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서 배우다

'照顧脚下'조고각하, 발밑을 똑바로 보자

다림영 2015. 1. 3.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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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14.12.27.

 

전문기자칼럼

김한수/종교전문기자

 

본의 아니게 거의 100일동안 세발살이로 지냈다. 비 오던 어느 여름 밤, 바닥 닳은 신발을 신고 물 묻은 대리석을 잘못 디뎠다 미끄러져 발목뼈가 부러졌다. 석고를 감고 6, 플라스틱 보조기를 대고 다시 6, 그후로도 여러 날 목발 신세를 졌다. 남들이 목발 짚고 다닐 때는 몰랐다. 직접 당해 보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불편이 내 일이 됐다.

정작 위기는 목발에 익숙해질 즈음에 찾아왔다. 목표 지점을 보면서 걷다보면 반드시 목발이 땅에 끌리면서 휘청했다. 가만히 관찰해 보니 불편한 몸이 조금이라도 편해지려고 얕은 꾀를 피우고 있었다. 목발을 최대한 지면에 가깝게 들어 올리고, 즉 최소한만 힘을 들여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지면에 1cm만 튀어나온 부분이 있어도 거기에 목발밑이 닿으며 균형이 깨지는 것이었다. 불과 1cm높낮이가 다른 사지(), 나아가 생명까지 위협할 수 있는 무서운 장애물이었다.

 

몇 번 위기를 넘기면서 자연스레 시선을 발밑으로 처박게 됐다. 그러자 얕은 턱에 걸려 비틀거리는 일이 사라졌. 그때 알았다. 불교에서 말하는 조고각하(照顧脚下)즉 발빝을 직시하라는 말이 형이상학적인 뜻만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도 조계종 총무원이 있는 한국불교 역사문화기념관 입구 계단엔 조고각하라고 적힌 팻말의 괄호 안에 자기 마음 돌아보아 하심(下心)을 먼저 하라고 쓰여 있다. 하지만 조고각하라는 말이 처음 나왔을 때는 이런 비유가 아니라 진짜 물리적으로 발밑을 똑바로 보라뜻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 발살이를 겪으며 뜰 앞의 잣나무’ ‘차나 마시고 가라<喫茶去.끽다거>’화두(話頭)의 원리도 이와 같지않나 싶었다. 마루에 앉아 뜰의 잣나무를 보고 있거나 차를 마시고 있는데 멀리서 누가 찾아와 깨달음을 알려달라고 하자 잣나무’ ‘를 말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다른곳, 다른 때에서 깨달음을 구하려 말고 지금 이 자리에 집중하라는 뜻으로 한 말이 맥락이 생략된 채 전해지다 보니 알쏭달쏭한 선문답(禪問答)’으로 둔갑한 것 아닌가 싶었다.옛날 선사(禪師)들이 요즘 세상에 왔다면 컴퓨터 마우스다라고 답했을지도 모른다.

 

문득 건방지게도 세상살이 역시 한 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 들은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란 말을 가슴에 새기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별 야망도 없고 노력도 않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自愧感)으로 엄벙덤벙 살아온 날들이 눈앞을 스친다. 하늘의 별만 쳐다보고 걷다가 도랑에 빠진 것이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만의 실수는 아닐 것이다.

 

주식이다 로또다 하는 불로소득(不勞所得)을 부러워 하며 어디 나도 한번...’한 적은 또 몇 번이던가. 법정(法頂)스님은 횡재(橫財)는 횡액(橫厄)을 부른다고 했거늘.

먼산 보느라 달이 차고 기우는 것도 모르고, 출퇴근길에 나무.꽃이 옷 갈아입는 것도 잊고 넘긴 게 몇 해던가.

 

묵은해를 되새기며 새 계획을 세우는 때다. 위기는 10m높이 장벽이 아니라 단 1cm돌출로 올 수 있다. 개인은 개인대로 나라는 나라대로, 우리 모두 먼 산을 보지 말고 발밑을 살필 일이다. 조고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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