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좋은 글

우리는 누구나 한 장의 연탄이다/박민규

다림영 2023. 5. 14.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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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한 장의 연탄재를 아궁이에 넣어야 한다. 온전하고, 부서지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 번개탄의 비닐봉지는 뜯어도 그만, 안 뜯어도 그만이다.좋도록 하세요. 조잡한 인쇄의 얄팍한 비닐은 언제나 그런 느김이었다. 호오 호오. 집게를 집기 전엔 잠시나마 시린 두 손을 비벼두는 게 좋았다. 엄동, 설한의 새벽, 집게의 손잡이는 늘 얼음마녀의 손목처럼 앙상하고 차가웠다. 

 

딱딱한 하악下顎이 튼튼한 이라면 그 순간 제법 그런 소리를 낼 법도 할 일이었다. 아니, 비록 하악이 튼튼하지 않더라도- 불꺼진방, 불 꺼진 아궁이 앞에 선 인간의 마음에선 늘 그런 소리가 새어나오곤 했다. 딱딱딱 . 새벽의 정적앞에서 나는 굳이 소리를 감추거나 하지 않았다.

 

아니 감출 필요가 없었다. 언제나 밤은 고요했고, 언제나 나는 혼자였다. 이제 조심스레, 집게의 긑으로 번개탄을 집어올릴 차례다. 손아귀의 힘은 부디 자연스러워야 했다. 즉 하악이 약간 열릴 정도의, 얼추 완만하고 느슨한 상태, 어금니를 문 정도의 힘이라면 탄炭은 여지없이 부서지기 일쑤였다. 자 , 이제 불을 붙이자.

 

화악, 한줌의 화약이 불꽃을 뿜으면 , 마음속엔 이미 한줌의 불씨가 지펴지기 마련이었다. 이제 천천히 , 탄을 위아래로 흔들어줄 차례이다. 손아귀의 힘은 역시나 강해선 젬병이고, 시간은 15초정도가 그럴듯햇다. 언뜻, 불이 번진 번개탄은 - 시린세상을 부유하는 인광燐光인듯도 했고, 어두운 우주를 건너와 이 냉혹한 인간의 처지 위에 내려선 뜨겁고 고마운 유성인 듯도 했다. 

 

차마 기억나지 않는다 해도, 모쪼록 그 유성의 발현 앞에서 내가 빈 소원도 한 가지였다. 온기를 , 온기를 나누어주세요. 차마 잊을 수 없는 것은 - 그래서 저 휴화산과도 같았던 아궁이의 내부와, 그 속으로 서서히 내려서던 번개탄과, 그 위에 올려지던 한 장의 연탄과, 돌려, 일치시킨 그들의 구멍과, 그 연결과, 연결을 통한 통풍과, 통풍을 통해 내 안면을 잠시나마 달궈주던 한 웅큼의 열기와, 그 광경이다. 

 

이제 아궁이의 뚜껑을 닫을 차례이다. 더없이 고난한 지상의 한 켠에서, 지금 하나의 연탄이 타오르고 있다. 돌려 , 불 문을 열던 손가락의 동작을 떠올리면, 그 추억만으로도 나는 지금 훈훈하다. 눈물겨워라. 이 뜨거운 기억으 통풍이여.

 

그러니까 내게도 연탄을 때던 시절이 있었다. 아니, 그 분지의 혹독한 자취방에서, 나는 네 번의 겨울을 연탄을 때며 살아남았다. 마치 거짓말 같고, 비록 거짓말이어도 하나 이상할 게 없는 16년 정도의 세월이 있었다. 결국,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건, 나는 연탄에 의해 길러진 인간이다. 

 

연탄에 의새 살아남은 인간이고, 연탄에 의해 축복받은 인간이다. 축복이라니, 그러나 한 장의 연탄으로-저리 곡곡을 내리던 대설과, 저리 얼던 수도의 결빙을 견뎌본 인간이라면, 그런 인간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겨울을 난 삶이, 살아남은 우리의 삶이 얼마나 뜨겁고 광휘로운 축복인가를.

 

하여 결국 무엇을 하건, 언제 어디에 있것 , 인간은 뜨겁고 광휘로운--불로써 전해지는 그 뭉ㅅ이다. 아니 그러히여, 우리는 누구나 한 장의 연탄이다. 그런 셈이다.

 

새벽마다 , 어머니는 곤한 잠을 뿌리치고 한 장의 연탄을 갈러 나갔다. 뽀득뽀득 눈 내린 마당의 어둠을 가로질러, 또, 소설과 대설과 동지를 가로질러, 소한과 대한의 동초를 지나 어머니는 연탄을 갈고 돌아오셨다.

 

아니, 비루한 잠이거나 달콤한 꿈, 그 외에 아무일도 없었던 그 겨울밤들이 실은 그런식의 연명이었단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먼 훗날의 일이었다. 스스로의 잠을 깨워 스스로를 연명해야 했던 그 분지의 자취방에서, 하여, 한 장의 연탄을 갈다가 나는 비로소 그 사실을 뉘우친 것이었다.

 

겨울의 냉기와는 또 다른 서늘함이, 아니 찬물을 뒤집어썼을 때의 어떤 청렴함이, 결백이 그리하여 진솔한 진실이 한 바가지의 찬물처럼 나를 엄습해왔다. 그 새벽, 담배를 피우며 올려보던 북두칠성은 그러므로, 그런 연고로- 친구와 나의 이마를 향해 옆질러져 있었던 걸가. 황망하게, 이제서야 그 텅 빈 국자의 속을 들여다보는 삶의 민망함이여. 

 

 

 새벽인데,어머니는 곤한 잠을 뿌리치고 더듬더듬 화장실을 찾아나선다. 문득 문득 그 조심스런 기색이, 마루를 건너, 또 잠결과 꿈결과 뒤척임을 건너, 내 귀를 열고 들어선다. 불켜드릴까요? 물으나마나한 물음을 묻지도 않은 채, 나는 화장실의 조명을, 그러니까 문 박에서, 그 60룩스의 오스람 삼파장램프를, 말없이 켠다, 켜드린다.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는- 그러니까 이 60룩스의 오스람 삼파장 램프를 켤 줄 모른다.

 

단지 치매를 앓고 있을 뿐인데도, 그렇다. 그러니까 인간이란 , 어떤 파장의, 몇 룩스의 램프인 것인가? 문 뒤에서, 물도 내리지 않은 채 화장실을 나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 나는 본다. 잠깐 , 어떤 파장이 번진다. 떨려온다. 황망하게, 다시금 텅빈 국자의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삶의 당혹감이여, 더듬 더듬 자신의 방안으로 어머니가 사라진 후, 나는 화장실에 들어선다. 

 

변기속엔 무언가 엎질러진 것들 가득하고, 오늘은 문득, 바스라진 연탄재 같은 흰머리 몇 올도 떨어져 있다. 말없이 물을 내린다. 물 내려가는 변기 속이 , 마치 불 꺼진 아궁이 같다.

 

연탄재를 치우듯 어머니의 흰 머리를 줍다가, 그래서 결국, 인간은 한 장의 연탄임을 나는 깨닫는다. 우리는 누구나 한 장의 연탄이다. 나의 삶도, 그 누구의 삶도 실은 누군가의 연소 끝에 이어진 연명이다. 그래서다. 해서 잠든 어머니와 잠든 아들의 얼굴을 번갈아오가며, 나는 나의 삶이-이들 사이에 낀 한 장의 묵墨 빛 연탄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불 문을 막아놓은 듯 지루한 이 삶도, 해서 맹목으로 여겼던 이 삶의 목표도, 하여 우리의 그 어떤 삶도 , 실은 거대한 가치를 지닌 것이다. 나의 램프가 수명이 다할지라도, 당신의 검고 싱싱했던 몸이 하얗게 바스라질지라도, 돌아누운 북두 칠성의 국자 속에, 흰 재 흰재, 아직 온기를 잃지 않은 흰 재들이 수북이 담겨 있다. 문득 심하게 향냄새가 난다.

 

지금 당신은 뜨거운가. 지금 당신은 타고 있는가. 그 온기를, 지금 당신은 누구가에게 전하고 있는가. 구멍은 맞춰져 잇는가. 그 사이로, 누군가에게서 시작해, 누군가와 누군가를 향한 바람이 불고 있는가. 당신의 몸을, 그 열기가 통과하고 있는가. 아니, 어떤 바람도 목소리도 들은 적이 없었던가. 해서, 당신은 막혀 있는 게 아닌가. 어쩌면 우리는 막혀 있는게 아니었던가.

 

그러하여, 당신은 혹시 꺼져 있지나 않은가. 당신이 꺼졌으므로, 나도, 이 세계도 꺼져 있는 건 아닌가. 냉랭하지, 않은가. 시련 세계의 저 바같에 불꺼진 창, 불 꺼진 아궁이가 있다. 소설과 대설과 동지를 가로질러, 이제 우리가 저곳으로 가야 할 차례다.

 

가서, 조심스레, 집게의 끝으로 번개탄을 접어올려야 한다. 아니, 지금 불이 번지고 터야 할 것은 나다. 당신이다. 그래서 '우리'이다. 우리는 누구나 한 장의 연탄이다. 내가 누구이건 당신이 누구이건, 명심하라. 연탄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바로, 그래서다. 

 

책 [뭉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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