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서 배우다

하루치 마음을 적다 /박준

다림영 2024. 5. 10.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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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쓰면서 살아갑니다. 매일 쓰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형편이 되는대로 쓰려고 노력합니다. 일기를 쓰는 이유는 제가 시인이어서가 아닙니다. 일기日記라는 말에 담긴 의미 그대로 하루의 기록을 남기기 위합입니다. 내용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하루가 특별한 사건없이 소소하게 흐르는 탓입니다.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오늘. 일이 몰려 한창 바쁠 때는 국이나 찌개를 한솥 가득 끓여두고 사흘 정도 같은 찬으로 늦은 저녁을 먹을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일기장에 '오늘은 어제와 같았다'라고만 적습니다. 만약 다음날에도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오늘도 어제와 같았다'라고 쓸것입니다. 

 

요행이나 즐거운 소식없이, 하지만 불행이나 궂은 소식도 없이 숨낳은 하루가 지납니다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몇해 전 출판사에서 일하는 선배와 함께 택시를 탔습니다. 조문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이었습니다. 선배와 저는 택시 뒷자리에 앉아 문학과 출판을 주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한동안 이어지던 대화가 잠시 잠잠해졌을 때 택시기사님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혹시 글과 관련된 일을 하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이것의 제몫을 좀 지어주셔도 될까요?"

 

그러면서 기사님은 손으로 한 권의 노트를 가리켯습니다. 노트는 용수철로 엮인 평범한 모양새였고 볼펜과 함께 줄에 달려 동승자 좌석 머리 받침대 사이에 묶여 있었습니다. 

 

사실 처음 택시를 탔을 때부터 한눈에 들어왔지만 선뜻 펼쳐보지 못하고 있떤 것입니다. 그제야 한 장 한 장 넘겨보니 노트에는 그동안 택시에 탔던 승객들의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학원시간에 늦었다며 푸념하는 학생의 글, 아이 셋을 키우면서도 공부를 놓지  않았고 드디어 오늘 토익시험을 보러간다는 글, 아버지의 건강이 어서 회복되어 결혼식장에 함께 입장하고 싶다는 어느 예비 신부의 글....

 

노트에는 수많은 이들의 평범한 하루와 진실한 마음이 적혀 있었습니다. 노트 글을 천천히 읽는 사이 기사님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비교적 뒤늦은 나이에 택시 운전을 시작했는데 승객들을 상대하는 일이 무엇보다 어려웠다고, 그래서 짧은 시간이나마 서로 마음을 나눌 계기를 궁리하다 노트를 준비했다고, 저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직전 기사님께 이 노트의 이름을 지어드렸습니다. 

 

'길 위에서 쓰는 일기' 로 할지 아니면 '길위에서 쓰는 편지'라고 해야 좋을지 고민하다 결국 '편지'를 택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기는 결국 나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것이니까요. 그리고 마침 가방속에 있던 제 시집도 한 권 선물로 드렸습니다. 그날 저는 집으로 돌아와 다시 하루 치의 일기를 적었습니다. 

 

하루의 시간을 살아내는 것처럼 묵묵하게 적었습니다. 

 

'사람이 길을 지나듯 길도 사람을 지난다.'길은 어두웠다가도 그새 밝아진다. 길은 굽이 휘어지다가도 결국 곧게 펼쳐진다. 간혹, 간혹 막다른 길을 마주하고 멈춰설 때도 있다. 

 

하지만 괜찮다. 돌아서면 틀림없이 길은 다시 열려 있고 끝내 나를 반기는 이들에게 닿아 있으니까. 이 길위에서 사람은 언제나 자신에게 도착하는 마음을 먼저 적어 보낸다. " 

 

 

조선일보 4월 27 토요일 

박준의 마음 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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