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에 첫사랑과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사람이 행복해지려고 사는 게 아닌 거 같아." 소박한 그가 놀라 물었다. "그럼 너는 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답했다. "모르겠어. 아무튼 행복은 아닌 것 같아."
희한할 정도로 행복에 관심이 없었다. 행복의 형제인 즐거움이나 기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왜 이렇게 사람들이 행복타령을 해대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내 눈엔 그들이 하늘에 대고 자기 일신의 안위만 비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욕심꾸러기로 보였다. 어떻게 인생에서 행복만을 바란단 말인가?
그러나 내가 지금 , 스무 살때보다 성장한 증거를 대라면 행복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을 내밀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내게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되물을 것이다. 당신이 말하는 행복이 무엇이냐고. 그 답에 따라 내 답도 달라질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행복이 감정이라면 행복한 순간도 있고 행복하지 않은 순간도 있다고 답할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행복이 상태와 연관돼 있다면 지금은 행복하지만 바뀔지도 모른다 할 것이고, 그가 생각하는 행복이 존재에 대한 거라면 행복하다 답할 것이다.
행복! 사랑과 더불어 세상에서 가장 많이 남발되는 말, 사람들은 참 지긋지긋할 정도로 행복해지고 싶다고 하면서 정작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토록 사랑을 원하면서 사랑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결과 행복하게 사는 방법도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도 알지 못한다. 나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행복에 대해 생각하게 된 계기는 헤르만 헤세의 이 말 때문이었다.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다른 아무것도 없다네.그저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뿐,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세상에 왔지."
헤세의 삶과 작품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 여기던 내게 그 말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앗다. 헤세만큼이나 좋아하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이 말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의 행복 구하는 데 지쳐 발견하는 버릇을 나는 익혔다." 낙천주의는커녕 허무주의에 가까웠던 두 거인이 남긴 말은 오랫동안 수수께끼 같았고 답을 알려준 것은 장 자크 루소였다.
"우리의 마음의 마음이 진정으로 '나는 이 순간이 항상 계속됐으면 좋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한순간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여전히 불안하고, 공허한 상태로 놔두며, 또한 우리로 하여금 이전에 있던 뭔가를 애석해하거나 앞으로 올 뭔가를 바라게 만드는 순간적인 상태를 어떻게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p115)
그렇다 행복은 감정이 아니다. 사랑 역시 감정이 아니다. 행복과 사랑은 인생과 예술이 감정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존재의 형태이자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이다. 즐거움과 기쁨, 환희같은 긍정적 감정이나 슬픔과 비탄,괴로움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그과정에서 생기는 날씨같은 것이다.
이 사실을 터득한 후에 나는 감정에 압도될 때마다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괜찮아, 날씨같은 거야. 곧 지나갈 거야. 그때까지 가만히 기다리자." 감정의 기복이 심한 탓에 하루에도 몇 번씩 죽어야 하나 살아야 하나를 외쳤던 나로선 이런 터득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감정은 날씨처럼 일시적이라 곧 사라지거나 바뀐다. 만일 행복을 즐거움이나 기쁨 같은 감정과 동일시하고 행복해지길 바란다면 일 년 내내 햇살 좋은 날만 이어지길 바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날씨에 따라 나무가 구름이 되거나 바위가 독수리가 되거나 하는 일은 생기지않는다. 감정은 설령 그것이 긍정적 감정이라 할지라도 행복하지 않은 존재를 행복한 존재로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고 있는 동안에만 들리는 음처럼 곧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행복을 감정에 기준하면 약물 중독잔처럼 이전보다 더 강렬한 즐거움과 기쁨, 환희를 욕망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 이상하게 행복하지 않은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다. 루소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긴 인생의 부침을 겪으면서 알게 된 것은, 추억이 나를 가장 강하게 끌어당기고 감동시키는 시기는 가장 달콤한 즐거움과 가장 강렬한 기쁨의 시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흥분과 열정의 그런 짧은 순간들은 , 비록 강렬할 수는 있을지몰라도 바로 그 강렬함 때문에 인생이라는 선 가운데에서 아주 듬성듬성한 점들에 불과할 뿐이다.
그 순간들은 너무나 희귀하고 빨리 지나가서 어떤 형태를 구성할 수가 없다.ㅎ ㅏ지만 나의 마음이 진정 아쉬워하는 행복은, 곧 사라져버릴 덧없는순간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 소박하고 항구적인 하나의 형태로, 그 자체에는 강렬한 것이 전혀 없지만, 그것이 지속됨에 따라 매력이 증가하여 마침내 거기에서 비할 바 없는 지복을 발견하게 된다."(p114)
장그르니에는 자신의 책[섬]에 앞서의 문장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묻는다."단순하고 항구적인것'이라고 그리도 잘 묘사한 그 극도의 희열이란 것은 오히려 어떤 마비상태라고 생각할 수 잇지 않을까?"
루소의 글을 읽으면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느낌 말고는 그 어떤 결핍이나 향유, 기쁨이나 고통, 욕망이나 두려움의 느낌도 없이 영원히 지속되는 상태라면, 그리고 그런 느낌만이 영혼을 온전히 가득 채울 수 잇는 상태라면, 그리고 그런 느낌만이 영혼을 온전히 가득 채울 수 있는 상태라면 ,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은 그것이 지속되는 한 행복한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행복은 삶의 기쁨들 중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불완전하고 빈약하고 상대적인 행복이 아니라 채워야 할 필요를 느끼는 그 어떤 공허함도 영혼 속에 남겨두지 ㅇ낳는 충분하고 완벽하고 충만한 행복이다. "p115
행복한 사람은 자기 외부에 있는 무엇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족하다. 그의 감정은 무에 가깝고 그 자체로 만족스럽고 평화로우며 이런 상태를 누리는 자신의 존재가 소중하고 기분좋다. 먼 세상이야기 같지만 우리는 이미 경험을 해본적이 있다. 바로 여행지에서다.
루소의 글은 (비록 피신에 가까운 것이긴 했지만) 생 피에르 섬에서 물결에 따라 방향이 바뀌는 대로 놓아 둔 배 안에 누워 잠긴 몽상에서 태어났고, 장 그르니에가 루소의 글귀를 떠올린 것 역시 이탈리아 여행중에서였다. 그르니에는 여행의 목적이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하여'라고 했고 자기 인식이 이루어지면 여행이 완성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여행의 종착역에는 강렬한 기쁨에 들떠 있는 내가 아니라 모든 감정이 잔잔하게 정리돼 감미롭고,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만족해하는 내가 있다.
이제 해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다른 아무것도 없다네. 그저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뿐.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세상에 왔지." 그는 우리가 스스로의 존재에 만족하며 살기를 바란다. "나의 행복 구하는 데 지쳐 발견하는 버릇을 나는 익혔다."라는 니체의 말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책 [아주 오래된 말들의 위로]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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