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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에세이 /좋은아침/2006

다림영 2008. 7. 11.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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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아침



이만 칠천 원, 이십만 원…….
앞이 보이지 않았다. 며칠 두개의 통장을 매 시간 뒤져보며 셈을 해 보았지만 숫자는 더 이상 불어나지 않았다. 다부지게 마음을 먹고 보험 증권들을 살폈다. 여유 있을 때 시작하던 것이었고 해약한다면 엄청난 손해를 무릅써야 했다. 복잡한 것 싫어하는 나는 답답한 마음으로 보험회사에 전화를 했더니 절차는 의외로 간단했다. 일말의 손해 같은 것은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아이들 과자 하나를 사면서도 망설이던 요즘이었고, 정기적으로 들어가 야 할 이자들이 산처럼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퇴직금이 있는 월급쟁이도 아니고 그저 보험이 우리의 퇴직금이려니 생각하고 어렵사리 부어나가던 것이었다.

보험회사는 하루를 시작하는 준비로 부산하였다. 아직 업무가 시작되지 않았는지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번호표를 뽑아들고 깨끗하고 아늑한 큰 회사의 실내를 둘러보았다. 일하는 이들의 환한 얼굴을 보니 좋은 곳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그들이 마냥 부러웠고 나는 왜 좀 더 공부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1번은 어디로 갔는지 내가 뽑은 2번이 전광판에 떠올랐다. 단정하게 머리를 묶은 아가씨가 일어서더니 멀리서 내게 인사를 하였다. 두 손을 공손히 내밀며 나를 불렀다. 그녀에게 다가가니 날씨에 대한 인사를 서두로 봄꽃처럼 화사한 웃음을 건네며 첫 손님을 맞이한다. 그다지 밝은 표정이 아니었을 나에게 가볍게 대화를 유도하였다. 잠시 준비하는 동안에 커피를 한 잔 하라던가, 출근길인데 일찍 나오셨나보다 하는 그런 말들, 참으로 사소하고 평범한 말임에도 몸에 배인 고객에 대한 배려에 나는 갑자기 가슴이 따뜻해졌다. 엄마 말을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그녀가 일러준 곳에서 커피 한 잔을 타며 얼었던 몸과 마음을 녹일 수 있었다. 난 다정한 친절에 익숙하지 않았다.

엊그제 세무사 사무실 아가씨의 성난 목소리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녀와의 통화는 종일 우울한 기분에 휩싸이게 했다. 전화를 하는 내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언짢은 기분에 언성을 높일 뻔하였다. 삼 년 동안 내 가게의 세무처리를 해주는 담당 아가씨는 친절한 여자였다. 어느 날 전화를 하니 그녀가 그만 두었다며 무뚝뚝한 목소리의 여자가 귀찮다는 듯 전화를 받는 것이었다. 두 달 전 처음 그녀와 전화를 하면서 그곳과 거래를 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으나, 삼 년이나 거래를 했는데 어찌 바꾸나 싶어 다시 수화기를 들게 된 것이다. 두 달이 지나 내 계산이 맞을까 하고 정확히 해 두기 위해 물어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녀 왈, 두 달 전에 알려 드렸는데 그때처럼 하면 되지 왜 또 물어보냐는 것이다. 너무나 황당하였다. 득이 없는 손님도 그런 식으로는 말을 하진 못 할 것이다. 먼저 아가씨가 그만두고 분명 그곳의 고객은 많이 줄었으리라. 그녀의 불친절을 상사에게 알리고 싶은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보험회사 아가씨가 권하는 커피 한 잔을 들고 그녀 앞에 앉았다. 보험을 계속 유지하고 대출을 받는 편이 어떨까 하고 권하였지만 나는 대출이 많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하였더니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셨군요.󰡓�� 하며 회사 측에 유리한 말을 언급하지 않았다. 내게 보탬이 될 얘기들을 건넸고 위안의 말도 잊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공손한 자세로 인사를 하며 내가 들고 있는 책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그 책 재미있나요?" 하고 미소 띤 얼굴로 물어왔고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웃었다.

작은 친절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마음을 잇는 다리였으면 좋겠다. 말 한마디가 출렁출렁 물살을 일으키며 메마른 마음을 적셔주면 참 좋겠다. 조그만 배려로 세상은 조금 더 밝은 모습으로 채색 될 것이다.
웃을 일 좀처럼 없던 나였지만 십 여분의 친절로 이내 미소를 지을 수 있었고 가벼운 마음으로 전철에 오를 수 있었다. 눈이 내려 하얗게 덮인 겨울 들판을 따스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돈이 없어 쩔쩔매던 그 동안의 아픈 마음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여유가 생기면 그녀에게 가 보아야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참으로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가게 문을 힘차게 열고 청소하는 환한 아침, 한 청년이 노래를 부르며 지나간다. 그도 누군가에게서 이 삭막하고 추운 겨울, 친절이라는 근사하고 아름다운 마음의 선물을 받은 것은 아닐까? 그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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