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월 13일
영화 ‘서삼관’을 보러갔다. 1960.70년대 후반 우리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적십자병원 앞에는 피를 팔려는 사람들로 줄을 이었다. 먹고살기 위해 피를 판다는 건 참 아이러니다. 피 파는 삶은 “왜 사는가?” 에 대한 해답과 가장 먼 삶이기 때문이다.
허삼관이 피를 팔아 가족들에게 만두를 사주는 장면을 보고 나와서 갑자기 어릴 적 가족들과 함께 먹던 만두가 먹고 싶어져 백화점 지하 음식코너에 갔다. 얼마나 다양한 음식이 많은지 나는 만두를 먹고 싶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렷다. 아니 뭐가 먹고 싶은지도 알 수 없었다. 생각과 달리 만두 대신 냉면을 먹고 ssenl 나는 마치 피를 한 초롱 봅은 사람처럼 현기증을 느꼈다. 백화점에 가득 놓여 있는 수많은 물건에 둘러싸여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세상의 이 많은 물건은 다 어디로 갈 것인가? 물건들에 깔려 죽을 것만 같았다.
물질이 풍요로워질수록 그 풍요로움의 그림자도 짙어지는 모양이다. 굶주리지도 않는데 IS라는 낯설고 무서운 집단에 귀한 젊음을 팔러고 무서운 집단에 귀한 젊음을 팔러 가는 젊은이들의 소식에 안타깝다.
우리모두는 젊음이라는 고독한 터널을 지나왔다. 젊음은 사랑 혹은 증오를 먹고 산다. 하지만 젊은 날의 사랑도 증오도 얼마나 미성숙함에 바탕을 둔 것일까? 먹고살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세대도 있었고, 타는 목마름으로 자유민주주의를 갈구했던 세대도 있었다.
젊음이여! 혹시 그 옛날 우리가 누리지 못했던 자유와 만두 한 접시쯤은 사먹기 어렵지 않은 풍요로움을 제대로 누려보지는 않겠는가? 지나간 젊음이 후회되지 않도록 다시 살아보고 싶은 우리는 이 자유롭고 풍요로운 세상에서 사는 오늘의 젊음이 부럽기만 하다.
하긴 그 아까운 젊음을 헛되게 보내고 나서야 우리는 배고프지 않은 게 얼마나 행복인지, 자유가 얼마나 좋은건지 깨닫는다. 톨스토이는 “만약 내가 신이라면 청춘을 생의 가장 마지막에 두겠다”고 했다. 정말 모든 걸 개달은 뒤 우리에게 청춘이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가. 황주리.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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