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 책봉식을 바라보던 영조의 감회는 새로웠다. 자신은 무수한 시련을 겪은 후에야 왕세제로 책봉될 수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로 각인 되어 있었다. 그 상처는 내면 깊은 곳에서 꿈틀대며 밖으로 폭발하기를 기다리는 한으로 변했다. 하지만 영조는 탕평蕩平이라는 이름으로 상처와 한을 감추고 억눌렀다. 이 아이에게만큼은 이런 상처와 한을 물려주지 않으리라고 영조는 다짐했다. p71
세자의 영특함은 사부와의 일화에서도 나타난다. 천자문千字文을 읽다가 ‘사치할 치侈’자가 나오자 입고 있던 반소매 옷과 자줏빛 비단에 구슬 꾸러미를 장식한 모자를 벗어던지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것은 사치한 것입니다.”
이것은 영조의 뜻에 꼭 맞는 행동이었다. 영조는 평생 검소함을 몸소 실천한 군주였다. 그의 침전엔 명주 이불 한 채와 요 하나가 전부였고 웬만한 사대부가에도 다 있는 병풍조차 없었다. p75
“진실로 화평한 미덕이 있었으면 이남二南의 교화가 반드시 멀고 가까운 곳에 두루 미쳤을 것입니다. 조정신하들이 어찌 이를 모르겠습니까?”
영조가 대답했다.
“내 마땅히 더 권면하겠다.”
박문수가 말을 받았다.
“당론은 실로 망국의 기초가 되는데, 지금 국가에는 단지 한 살먹은 원량만이 있을뿐입니다. 이런 때에 여러 신하들이 당파의 마음을 가진다면 그것이 어찌 나라를 생각하는 도리겠습니까? 전하께서 머리를 맞대고 일을 집행하도록 하지 못하시니, 이것은 거짓 탕평에 지나지 않습니다.”
박문수는 갓난아이를 둘러싼 당파의 당론에 우려를 나타냈다. 삼종의 혈맥을 당파의 자리에서 바라본다면 원자와 나라의 운명이 망국의 경지에 비질 수 있다는 우려이자 혜안이었던 것이다. 박문수의 말은 그대로 어린 왕자의 비극적 운명을 예언하는 말이 되어 버렸다. p81
경종을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는 노론은 경종이 즉위하지마자 비상대책을 수립했다. 노론의 비상대책은 크게 세 단계로 나뉘어 있었다. 첫재 연잉군(영조)을 왕세제王世弟로 챋복하는 것이고, 둘째 연잉군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는 것이었다. 셋째는 경종을 무력화시키고 연잉군을 즉위시키는 것이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경종을 곧바로 독살하고 바로 연잉군을 즉위시킬 수도 있었다. p94
영조는 자신을 둘러싼 의혹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영조의 면전에 대놓고 이런 소문을 들먹이며 욕한 인물도 있었으니, 군사 이천해였다. 이천해는 즉위 직후 영조가 능에 행차할 때 어가를 가로막고 소리를 질렀다. 영조는 그 소리가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라며 사관에게 기록하지 말라고 명령해 <영조실록>의 해당 기사에는 다만 환국換局에 관한 말이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p117
영조가 세자를 생모 영빈 이시의 손에서 떼어내 보모의 손에 넘긴 것은, 세자가 태어난 지 겨우 백 일째 되는 날이었다. 종사를 중시했던 영조에게 세자는 단순한 아이가 아니라 왕위를 이을 후계자였다. 이때부터 세자는 부모보다는 남과 함게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세자가 보모와 함께 생활하게 된 처소는 저승전儲承殿이었다. 저승전은 ‘세자 자리를 잇는집’이란 뜻이다.그런데 공교롭게도 저승전의 후문인 융효문隆孝門 바깥이 군수물자를 보관하는 군물고軍物庫였다. 무예를 좋아했던 사도세자의 품성은 여기서 길러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세자의 운명을 이끈 것은 군물고보다도 저승전 자리에 남아 있는 음울한 자취였다. 저승전, 바로 그 전각을 매개로 숙종과 경종, 그리고 영조를 둘러싼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졌었다. 훗날 세자의 부인이 되는 혜경궁 홍시는 여성특유의 직감과 정치적 감각으로, 어린 세자가 살게 된 저승전의 역사적. 정치적 의미를 정확히 분석했다. 홍씨가 <한중록>에서 어린 세자를 저승전에 모신 것을 한탄한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세자가 소론의 정견을 갖게 된 시초를 홍시는 저승전의 영향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p131
“신이 세자를 바라보니 천고에 보기 드문 기상을 지니고 있으나 앞으로의 성취에 대한 책임은 전하에게 있다고 하겠습니다.”
조현명의 권고는 핵심을 찌르는 것이었다. 앞으로 세자가 어떻게 되느냐의 문제는 영조에겓 달려 있었다. 이것이 핵심이었다. p149
“신하의 집이 척리가 되면 총애가 따르고, 총애가 따르면 문벌이 왕성해지고, 문벌이 왕성해지면 재앙을 부르는 법입니다. 내 집이 도위都尉(선조의 부마 영안위)의 자손으로 나라의 은혜를 망극히 입었으니 나라를 위하여 끓는 물, 타는 불 속을 어찌 사양하겠습니까? 그러나 백면서생이 일조에 왕실의 척리가 되었으니 이것은 복의 징조가 아니라 화의 기틀이 될까 합니다. 그러니 오늘부터 두려워서 죽을 곳을 모르겠사옵니다.”
<한중록>에서 홍씨가 부친이 권력욕이 없음을 강변하기 위해 전한 말이지만 이 당시만 해도 홍봉한에게도 이런 마음이 잇었을 것이다. 그랬다. 신하로서 외척이 되는 것은 복과 화가 이마 앞에 동시에 와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복이 굴러 화가 되는 것은 순간이었다. 그의 훈계는 계속된다.
“궁중에 들어가면 삼전三殿(대비 인원왕후 김씨와 정성왕후 서씨, 그리고 세자의 생몽 선희궁 이시)섬김을 삼가고 조심하여 효성으로 힘스고, 동궁 섬김을 반드시 옳은 일로 돕고, 말씀을 더욱 삼가서 집과 나라에 복을 닦으소서.”
그랬다. 혜경궁이 무심코<한중록>에 쓴 “집과 나라에 복을 닦으소서”란 홍봉한의 이 마지막 말 한마디에 그녀가 걸었던 81년 간의 지난한 삶, 궁중에서 보낸 파란만장한 70여 년의 역정이 담겨 있었다. ‘나라의 집’의 순서가 아니라 ‘집과 나라’ 순서였다. 이 순서는 홍씨가 평생 일관되게 지킨 정치이념이었다. 홍봉한이나 그녀에게 우선순위는 나라나 왕가가 아니라 풍산 홍씨 사가였던 것이다. p155
이처럼 세자를 둘러싼 사람들은 모두 노론이었다. 대비 인원왕후김씨도, 법적인 어머니 정성왕후 서씨도 노론이었다. 생모 선희궁은 영조를 따라야 했으므로 당연히 노론이었고 혜경궁 홍씨 역시 아버지를 따라 정성왕후 서씨처럼 뼛속 깊은 노론의 골수 당인이었다. 하지만 세자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비극의 싹이었다. p162
위기감이 쌓인 이종성은 ‘세자 저하를 호위해야 한다’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햇다. 이종성은 또한 이런 말도 했다.
“우리집안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은 만큼, 시속 사람들이 내쫓으려 한다는 이유로 나의 평소 뜻을 움직일 수 없다. 설사 주먹질과 발길질을 번갈아 퍼붓더라도 오직 앞으로 나아갈 뿐 물러설 수는 없다. 한번 죽으면 그만일 따름이다.”
이종성이 이런 말을 해야 할 만큼 상황은 심각했다. 소론은 숙종 43년 (1777)정유독대의 망령을 떠올렸다. 그때처럼 세자는 고립되어 있었다. 그때 숙종은 세자를 두고도 이이명에게 연잉군을 부탁했다. 그것이 경종비극의 시작이었고 현재 벌어지려는 비극의 뿌리인 셈이었다.
p205
노론은 이런 세자가 두려웠다. 그들이 보기에 세자는 어린 시절 ‘범이 깊은 산에서 울부짖으니 큰 바람이 부는구나’라고 쓴 시에 나오는 그 호랑이였다. 지금은 엎드린 채 죽은 듯 지내고 있지만 막상 즉위하면 어떤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었다. p253
온양행차는 세자의 위의를 만천하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 세자가 ‘포악하다’,‘정신병이 있다’는 등 노론이 조직적으로 전파한 소문이 거짓임을 분명히 밝히는 계기도 되었다. 세자의 온궁행이 가져온 결과가 이렇게 되자 급해진 것은 노론이었다.p273
만약 세자빈 홍씨가 영조의 부인 정성왕후 서씨처럼 남편 편에 서서 행동했다면 세자에겐 커다란 힘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혜경궁은 세자를 편들기는커녕 세자에 대한 온갖 정보를 노론에 흘려준 간자間者에 불과했다. 세자는 영조와 영조의 여인들, 그리고 노론뿐 아니라 부인까지도 따돌리고 생존을 도모해야 했다. 비극적 인물이 아닐 수 없다. p288
대신도 양반 사대부도 아닌 남의 집 청지기가 대리하는 저군을 상대로 논박할 수 없다는 평범한 사실을 영조는 애써무시했다. 남의 집 청지기가 세자를 상대로 싸움에 나설정도면 거대한 배경을 지닌 배후가 당연히 있다는 사실도 영조는 무시했다. 영조는 그 배후의 불순한 의도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오직 세자의 변란에 대해서만 의심했다. 세자는 완벽한 함정에 빠졌다.p310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뒤주를 갖다 바친 장본인 홍봉한이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생부의 원수를 갚을지도 모를 세손의 즉위였다. 이말은 사실상 ‘전하의 신하들이 일망타진당하지’않으려면 세자의 아들인 세손의 즉위를 막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홍봉한은 자신의 행위를 변호하기 위해 또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를 끌어들였다.p355
세손은 자신을 제거하려고 직접 나선 홍인한과 정면 승부하기로 결심했다. 자신이 직접 상소를 올려 ‘세손은 세 가지 일을 알 필요가 없다’는 홍인한의 망언을 탄핵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홍국영 등 궁료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p366
혜경궁이 <한중록>을 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즉 사도세자의 죽음과 자신의 친정은 아무 관련이 없음을 극구 변명하기 위해 <한중록>을 쓴 것이다.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쓴 이유는 그 자신이 정조에게 했다는 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동궁(정조)이 비록 아드님이시나, 그때 오히려 젊은 나이시어 나만큼 자세히 모르실 것이니, 모년(사도세자가 죽는 임오년)에 속한 일은 무슨 일이든지 저에게 물으실 것이지 외인의 시그러운 말은 곧이듣지 마십시오.”p376
정조의 고민은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끌어안아야 한다는 것에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에 그 누구보다 외가의 책임이 크다는 사실을 정조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책임의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다름아닌 어머니 홍씨라는 점이 벗어날 길 없는 정조의 뫼비우스의 띠였다. 잘라내도 잘라내도 외가라는 원죄의 끈이 정조의 발목을 잡았다.
p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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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히 들어 사도세자의 기막힌 사연은 알고 있었으나 이리도 홀로 세상과 철저히 이별을 했을까 싶었다. 그의 아내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친가를 위해 남편을 모함하고 정신병자로 몰았고 거짓 글을 썼다. 오래전 역사시간에 배웠던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은 중요하게 밑줄을 그으며 배웠다. 그러나 글의 내용이 자신과 자신의 집안의 과오를 감추려는 행적일 줄이야...
사도세자는 백성을 사랑한 군주의 자질을 충분히 갖춘 인물이었다. 오래전의 역사임에도 책을 읽는 내내 눈물이 맺히고 가슴이 답답했다. 어디 기댈 곳이 거의 없었다. 사방이 노론의 장벽에 막혀 있었다. 그러한 때 아내인 홍씨가 남편을 위했더라면 그는 참혹하게 뒤주 안에서 죽어가진 않았을 것이다. 장인을 비롯한 아내까지 노론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 사위를 죽인 것이다.
후에 외할아버지란 사람은 세손(정조)까지 멸하려 했다. 자신의 권세를 위해서... 아마도 홍씨는 어미인지라 자식을 버릴 수는 없었나보다. 사람의 탈을 쓰고 악을 향해 달리는 정도가 극에 달하고 한 치의 양심이 없었던 인간 홍봉한,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를 감쌌던 혜경궁 홍씨... 정조는 갈등했고 칼을 뽑아 들어야 했지만 다 하지 못하고 이승을 등지고 말았다.
정조는 사도세자, 자신의 아버지가 죽어가던 참혹한 모습을 지울 수 없어 가슴에 화가 쌓여 병이 되었을 것이다.
사도세자... 그를 죽인 영조는 감정의 기복이 큰 사람이었다. 많은 업적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 또한 욕심의 그릇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아들과 경쟁했고 바른 눈을 뜨지 못했다. 역사의 순간들이 소설보다 극적이고 기가 막히다. 단숨에 읽었다. 안타깝고 답답하여 눈물이 맺히기도 했다. 역사의 순간들을 모은 책들을 계속 들추어 보아야 하겠다. 슬픈 기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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