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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관한 창작 문화 페스티벌/2006년PAPA프로덕션

다림영 2008. 7. 3.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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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일’에 관한 창작 문화 페스티벌-소재공모전 /작품상



가난한 금은방

초등학교 동창이 10년을 넘게 하던 가게였다. 그녀는 부자였기에 어떠한 위력이 있었고, 그 오래된 벽을 허물기는 쉽지 않았다. 인수 받은 지 햇수로 4년째인 지금까지도 친구와 나를 비교하는 사람을 종종 만난다.
사실 내 집보다 더 예쁘게 마음을 실어놓은 가게였다. 처음 가게가 카페처럼 들어섰을 때 저마다 걱정을 하고 시기를 하였다.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얘기다.
나는 봄이면 봄 꽃을 유리창 앞에 늘어놓았고, 가을이 시작되는 9월이면 국화화분을 내어놓았다. 지나는 이들마다 이 특별한 가게에 시선을 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요즘 가게 앞엔 지난해에 거두었던 과꽃의 씨앗들이 고개를 내밀고, 손가락만 한 잎을 펼치며 올라왔다. 이제 여름이 지쳐갈 무렵이면 수수한 과꽃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이곳에서 살았고 학교를 다녔다. 결혼하기 전까지, 도회지에 나가 상처를 받고 눈물을 훔치며 집으로 돌아 올 때면, 휑한 거리의 차가운 하늘을 올려다보며, 금빛 별들에게 위안을 받았고 또 치유할 수 있었다. 또 각 또 각 시린 구두 발자국 소리를 울려대며 걸었던 그 가난한 거리에, 있는 대로 정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그 시절 그 가난하던 거리, 그때의 논과 밭들, 기차소리, 우리들의 학교, 멋진 저수지, 그리고 흔들리는 갈대와 흰 새들…….
비라도 쏟아지는 날은, 때로 문을 걸어 잠그고 저수지 길을 나서보기도 한다. 언젠가 비를 맞으며 저수지 길을 걷는 내 모습이, 친구남편의 눈에 띄어 당치도 않는 우스갯소리를 듣기도 하였다.
하룻밤, 어느 집에 초상이 나면 금세 동네 한 바퀴를 돌며 슬픔을 나누게 되고, 누군가 야반도주를 했다면, 그 역시 다음날 아침이면 동네는 어수선해지는 것이다.


나는 친정에서 남자동생 넷을 둔 하나밖에 없는 딸이다. 더군다나 맏이여서 어린 시절 여러모로 친정엄마의 지대한 뒷받침이 있었다. 궁핍한 시절이었지만 엄마는 특별한 때마다 사진을 찍어두곤 하셨다. 그 흔적들은 지금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고, 가끔 가게에 들르는 어릴 적 친구들은, 소중한 흑백사진을 들여다보며 웃음을 나누고, 그때의 의미도 없던 추억들을 떠올리곤 하는 것이다.
1969년 1학년 개근상장도 걸어두었다. 들어오는 손님마다 유심히 살핀다. “1969”란 숫자에 모두 내 얼굴을 다시 보곤 한다.
가끔 동네꼬마들이 방문하면 나는 이런 주문을 하기도 한다. “얘들아 아줌마라 부르지 말고 선배님 하고 불러줄래”...... 아이들은 쑥스러워 말을 잘 잇지 못하지만 “선배님”하고 불러주는 까마득한 사 십 년 가까운 후배가 생겨나기도 하는 것이니, 그 어린 후배에게 사탕 하나 입에 물려 보내며 혼자 뿌듯해 한다.
거리를 지나는 나이 드신 선배님, 다정한 후배들, 그 모든 동문들의 인사는 아름답고 각별 하기만하다. 언젠가 까마득한 선배님께서 내게 이러한 인사를 하셨다. “행복하시죠?”......
그 후 나는 “행복하세요, 행복하시죠, 행복하렴” 이런 유의 인사를 가끔 한다.



어떤 친구는 이곳을 베드타운이라 얘기한다. 서울과의 거리가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고, 사방의 잘 뚫린 도로망과 전철역 그리고 주변의 대도시들과의 거리도 상당히 가깝다. 그러나 없는 것이 너무 많은 서민동네, 대부분의 소비는 인근도시에서 이루어지고, 문화적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은 참으로 미미하다. 그러한 이유인지 인근도시보다는 집값이 싼 탓에, 서민들의 주거지로서의 선택은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온 것이다.
얼마 전 이곳 경제를 그런대로 윤택하게 해 주던, 어릴 때부터 있던 큰 공장이 덜컥 문을 닫아버렸다. 사실상 장사하는 사람들은 먹고 살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이러한 와 중, 시에서는 중앙로를 넓혀야 한다는 공식적인 주민 설명회가 있었다.
요즘은 그 시기가 하루라도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람으로 하루하루 긴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이곳 주민생활의 편리를 떠나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가게를 이끌어 갈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가득한 이곳에서 아름다운 가게를 만들어가는 다정한 가게주인이 되고 싶었다. 고향을 다니러 오는 어릴 적 친구들을 기다리며, 가게와 함께 곱게 늙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남편의 말처럼, 세상은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전국적인 불황과 특별히 심한 이곳의 어떠한 침체로, 하루하루 나의 가게는 간신히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남편의 사업위기까지 맞물려 이곳 저곳의 대출이자로 허리는 꺾일 듯 휘어진다. 일곱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고, 도시락 두 개를 가지고 다니며 간신히 살아내고 있고, 허울만 번드르르한 직업을 가진 자의, 이 기막힌 심정을 누가 짐작이나 할 것인지…….



반지이야기

나는 반지 장사를 하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지는 절대 끼지 않고 있다. 돋보여야 할 손이 반지로 하여금 더욱 볼품없게 되기 때문이다. 반지를 팔면서 수수한 반지 하나 끼고 있지 않다고 간혹 핀잔을 듣기도 한다
창가로 내려앉은 햇살만큼 눈부신 반지를 끼고 나는 우아하게 앉아, 지나는 이들을 유혹 해야 하는 것이 직업상 당연한 도리이다. 그러나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공장의 기술자 같은 손으로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어찌 보석 장사하는 사람 손이 그래요" 하는 남자손님의 기막힌 말씀으로 종종 얼굴이 붉어지기도 한다.
친구가 선물한 핸드크림을 바르며 그녀가 던진 말을 한동안 생각한다. "얘, 손님에 대한 예의야"……. 이 직업에 귀의한 이상 반지가 돋보이는 손으로 가꾸지는 못할망정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변하지 못하고 가락지 하나 낄 수 없는 메마르고 거친 나의 손은 가게를 방문한 손님 앞에서 부끄러운 춤을 추고 있다.



어느 날이었다. 낯익은 늙은 총각이 여자가 생겼다며 세상의 행복을 저 혼자 소유한 것처럼 수선을 피우고 커플 링을 맞추어 갔다. 나는 그를 축하하며 결혼에 골인하기를 기대했다. 그가 다녀가고 삼 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때와는 전혀 다른 험상궂은 얼굴로 돌아와 반지를 던지다 시피 내어놓았다. 여자와 헤어졌단다. 그녀에게서 그 반지를 빼앗아 온 것이다. 반지를 맞추어 간지 겨우 삼일 밖에 되지 않았다. 그토록 좋아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어떤 기막힌 사연이 있어 반지를 빼앗아 가지고 올 수 있었는지…….


지난 봄날에는 나의 좁은 문으로 가족이 한꺼번에 유쾌한 바람을 일으키며 들어왔다. 나는 가족반지를 맞추는 사람들을 처음 보았다. 그들의 손가락 치수를 일일이 재며 내 일인 듯 즐거워하였다.
제 아빠보다 등치가 커다래진 내 세 아들들의 믿음직한 손가락에 똑같은 반지가 끼여 있는 것을 상상하며 그 가족에 대한 소문을 깜깜한 밤중까지 퍼뜨렸다.


오늘도 그 남자는 오후 2시가 되면 내 가게를 지날 것이다. "탁 탁 탁 탁"……. 그가 지팡이로 길을 살피는 소리가 들려오면, 하던 일을 멈추고 오랫동안 그 모습을 지켜본다. 그의 일정한 지팡이 소리는 경쾌하고 힘이 있다. 어느 날 그가 예쁜 여자와 함께 나의 가게 문을 밀고 들어왔다. 나는 그의 여자친구인줄 알고 반갑게 맞이했는데 알고 보니 동생 이었다. 동생은 남자친구와의 커플 링 때문에 문의를 하러 들린 것이다. 늘 어느 만큼의 거리에서 마주하던 그였고 참 밝구나 하였었다. 문득 동생은 어린 왕자 반지를 고르고 참으로 다정한 목소리와 눈빛으로 설명 하는 것이다. 나는 갑자기 두 눈이 시큰해졌다. 이겨내기 힘든 장애를 입고서도 아이처럼 환하던 이유를 그제야 짐작 할 수 있었다.



어느 방송 실험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의 열정적인 사랑은 고작 삼 개월이 전부라 하였다. 세상이 빠르게 변해 가는 것처럼, 두 사람의 사랑은 사방으로 유혹이 넘실대는 험한 세상을, 버텨내고 지켜나가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서로 간에 반지를 끼워두고 "이 사람은, 혹은 나는 임자가 있습니다." 하고 자신의 마음도 상대방의 마음도 하나의 동그란 고리로 묶어 놓고, 물건에 이름표를 붙이듯 너른 세상에 공포를 하는 것인가. 가끔 예쁜 반지 하나 끼고 싶어 나를 방문한 독신의 사람들은, 이 손가락 저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대며 "애인이 없는 사람은 어디다 끼어야 하는 건가요?" 하고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묻곤 한다.



인터넷에서 반지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들을 찾아보았다. 반지의 둥근 모양은 완전함의 상징으로 남녀는 결혼 함으로서 완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끝없는 사랑의 의미라고 한다. 약혼 혹은 결혼반지는 이집트시대부터 왼손 셋째 손가락에 끼어 왔는데, 이유는 사랑의 혈관이 왼쪽 셋째 손가락으로부터 심장으로 흐른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손님 중에 친하게 지내는 예쁜 처녀가 한 명 있다. 전문적인 직업을 가지고서도 그녀의 목표가 오직 결혼인 것이 나로선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녀는 오늘 어떠한 남자와 첫 만남의 약속이 있다. 한 번도 끼워보지 못한 커플 링을 오랫동안 살펴본다.
사랑의 족쇄를 채우고 지속적인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이 지구상에 얼마나 존재하며, 남녀 간에 끝없는 사랑은 진정 존재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녀가 시계를 들여다보고 손을 흔든다. 치맛바람을 일으키며 나풀나풀 꽃을 찾아 길을 떠나는 한 마리의 나비처럼, 길 저편 무지개 동산으로 반지의 꿈을 꾸며 달려간다.



몰랐던 세상

그녀는 이상한 여자였다. 저와 내 나이가 같다며 제 맘대로 나를 친구라고 불렀다. 그녀만큼 화려하고 귀티가 나는 여자는 이곳에서 만나기 어렵다. 그 흰 피부하며, 입은 옷 그리고 고급 차……. 그녀가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하는 여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은 나의 귀한 손님이다. 그러나 그녀는 분명 진실 된 사람은 아니므로 마음으론 받아들이지 않았다. 뜻 없는 웃음만 지으며 반겼다.

그녀는 내 가게에 남자와 함께 발을 들여놓을 때면 나를 가리키며 “내 친구야” 하고 들어선다. 내게 나타날 때마다 남자가 바뀌었다. 남자들은 늘 술에 취해있었고, 그들은 한 결 같이 그녀가 원하는 데로 과감히 생일선물을 해 주었다. 내 가게에 그녀가 발을 들여 놓을 때마다 그녀는 제 생일 인 것이다.
그녀가 보이지 않은지 일 년이 넘어간다. 어쩌면 어디 낯 모르는 곳에 혼자 들어가 있거나 분명 잘못되었으려니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의 양 엄마라는 사람이 어느 날 나타나 뜻밖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누구 가 아주 괜찮은 사람 만나 결혼했는데, 그 이후 전화도 안 받고 꺼져있어” 하는 것이다.


이곳에는 주변 식당에서 몸을 담고 있는 조선족 여자들이 제법 많이 거주한다. 그녀들은 금에 대한 애착이 상당히 강하다. 사람들에게 많은 속임을 당했는지 도무지 물건 하나 팔기가 수월치 않다. 참으로 어려운 고객 인 것이다.
항간의 풍문에 의하면 부부 중 혼자 나오면 일이 생기기 쉽다고 한다. 모두 그런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종종 그러한 관계로 가게에 들르곤 하는 사람들이 있다. 얘기만 가만히 듣고 있어도 나도 모르게 냄새를 맡게 되고는 한다.


금은방을 하면서 이상하게 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법적으로 내세울 근거가 없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변하지 않는 금을 서로 간에 선물을 하며, 알 수 없는 미래를 약속을 하곤 하는 것이다.


사고도 많은 가게, 아무나 쉽게 하지 못하는 가게를 나는 왜 하게 되었는지, 운명은 생각지도 않던 일터에 나를 데려다 놓았다. 처음엔 무서워 매일 긴장을 하고, 젊은 남자가 들어서면 눈을 퍼렇게 뜨고 마음으로 힘을 주곤 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60대 노인이었다. 그저 동네사람이거니 하고 경계하지 않았다. 그는 이른 아침부터 가게에 들락거리더니 다섯 돈의 금 목걸이를 싼값에 사가더니 다시 오후에 나타났다. 금 스무 돈을 사야 한다는 것이다. 친척끼리 부모 없는 사촌을 결혼 시키는 것이라 했다. 아침에 싸갔던 포장 곽과 같은 것에 담아 달라 하였다. 별스럽지 않게 들었다. 스무 돈과 다섯 돈과의 차이는 심했다. 모양이 없어 큰 곳에 넣어야 하겠다고 하니, 볼품없어도 괜찮다며 굳이 그것과 같은 것에 넣어달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잠시 포장된 물건은 쇼 케이스 위에 올려 있었을 뿐이었고, 그는 다시 무언가를 주문했다. 시계라든지…….
친척들이 차 때문에 수리 센터에 있다며 잘 보관해 달라며, 저녁때 그들과 함께 찾으러 오겠다고 했다. 밤이 되었다. 한 손님이 그것과 똑같은 물건을 찾았다. 가지러 오지 않을 모양이다 하고 포장했던 그것을 풀었다.

“아뿔싸…….”
그곳에는 물건이 들어있지 않았다. 동전 100원짜리 12개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아마도 금 스무 돈의 무게와 같나 보다. 몇 며칠 시름하였다. 사후약방문이 되고 말았으나 카메라를 설치하고, 한동안 들어오는 손님마다 살피며 조심하였다.
오래 전부터 금은방을 하는 남자동창이 있다. 그는 늘 내게 얘기한다. “돈을 벌려고 애쓰지 마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늦은 저녁 한 젊은이가 한 손엔 파인애플을, 한 손엔 예리해 보이는 칼을 쥐고 들어온다. 매번 보는 일인데도 나는 무섭기만 하다. 보통사람들은 나처럼 신경을 쓰며 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워낙 에 험한 일이 많이 생기는 금은방인지라, 그들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얼마나 섬뜩했는지, 그것을 사지 않으면 일이라도 날 것 같아 얼른 사곤 했다. 모든 것을 그렇게 연결 지어 보는 내가 잘못 된 것이리라.


도시의 가게들도 그러한지, 한적하기만 한 이곳에 보따리 장사들이 많이 드나든다. 하루면 보통 서너 명 이상 족히 들어올 것이다. 장애 우 같으면 두말 않고 물건을 사곤 한다. 그들에게 사는 휴지는 사실상 비싸다. 그러나 힘에 부치는 그들의 인생을 생각하며 그럴 때만큼은 마음을 비우곤 하는 것이다.

어느 날 이었다. 그 사람은 장애 우 는 아니었고 무언가 조금 부족 한 듯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보통 그들은 천 원짜리의 물건은 들고 다니질 않는다. 기본이 이 천 원인 것이다. 형편이 좋으면 무엇을 상관할 것인가. 그날은 손님도 있고 해서 모른 척 했다. 그것이 실수였다. 그가 손님의 엉덩이를 만지고 간 것이다. 이럴 수가……. 손님과 입씨름이 오고 갔다. 손님에게 여간 미안한 일이 아니었다. 그냥 천원을 주고 보냈더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을, 내가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그래도 그렇지 너무나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신고를 하려 했으나 다행히 좋은 분들이어서 그냥 지날 수 있었다. 저도 낯이 있는지 한동안 나타나지 않더니, 요즘 다시 얼굴을 들이민다. 마음 같아선 본 척도 하지 않으려 했으나 사람 사는 일이 그런 것이 아닌지라, 쇼 케이스 위에 천원을 올려놓고 고개를 돌리니 인사를 하며 나간다.
주변에선 내게 습관을 들인다고 뭐라 한다. 그러나 모두들 그러한 태도로 그러한 이들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 고달픈 삶은 어디서 위로 받을까 싶다.


사람 사는 얘기 그리고

가게는 삼면이 모두 유리창 인 탓에 주변의 상황들이 적나라하게 들어오고 나의 움직임 또한 밖에서 훤히 들여다보일 것이다. 너무도 한가하기가 이를 데 없고 어느 때엔 내가 정말 장사를 하고 있는 사람인지 혹은 책을 읽으러 나온 사람인지 구분이 되질 않는다. 오늘도 한 권의 책을 펼치며 하루를 시작한다.

내가게 한쪽으론 옹기종기 조그만 가게들이 들어서 있다. 서로들 마음을 조금씩 비우면 좋은 이웃이 될 것이다. 그것이 왜 그리 힘이 드는 일인지, 작년 내내 꽃집에서 길 쪽으로 조금 내어놓은 화분들 때문에 하루가 멀다 하고 언쟁이 있었다. 시청관계자는 이곳에 진을 치고 싸움을 중재해야 했다. 근처 한 가게 주인이 청와대를 운운하며 매일 마다 신고를 하는 통에 꽃집사람은 한동안 앓아야 했다. 그녀가 얼마 동안 병원에 입원한 이후론 동네가 잠잠해졌다.


동네로 들어가는 길을 바라보고 서 있으면 한 눈에 조그만 양화점이 유독 눈길에 들어온다. 그곳의 주인은 눈이 내린 듯 하얀 머리칼을 지녔고, 유순해 보이는 인상을 가지고 있으며, 말도 느릿느릿 구수하게 하는 60대를 바라보는 아저씨다.
내가 회사를 다닐 그 무렵에는 구두를 맞추어 신고는 하였는데, 계절이 바뀔 때면 나는 그곳에 종종 들리고는 하였다. 지금껏 그가 한자리에서 무언가를 지켜온 것을 보면 참으로 존경스럽다. 오랫동안 변함없이 양화점의 주인도 양화점도 동네와 함께 묵묵히 늙어 간 것을 생각하니, 어떠한 뭉클함으로 경건해지기도 한다.


여름이면 늘 반 팔 흰 속옷을 입은 채 동네를 돌아다니는 그가 가장 많이 머무는 곳은 역시 꽃집이다. 꽃집사장님과 꽃과 나무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한가로운 나날을 보내던 정겨운 모습을 이젠 만날 수 없게 되리라.
그는 꽃이나 나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언제나 내가 심어 놓은 것들에 대한 관심도 지대하다. 어느 해 인가는 먼 지방에서 친구가 보내준 씨앗을 심어 피어 올라온 잎을 보며 풀을 키운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시 ‘민지의 꽃’을 떠올렸다. 그가 문학적 소양을 조금이라도 지녔다면 그 시를 들려주었을 것이다.

나를 방문하는 친구들은 그의 간판을 바라보고 파안대소를 한다. “와우! 저기서 영화 한편 찍으면 정말 근사하겠다!" 하고 웃음을 내려놓을 줄 모른다. 새까만 바탕에 어눌한 빨간 글씨는 그가 직접 써서 붙여 놓은 듯하다. 참으로 걸작이 아닐 수 없다. 촌스러운 신사가 머리 기름을 고루 바르고, 가르마를 반듯하게 타고, 반들반들한 짙은 청색 양복을 입고, 부곡 양화점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면 70년대 사진이 그럴싸하게 나올 것이다.

아침마다 나비처럼 나풀대며 날아오는 다정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내게 건강과 웃음을 배달해 주는 전령사이다. 건강해지기 위해 요구르트를 배달해 먹는 나보다 그녀가 더 건강함을 한 눈으로도 알 수가 있다. 매일 마다 그녀의 활기찬 방문으로 나는 유쾌한 아침을 맞는다. 내 가게는 그녀의 마지막 코스이다. 그녀의 노란 손수레는 가게 앞 귀퉁이에서 주인을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 그의 주인은 적지 않은 시간 차 한잔의 여유를 즐기는 것이다. 그녀도 내게서 무언가를 얻어간다고 했지만 나 또한 열심히 땀 흘리며 사는 그녀에게서 많은 것들을 얻고 깨닫고 배운다.
우리는 배달하는 여자와 배달 받는 여자로 만나 모르는 사이 친구가 되어버렸다. 친구와 함께 하는 그 시간은 창가로 눈부시게 내려앉는 햇살처럼 빛이 나는 순간들이다.
이제 그녀는 힘든 일을 끝냈다. 문학공부를 하기 위해 그 동안 모았던 돈으로 방통대를 들어가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다.



가게 골목을 종종 지나다니는 머리에 쪽을 찐 희고 고운 할머니가 있다. 그녀는 저녁마다 아들의 마중을 나가는 듯 보인다. 아들은 마흔은 족히 넘어 보이고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았는지, 언제나 어머니와 함께 다니는 것이다. 휴일인 오늘도 그들은 손을 꼭 잡고 역으로 간다. 아들은 어린 제 아이를 보살피는 아비 같기도 하고, 연인의 손을 잡고 가는 남자 같기도 하다. 어머니와 중년의 아들이 다정하게 손을 잡고 환한 얼굴로 얘기를 나눈다. 어머니의 얘기를 저리 살갑게 듣는 아들이 있던가?
그들이 지나갈 때마다 나는 어떠한 각별함으로 숙연해 진다.

나의 친정엄마는 이 동네 초대 부녀 회장이었다. 그 시절 이 작은 동네를 중심으로 변두리 구역 구역의 부녀회장들이 있었다. 육 칠 십대의 옛 부녀회장들의 모임이 달마다 한 번씩 있다. 그럴 때마다 역 부근의 내 가게에서 집결하여 어디론가 가곤 하는데,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곳에서야 별스럽지 않지만, 서로 ‘김 회장님, 이회장님’ 하는 소리가 나에게는 너무나 우습게 들리는 것이다. 간혹 시내로 나가 식사를 하게 된다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소리도 작지 않을 할머니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어느 회사 높은 회장단 들 인줄 알고 …….


나의 가게는 정류장이기도 하다. 역 앞에서 변두리로 들어가는 버스 시간은 삼 십분, 사 십 분에 한 번씩 있다. 사람들은 버스를 놓치면 긴 시간 서서 기다려야 하므로, 어느 가게든 익숙한 곳에 발을 들여놓고 앉았다 간다. 그러한 동안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작은 일상을 나누곤 하는데, 대부분 친구, 후배, 선배님의 어머니 이고 누님이고 언니이고 큰어머니이고 뭐 그런 것이다. 때로 그들의 소식을 들으며 반가워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살갑게 지낸다. 그들 또한 나를 염려해주기도 하는데…….
나는 어디서든 장사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곳만큼 집안 모두가 아는 사이가 되고 마는 친근한 사람들을 다시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큰 공장이 건재하던 동안 나는 즐거웠다. 그들은 삼삼오오 내 가게엘 다녀가곤 했다. 보통 중년의 남자들인데 아내나 딸들의 생일선물을 마련하기 위한 걸음이었다. 그러던 가운데서 용기 있는 한 사람이 망설임 끝에 귀를 뚫으면, 다음날 여지없이 두어 명이 다녀가고, 또 다음날 여럿이 어울려 가게에 발을 들여 놓으며, 내게 귀를 뚫고 가는 것이다.
유행을 만들어 가며 웃음을 나누던 중년의 멋쟁이이던 그들,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그 여자는 매일 두 어 번 내 가게에 들른다. 가끔은 '동생' 가끔은 '친구'라 그 여자 나를 부른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그러한 사이가 되었다. 겨울 내내 냉방에서도 견디어내는 그녀가 안쓰러워 어쩌다 한번 천원에 손금을 보거나 이 천 원에 사주를 본다. 누구에 대하여 특별한 얘기를 다 꺼내기도 전에 신 내린 그 여자 내게 던지는 말 "갖다 버려, 갖겠단 사람 있음 줘버려" 하는 것이다. 그때 나는 파안대소에 눈물까지 찔끔거렸다.
아침 출근길, 그녀가 못 보았으려니 하고 나는 지나쳤는데, ‘친구’ 하며 나를 불러 세우고 어디가 아픈지 약이 잔뜩 들어 있는 흰 비닐봉지를 뒤적이고, 파스 하나를 건네주며 '써-'하는 것이다. 이런…….
가진 것이라고는 병든 몸밖에 없는 그 여자가 내게 이렇게 베푼다. 나 자신도 알길 없던 마음 그 깊은 바닥 얼었던 곳까지 온기가 퍼져간다.


동네 변두리에서 농사짓는 할머니가 내 가게 바로 옆에서 몇 년째 손수 거둔 채소를 파신다. 할머니는 장사를 마칠 때면 미나리나 상추나 배추 같은 것을 내게 조금씩 주신다. 그냥 장사를 하게해준 대가이리라. 작지만 땀이 얼룩진 그 큰 것을 받는 나는 미안하기만 하다.
해가 기우는 시각, 동네 할머니들이 채소장수 할머니에게로 삼삼오오 동그랗게 모였다. 막걸리 한 사발로 이른 저녁을 나눈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골목을 울리고, 퇴근하는 사람들마다 그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다. 고단했을 사람들의 하루, 그들의 걸음이 문득 가볍게 들린다.
의왕시 삼동 471-36번지의 하루가 저물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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