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그다음부터~

다림영 2008. 9. 8.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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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의역>

인간의 산 몸은 부드럽고 연약하다. 인간의 죽은몸은 굳고 단단하다. 살아 있는 초목은 부드럽고 연약

하다. 그러나 죽은 초목은 말라 딱딱해진다. 그러므로 굳고 강한 것은 죽음의 현상이다. 부드럽고 연약한

것은 생의 현상이다.

이러하므로 군대가 강하면 멸망하고, 마뭇가지가 강하면 부러지고 만다. 굳고 강한 것은 아래에 있고

부드럽고 약한 것이 위에 있다.

<도움말>

제 76장은 생사를 헤아리게 하는 장이다. 생은 유약하므로 이기고, 사는 견강하므로 진다는 사실을 터득

하게 한다. 여기서 강하면 이기고 약하면 진다는 인간의 생각은 결국 목숨을 해치는 짓이 됨을 깨우치게

된다.

유약은 부드럽고 약한 것을 뜻한다.

견강은 굳고 강한 것을 뜻한다.

유취는 부드럽고 연약한 것을 뜻한다.

고고의 고는 수명이 다한 것을 뜻하고 고는 죽어서 메말라 버린 것을 뜻한다.

도는 한 무리의 모습이나 현상을 말한다.

병강은 군사력이 강한 것을 뜻하며 그런 나라로 보아도 된다.

목강은 죽은 나무가 메말라 부러지기 쉬운것을 뜻한다.

 

제 77장 남으면 덜어내 부족한 것을 메운다.

높은 것은 눌러 내리고 낮은 것을 치켜 올려라.

어떤 목숨이든 먹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다. 생존의 설움중에 배고픈 설움이 가장 아프고 집없는 서러움이

그 다음이라고 한다. 이처럼 목숨은 먹을 것이 있어야 하고 잘 곳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천지는 만물의 집이고 만물은 다같이 어울려 살도록 하는 것이 도덕이다.

도덕은 분별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는다. 목숨에 귀천이 없으므로 도는 생물을 하나로 가슴에 안고 천지는

만물의 둥지이므로 덕은 곡신에서 만물을 어루만진다.

 

곡신은 빈고을 같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온갖것이 다투지 않고 머물러 산다. 무생물이든 생물이든 서로 어

룰려 있을 뿐이다. 초목은 흙속에서 먹이를 얻어 먹고 자라며 숲속에서는 온갖 짐승이 초목에서 먹이를 얻

어먹고 산다. 이처럼 있는 그대로 네것 내것 없이 사는 곳을 곡신이라고 하며 이는 어머니의 품안같은 도

의 모습을 말해 주는 셈이다.

 

도에 부익부 빈익빈이란 것은 없다.

부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지는 짓따위는 인간 세상에만 있을 뿐이다.

사자가 들쥐처럼 많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수풀속에 짐승이 남아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사자도 먹이를

얻지 못해 굶어죽을 것이다. 상어가 멸치떼처럼 많다면 어떻게 되겟는가. 바다에서 생선은 씨가 마를 것이다.

 

그 또한 상어는 먹이를 찾지 못해 굶어 죽을 것이다.

사자의 체력은 엄청나지만 번식력이 부족하다. 그러나 들쥐는 체력은 형편없지만 번식력은 대단하다. 상어

와 멸치와의 관계도 같다. 이처럼 자연은 치우침도 없고 모자람도 없다.

모란보다 민들레가 행복한 편이다. 민들레는 제자리를 차지하고 꽃을 피우지만 모란은 산천을 잃어버리고

인간의 노리개감이 된 까닭이다. 경마장에서 뛰는 말은 당근을 얻어먹고 살지만 질긴 풀만 뜯어먹고 사는

야생마는 천지의 품안에 있다.

 

천지의 품안을 떠나 인간의 수중에 들면 만물이 저마다 지니고 있는 제 몫을 잃게 되어 안타깝게 된다.

열걸음 종종거려 물한 모금 마시고 백걸음을 뛰어야 모이 하나를 찾아먹는 들꿩은 조롱 속에 사는 새를 

부러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장자가 말한 것도 만물은 천지의 품

안에 있어야 마음이 편안함을 말해준다.

 

넘치고 처지는 꼴이 빚어지면 마음은 편치 못하게 된다. 한쪽은 먹을 것이 남아돌고 다른 쪽은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게 되면 난리가 저절로 일어나는 법이다. 어떠한 난리든 인간의 욕심에서 빚어지는 것

일 뿐이다. 도덕은 욕심을 부리지 않으므로 천지를 무위자연으로 포옹하는 것이 아닌가.

 

 

도의 포일에는 치우침도 없고 모자람도 없다. 어떻게 그처럼 하는가를 노자는 다음처럼 밝히고 있다.

하늘의 도는 활을 메우는 것과도 같도다. 활을 메울 때위는 눌러주고 아래는 치켜올려 주며, 남아 있는 긴

줄을 덜어내 모자란 줄에 더해준다. 이처럼 하늘의 도는 남는 것에서 덜어내 부족한 것에 부태준다. 그러

나 인간의 도는 그 같지가 않아 부족한 것에서 덜어내 남아도는 쪽에 바친다. 누가 남아나는 것으로 천하에

봉사할 것인가. 오로지 하늘의 도를 따르는 자 박에는 없다.

 

 

큰나무 밑에서 작은 나무는 살지 못한다. 이러한 속담은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지 자연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큰 나무 밑이 없다면 버섯은 살 곳이 없어지는 까닭이다.

사람을 키우면 호랑이 새끼를 키우는 것과 같다. 키워준 은혜를 모르고 덤벼드는 것은 호랑이 새끼가 아니

라 사람이다. 호랑이 새끼가 호랑이를 물지는 않는다.

 

오로지  사람만이 서로 물고 헤집고 헤치려고 할 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클 성 싶은 싹은 처음부터 도려내

야 한다는 심술을 부린다. 9백냥을 가진 자가 백냔을 가진 자를 등쳐서 천냔을 채우려고 하는 것이 졸부의

욕심이 부리는 심술이다. 이러한 심술만 없다면 서로 어울려 살 수가 있다. 그러나 졸부들의 심술 탓으로

인간사회는 언제나 앓는다. 

 

농촌의 거농은 장리를 놓고 도시의 거상은 돈놀이를 한다는 옛말이 있다. 장리는 봄에 양식을 빌려준 다음

가을에 곱으로 받는 것이고 돈놀이는 돈으로 온갖 횡포를 부려 서민의 호주머니를 터는 온갖 짓거리를 서

슴치않는다.  이제 장리란 약탈은 없어�지만 여전히 졸부들의 돈놀이는 기승을 부린다.

 

동태의 내장을 들어내고 겨울 햇살에 말린 명태를 황태라고 한다. 그 황태가 한 때는 황금태가 된 적이 있

었다. 매점매석으로 황태가 금값이 되었다는 말이다. 황태가 왜 금값만큼이나 비싸지게 되는가. 동해 연

안에서 생태를 많이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안 졸부들이 동태를 모조리 사서 황태로 만든 다음 창고에 넣어

두고 조금씩 내다 팔아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기막힌 졸부의 돈놀이 인가

 

황금태가 되었다고 명태를 잡은 어부가 떼돈을 버는 것은 아니다.이잣돈을 내다 물질하는 어부는 이자를 

갚느라 호주머니에 돈이 남아 날 수가 없지만 돈놀이를 하는 졸부의 금고에는 이자에 이자가 붙어 돈이 

날이 갈 수록 불어나고 그 돈으로 생선값을 올릴 수도 있고 내릴 수도 있는 장난을 칠 수가 있어 고기 잡는

어부들은 꼼짝을 못하게된다.

 

그래서 부자는 더욱 부자갇 ㅚ고 가난뱅이는 더욱 가난뱅이로 처지는 일이 인간 사회에서는 없어지지 않

는다.  도마뱀은 급하면 제 꼬리를 자를 줄 안다. 그러나 졸부가 달고 있는 욕심의 꼬리는 잘릴 줄을 모른

다.  긴 것이 짧은 것을 잘라오면 제 꼬리가 더욱 길어진다고 욕심을 부리며 졸부의 꼬리는 게걸스러워진

다.  그래서 졸부는 도둑촌에 살고 가난뱅이는 달동네에 산다는 유행어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자연에

는 도둑촌도 없고 달동네도 없다.

 

위는 내려 누르고 아래를 치켜 올린다.

인간사회에는 다스리는 족이 있고 다스림을 받는 족이 있다. 다스리는 쪽이 높기만 하고 낮출 줄을 모르면

다스림림을 받는 백성은 허리를 펴지 못하고 항상 허덕인다. 그렇게 되면 관리가 나라의 주인 노릇을 하고

백성은 머슴노릇을 하는 꼴이 된다. 이를 관존민비라고 한다.

 

그러나   백성을 추겨올리고 관리의 작폐를 금하면 세상은 물길처럼 흘러갈 수가 있다  공무원의 급료는

박봉이지만 살기는 부자처럼 산다는 소문이 자자하면 자자할 수록 세상은 얽힌 실타래처럼 꼬이게 된다.

이렇게 되는 것은 인간들이 하늘의 길을 벗어난 짓이라고 노자는 밝혀 준다. 도덕을 활을 메는 것에 비유

해 위쪽을 눌러주고 아래쪽을 치켜올린다고 ㅁ라한 것이다. 이말을 들으면 부패한 사회가 왜 생겨나는지

알수가 있다. 썩은 사회는 위쪽을 억지하지 않고 거지하고 아래쪽을 등쳐먹는 꼴인 까닭이다.

 

남는데서 덜어내 모자란데 보태준다

백성이 세금을 내고 억울해 하지 않으면 도둑이 드문 세상이다. 그러나 백성이 세금을 내기를 꺼린다면 나

라에 도둑이 많다는 말과 같다. 있는 자에게는 있는 만큼 세금을 물리고 없는 자에겐 형편에 맞게 세금

을 내게 한다면 서로 함께 사는 세상이 될 수가 있다.

 

 

있는 자는 베풀고 없는 자가 보답하는 세상이라면 인간의 세상도 수풀이 어우러져 사는 숲속처럼 된다.

밤숲에 다람쥐가 많은 것은 떨어지는 알밤을 주워먹을 수 있는 까닭이다.다람쥐는 떨어진 밤을 먹이로 주

워가되 털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털고 훑어가 감추어 두는 짓을 한다. 그래서 남아 도는 쪽이 있는가

하면 없어 굶주리는 쪽이 있다. 이렇게 빈부의 골을 파는 짓은 도덕이 아니다.

 

남으면 덜어내 모자란 쪽을 채워주는 것을 덕이라고 한다. 베푸는 부잣집에는 도둑도 담을 넘지 않는다.

남는것에서 덜어낸다는 것은 베푸는 것이요. 모자란 것에 보태준다는 것은 보답하게 하는 것이다. 베풀

고 보답하면 인간인들 어찌 어울려 살짐 ㅗㅅ할 것인가. 어울려 산다는 것은 은혜를 주고 받는 것이다. 이

렇게 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다.

 

모자란 것에서 덜어내 남은것에 바친다.

땀흘려 번 돈은 귀한 것이고 훔쳐먹은 돈은 천한 것이다. 이러한 말이 진실로 통하는 세상이라면 도둑질은

없을 것이다. 부정축재란 말도 없을 것이고 특혜란 말도 없을 것이다.

 

세금을 모아 목돈을 만들어 한 살마의 욕심을 채우는 밑천으로 삼게 해주는 일이있다면 백성이 내는 세금

은 깨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 기업은 망해도 기업주는 부자가 된다는 말이 바람처럼 불고

다니면 세상은 소잃고 외양간마저 날려 버리는 꼴이다. 빈자의 좁쌀을 팔아 부자의 금고를 사주는 꼴로

돌아가면 세상이 조용할 수가 없다.

 

인간의 욕심이 환장을 하면 가시방석에 앉아도 아픈줄을 모르고 얼굴에 침을 뱉아도 구유에 주둥이를 박

은 돼지처럼 꿀꿀거리기만 한다. 그리고 세상을 한덩이 살코기쯤으로 아는지 칼자루만 쥐면 한칼씩 잘라

다 감추고 숨겨두면 된다고 용심을 부린다. 이러한 용심이 사기를 치고 횡령을 하고 약탈해 축재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익부 빈익빈의 마찰이 온 세상을 찢어 놓고 마는 것이다.

 

시궁창은 열어두고 샘물은 닫아두라. 왜 이런 말이 생겼을 까.  인간의 속은 시궁창처럼 될 수도 있고, 샘물

처럼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궁창에는 햇빛이 들어야 썩지 않는다. 그러나 샘물은 맑고 깨끗해 덮어두어

도 썩지 않는다.  욕심은 나를 더럽게 하고 욕심을 떠나면 깨끗해진다는 말을 인간은 듣기 거북해 하며, 썩

은 인간일 수록 숨어서 노략질을 범한다.

 

털어서 먼지 안날 사람어디 있느냐. 다들 도둑과 같다는 자조적인 말이다.  서로 제 몫 차지를 하려고 한다

는 자기 변명일 수도 있다. 고을 원님이 서로 물고 물리면 터는 쪽이 털리는 쪽을 밟는다. 이러한 짓은 모두

시궁창 같은 욕심이 빚어내는 약탈이다.

 

인간이요. 노략질을 말 것이요. 약탈을 말것이다. 이러한 짓은 하늘의 길을 벗어난 인간의 짓이라고 노자는

밝힌다. 노자는 이를 이렇게 폭로해 둔 셈이다. 빈자의 것을 털어내 부호에게 보태주는 꼴이다.

 

누가 남는 것을 베풀까.

마음이 옹졸하면 베풀줄 모른다. 넉넉한 마음이 베풀줄을 안다. 콩 한쪽도 나누어 먹고 백지장도 맞들면 가

벼운 법이다. 재물이 있다고 마음이 넉넉해지는 것은 아니다. 재물을 소중히 여길 수록 목숨을 사랑할 줄

모른다. 소인은 자기와 인연된 것만을 위할 뿐 그 외에는 인색하다. 소인의 마음은 옹색하고 옹졸한 까닭

이다. 그래서 소인은 도를 멀리하고 비웃는다. 소인배가 치자가 되면 세상은 흐려지고 더러워진다.

누가 훈훈하고 깨끗하게 할 수 있는가. 도를 따르는 자이다. 유도자를 성인이라고 한다. 성인 만이 세상을

받들어 모실 수가 있다.

 

성인은 세상을 받든다. 이것이 곧 봉천하인 것이다. 천하를 만물과 백성이라고 보아도 된다. 성인은 만물

을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성인은 우주만물을 형젤 보기 때문이다. 천하의 모든 것들은 모두

도의 자손이다. 치자가 성인을 닮으면 세상은 맑은 샘물처럼 된다. 백성은 목이 마르면 그 샘물을 마시고

삶을 누린다.  현대인이여. 성인을 전설 속의 초인처럼 생각하지 마라. 성인은 살아 있는 인간의 선생이라

고 생각하라. 성인의 삶을 생활의 본보기로 삼아 보라. 노자는 이렇게 절규 하고 싶은 것이다. 성인은

다음처럼 삶을 누리는 당사자인 까닭이다.

 

성인은 일을 하되 그 대가를 바라지 않으면 공을 이루고도 그것에 연연하지 않으며 남보다 현명한 체를 않

는다.  노자는 위와 비슷한 말을 제 51장에서 이미 밝혔다. 왜 다시금 되풀이 했을까. 아마도 도의 생활을

잊거나 잃지 마라는 경고가 아닌가 싶다. 도는 만물을 낳아주되 소유하지 않는다.

 

이것이 도생지요. 생이불유가 아닌가. 덕은 키워주되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것이 덕축지가 아닌가.

도덕은 키워주고 길러준다. 이는 도덕의 장지육지가 아닌가. 도덕은 편안히 누리게 한다. 이는 도덕의 정

지독지가 아닌가.도덕은 보살피고 안아준다. 이는 도덕의 양지복지가  아닌가.  높은 자리에 있을 수록 아

래를 억누르지 말것이요. 남는 것에 서 덜어내 모자란 것에 보태줄 것이다. 그러면 저절로 도덕은 귀하게

된다.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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