어가며 신나게 살았음 참 좋겠다.
 우리들의 학교 카페에서 너의 얘기를 만날 때마다 너와 더 친했던 경미의 얼굴이 요즘은 자주 떠오르고 잊혀지지 않는 그녀와의 얘기를 네게 하고 싶어진다.

 

 

 아마도 고 2 때 일 것이다. 아니 그때였어. 그 이상한 선생님 밑에서 온몸에 소름을 자르르 돋아내며 잔뜩 긴장하던 시절이었지. 너와도 같은 반이었는데 기억하지?
 시험을 치를 때면 연필을 들고 손바닥을 꾹꾹 눌러대며 이것저것을 묻던 네 모습이 떠오른다. 참 심란하던 시기였어. 마귀할멈 같기도 한 그 여자. 아니 별명이 혹시 마귀할멈 아니었나?
 사뿐히 한 걸음 옮기면 날아오를 것 같던 우리들의 후레어 긴 치맛자락에 거침없는 하이 킥을 올려댔다. 머리, 뺨 .... 할 것 없이. 그 앙상한 손바닥에 제 맘대로 힘을 가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런 여자선생님이 있었다는 것이 지금도 믿어져지지 않는다.


 예습을 철저히 하는 나였지만 그 여자와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느닷없이 번호가 불려지면 감전된 듯 발딱 일어나 외웠던 것도 반은 까먹어가며 후들거렸지. 두 눈을 있는 데로 감고. .... 후후후. 
 그 여자는 어쩌면 소녀들의 이름은 없다고 생각했나보다. 줄창 '7번 27번..' 번호만 불러댔다. 반장, 부 반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그들의 이름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반반 섞인 것 같은, 아니 검은 망토를 걸친 인조인간 같은 목소리로 목에 힘줄을 파랗게 세우고, 가는 눈을 부릅뜨고 부모의 원수라도 만난 듯 외쳐댔다.
 그때 우리는 무슨 죄를 저질렀던 것일까? 직사각형 단단한 검은 출석부를 두 손에 꽉 움켜잡고 친구들의 뒤통수를 힘껏 내려치는 일은 다반사였다.

 오호 통제라! 여린 풀잎 같던 소녀들의 영혼을 그렇게 학대를 한 선생이라니....

 

 

 그때 우리 반 열쇠는 언제나 내가 가지고 다녔다. 나는 정말 이른 시간에 등교를 했다.
 이른 아침 안개 속을 뚫고 언덕을 오르며 그저 노래 생각에만 젖어 살던 나였다. 안개 흐르는 교정은 내게 각별한 무엇이었다. 책가방을 자리에 휙 던져 놓고 후닥닥 음악실로 뛰어가던 내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흰 커튼을 차르르 한쪽으로 밀어버리고 창문을 하나 하나 열면 아카시아 향기는 폭풍처럼 밀려들었다. 이미 너무나 감상적이던 나는 그러한 모든 것에 정신을 잃곤 했다. 하루 중 그
한 때가 내겐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고 아무도 없는 음악실, 노래에 심취하여 시간가는 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경미는 불현듯 내게 남자친구를 소개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보다 자그마치 7살이나 위인 제 사촌 오라버니를 말이다. 나는 그래도 모범생이었는데 무슨 남자를 소개시켜주겠다는 것인지 조금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를 무척 아꼈던 언니 같던 그 애의 마음을 뿌리 칠 수 없었고  흰 연기가 구름처럼 피어나던 만두집으로 가야만 했다.
 그의 용모는 눈부셨다. 참 잘생겼다. 경미처럼 환한 이마 와 반듯한 콧날, 머리카락은 매우 검었고 큰 눈의 깊이는 가늠할 수 없었다. 누가 같은 집안 아니랄까봐 얘기하는 모습조차 고요하고 낮았다. 그는 목사님 댁 귀한 아드님이라고 했다.

 


 경미는 사전에 내게 "무얼 물어 볼 거니?  책 얘기 할 거니? 책이면 누구의 책? 톨스토이? 버지니아 울프?....좋아하는 노래 얘기 할거니? 아니야... 이런 저런 얘기해, 그리고 물어 보고 .... 알았지? "
 그러면서 물가에 내어놓은 동생 다루듯 교육을 시키는 것이었다. 나는 정말 그녀의 동생이기나 한 듯 입을 삐죽거리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도 남자를 만난다는데 어떠한 들뜸이나 또는 설렘도 없이 ....
 그러니 나는 그때 그저 노래부르기나 좋아하던 아주 작은 소녀였던 것이다. 그의 앞에서 무슨 얘길 했는지, 그는 또 내게 어떤 말을 물었는지 기억에 없고 다만 날 바라보던 그의 깊은 눈은 잊혀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경미는 다음 일을 추진했다. 그와 함께 내가 노래를 부르는 일을 만들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 경미는 내 목소리를 좋아했던 것 같고 매일 그가 내 사진을 들고 제 방 문턱이 닳도록 드나든다고 전했다. 그러한 얘기를 들으며 나는 처음과는 달리 설레었던 것이다.

 

 

 그때 우리는 한참 sing out 단원으로 학교 수업 후까지, 무용을 곁들인 노래 연습을 하느라 대부분 밤하늘 별들이 쏟아질 때가 되어서야 우리의 언덕길을 내려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경미는 그 희고 고른 이를 환히 보이며 내게 악보를 내밀었다. 절친한 이의 결혼식에 축가를 불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와 나 그리고 경미 이렇게 셋이서...
 '에델바이스'였다. 얼떨결에 그녀의 계획에 나는 휩쓸려 들어갔고 그녀가 다니던 교회로 연습을 하러 다니곤 했다. 그리고 한 달포가 지났을 것이다.
 아마 시험이 끝나고 채점 할 때였다. 선생님께서 몇 명에게 남아 채점을 하라 하셨다. 나는 이러저러한 일이 있어 가야 한다고 승낙을 받아도 되건만 무엇 때문인지 남아서 채점을 하겠다고 했고 경미는 발을 동동 구르다가 예식장으로 혼자 가야만 했다.
 도대체 알 수 없는 나의 앙칼진 마음은 시험지 점수를 매기는 내내 화가 들어 있었고 빨간 색연필은 동그라미, 가위 정신 나간 여자처럼 제 맘대로 춤을 추는 듯 했다.

 


 경미는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싶다. 이제와 돌아보며 내가 그렇게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
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만약 내게 그러한 상황이 생겼다면 친구의 배반을
절대 용서하지 않고 그때 우리의 담임처럼 뺨이라도 한 대 거침없이 올려 부쳤을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가만 생각하니 경미는 그 날 칼라에 새롭게 풀을 먹여 반듯하게 세웠고 표백도 다시 한 듯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예쁜 얼굴이 눈이 부시도록 돋보였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면 선이 있는 듯 없는 듯한 내 몰골과 야무지지 못한 옷매무새로 하여 나는 기가 있는 대로 죽을 것 같았다. 그 당시 나의 별명은 '쿤타킨테'였다. 어쩌자고 그러한 얼굴에 검기까지 했는지 말이다. 그 세 명이 부르는 노래에 중심이었던 내가 빠지면 분명 엉망일 것이 뻔한 줄 알면서도 알 수 없는 질투심으로 나는 친구를 배반하고 말았던 것이다.

 아직도 그 일이 가슴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 후로 경미는 오랫동안 나를 미워했을지 모른다. 겉으로는 큰 표현을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녀는 늘 책 속에 자신을 묻고  살았다. 그녀의 정신세계가 얼마나 깊었는지 나는 이제야 조금 감을 잡을 것 같다. 지금의 우리 나이에나 어울릴 듯한 얼굴로 세상을 관조하는 그런 모습이었던 것 같다.


 그 후 우리의 관계는 여전히 함께 노래는 불렀지만 소원해졌다. 경미의 사촌 오빠의 얘기 역시 그 후 잘 들을 수 없었고 나는 가끔 턱을 괴고 혼자 궁금해하기도 했다.
 그전에 그가 군대를 다녀오고 복학한 상태여서 일년 후 내가 졸업하고 전문학교에라도 들어가면, 대학 가요제에 한 팀을 만들어 나란히 나가야 한다고 경미는 강력하게 주장하곤 했었다.  팀 이름까지  거론하고 상상의 그림을 그려대며 혼자 무엇이 그렇게 좋았는지 들떠 즐거워하곤 했었는데....
 만약에 그때의 경미처럼 내가 독서를 많이 하는 깊은 사유를 지닌 소녀였더라면 나는 그와 노래를 함께 하는 아름다운 인연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가끔 운명을 생각한다. 운명은 내가 개척해 나가는 것이지만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일들이 간혹 있다. 나는 내 힘으로 되지 않는 일을 만날 때 이렇게 생각해 버린다.
"맞아, 이건 천년 전에 이미 이렇게 되게끔 정해져 있었던 거야...."
그러면 혼란하던 마음은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고 길고 긴 생의 여정 나의 보따리를 다시 챙겨 들고 길을 나서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 가까운 곳에 머무는 친구들과 선생님 모시고 불현듯 반창회를 하게 되었다. 아득하던 시절로 문득 돌아간 우리는 '하하 호호' 입을 다물 줄 모르고 재잘거리는 늙은 소녀들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 반갑고 기쁜 모습을 우리들의 카페에 올려놓으니 카페는 소란스러워 졌고 우리는 하나 둘 마음을 활짝 열기 시작했다.
 먼 타국에서도 옆에 있는 듯 온갖 얘기를 쏟아내며 그 알 수 없던 거리 한 순간에 가까워 졌고 하루가 멀다하고 들락거리며 마음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 너의 이름 석자를 발견하고 네 얘기를 만날 때마다 그때 우리의 천사 경미가 나는 떠오르며 아련한 추억에 잠겨 이렇게 긴 얘기를 풀어놓는 것이다.

 

 한 십 년 전 정도 일 것이다. 왜 그렇게 경미가 보고 싶었던지 말이다. 희미한 기억의 끈을
 잡고 그 애가 살던 집을 떠올리며  몇 번이나 찾아 헤맸던지.
 그러다가 나는 수소문 끝에 한 친구를 통해 경미가 사는 곳을 알게 되었고 학교를 졸업하고 이십 년이 훌쩍 지난 어느 날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너무나 변해 있는 것이다. 아니 내가 변한 것이었다. 나는 그때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책을 가까이 하며 살고 있었고 경미는 그 깊은 눈만을 간직한 채 평범한 주부의 생활만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가 각별한 곳에서 일을 하던가 작가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거의 단정했었다.
 경미는 지금쯤 김치를 맛나게 담그며 무얼 더 넣어야 하나 하고 고개를 갸웃댈 것이다.
정말 가정적인 사람이었고 사소한 평범을 지키는 다만 아름다운 주부였던 것이다.
 시간이 참 많이 흘렀지만 그때의 일에 대한 사과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사촌오라버니의 소식 또한 물어볼 수 없었다. 그리고 세월 따라 우리는 점차 다시 소원해 졌다.

 그래 정숙아, 어쩌면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끌로드차리의 아름다운음악의 제목 '첫발자욱'처럼 그때의 추억은 각별한 만남, 나의 첫 발자욱이 아니었나 싶고 너와 더 가까웠던 경미와의 얘기가 생각나 이렇게 길게 적었구나.
 지금의 나는 그때의 경미처럼 한 손에 책을 들고 그것에 취해 살아간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처음엔 글을 잘 쓰려고 버둥거리다가 그랬고 지금은 어느 날 불현듯 이런 무시무시한 글귀를 만나게 된 것이다.
중국의 옛 학자의 말씀이란다.
 "책 만 권을 읽으면 신의 경지에 도달한다." 이 엄청난 글귀에 '우르르 쾅' 하고 나는 감전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도 눈을 비벼가며 일은 뒷전으로 미루고 허리를 비틀어가며 책장을 넘기고 있는 것이다.  말도 되지 않는 얘기이고 욕심이겠으나 삶은 온통 고뇌의 길인 것을 알기에 그것을 받아들이며 껴안고 살아가야 하니까 말이다.
 어느 날 거울을 들여다보니 내 조그만 얼굴 속에 말로 표현 못할 고뇌들이 모두 내려앉아
 있는 것이다. '이건 아니다. 이 모습은 아니야....'
 남들은 돈을 주고 얼굴을 만든다지만 그러한 아름다운 얼굴을 원했던 것은 아니다.
 근래에 내면의 깊이와 맑음 서린 얼굴을 한번 만난 적이 있다. 나는 그녀로 하여 이제 절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그녀를 닮기 위해 수행이라고 말하면 우습지만 열심히 마음을 닦으리라 단호한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멀리 있지만 마치 옆에 있는 것 같은 정숙아, 경미는 이러한 얘기를 기억이나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친구의 배반이 있었는데 말이다.

 


 끌로드차리의 음악에 젖어 정신을 잃다보니 나는 그 추억의 세계로 문득 흘러 들어갔고  고요하던 그의 모습이 떠오르고 경미의 단아한 모습과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말이다. 어쩌면 별스러울 것도 없는 얘길 이렇게 늘어 놓아버렸다.
 네 눈을 피로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그곳 너희들의 멋진 만남의 얘기가 카페에 많이 실려 올라오길 기대한다. 언제 모인다고 했더라? 너희 모두 들떠 잠을 못 이루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모든 것을 용케 잘 견디고 이 만큼 걸어온 네가 자랑스럽고 근사하기만 하다. 그런 것을 보면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그 진리가 너의 지금을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언제나 밝고 예쁜 너의 모습 지키고 용기 있는 어머니, 아름다운 여자로 살아가길 바란다.
네 모습이 참 좋아 보이는구나. 언제쯤이면 우리 모두 함께 만나는 시간이 올 수 있을까...
그때가 분명 오기는 하겠지?
 그래 정숙아, 그러면 늘 건강하고 네 보석 같은 아이들 셋 모두 행복하길 기원하며 이만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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