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의 속화에서 관아재 조영석,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같은 화가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공재가 열어 놓은 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길이 생긴 이후에야 너도나도 신나게 달릴 수 있었다. 세월이 흐른 다음에는 시대가 어디로 가야 했는지 누구나 알 수 있지만 막상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 속에서는 그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때 풀섶을 헤치며 새로운 길로 나선 사람을 선구라고 할 수는 있어도 후배보다 덜 각성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순례자는말한다. 공재가 관아재만 못해 보인 것은 세월의 한계였지 공재의 한계는 아니었다. p53
저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수염과 눈썹이 하얗구나.
오사모를 쓰고 야복을 걸쳤으니
마음은 산림에 있으면서 조정에 이름이 올랐음을 알겠다.
가슴에는 만 권의 책을 간직하였고,
필력은 오악五嶽을 흔들 만하지만
세상사람이야 어찌 알리오, 나 혼자 즐기는 것임을.
노인의 나인는 일흔이요, 호는 노죽露竹이다.
초상을 스스로 그리고 화찬도 손수 썼다.
때는 임인년(1782)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표암의 인간적인 면모와 함께 그의 여유로운 유머감각을 다시 한 번 읽을 수 있다.p94
내 천성이 그림을 좋아하니 이 역시 병이다. 넓고 깊게 찾은 지 10여 년이 지나 이렇게 모았으니 놀랍구나. 물物의 이룸과 무너짐에는 때時가 있고, 모임과 흩어짐에는 수數가 있으니 오늘의 이룸은 다시 훗날의 무너짐이 되어 그 모임과 흩어짐이 필연이 아님을 어찌 알리오.... 그대는 나를 위해 이를 기록해주시오.
이때 신숙주가 쓴 글은 그의 <보한재집保閑齋集>에 <화기畵記>라는 제목으로 실려있다. 신숙주는 222점의 화가와 제목을 일일이 나열하고서 이렇게 말했다.
무릇 그림이란 반드시 천지의 조화를 자세히 살피고 음양의 운행을 파악하여 만물의 성정과 사리의 변화를 가슴속에 새긴 연후에 붓을 잡고 화폭에 임하면 신명과 만나게 되어 , 산을 그리고자 하면 산이 보이고 물을 그리고자 하면 물이 보이며 무엇이든 붓으로 그대로 나타내니 가상假像에서 참모습을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화가의 법이다. p128
석농은 <석농화원>의 장황이 이루어진 뒤 유한준兪漢儁에게 발문을 부탁하였다. 안평대군이 신숙주에게 청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유한준의 <저암집著菴集>에는 그 발문이 이렇게 실려있다.
그림에는 그것을 아는 자, 사랑하는 자, 보는 자,모으는 자가 있다. 한갓 쌓아두근 것뿐이면 잘 본다고 할 수는 없다.
본다고 해도 어린아이가 보듯 하고 벙어리가 웃는 듯한다면 칠해진 것 이외는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니 아직 사랑한다고는 할 수 없다.
사랑한다고 해도 오직 붓, 채색 종이만을 취하거나 형상의 위치만을 구한다면 아직 아는 것은 아니다.
안다는 것은 형태와 법도는 물론이고 깊은 이치와 조화를 잘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림의 묘는 사랑하는 것, 보는 것, 모으는 것의 겉껍질 같은 태도가 아니라 잘 안다는 데 있다.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되게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은 아니다..... p130
우봉(조희령)은 이렇게 매화에 정을 붙이고 매화에게 흉금을 털어놓으며 살았다. 나는 이것이 우봉이 환상적인 매화그림을 그린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가슴속에 깊은 산골의 매화경을 만들고 스스로 그 가운데 숨어 한 송이 꽃이라도 세상에 나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때때로 술기운을 따라 열 손가락 사이로 나오게 되면 온갖 형상으로 나뉘어 나타나는데, 진자 매화가 절로 거기에 있었다.
우봉은 난초에서도 이런 파격적이고 현대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p149
석파는 68세때 그린 석란도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릇 그림이란 반드시 흥을 끌어와서 그려야 하는데 흥이란 모름지기 기쁨과 같은 것이다. 내가 난을 그린 지 40년 가까이 되었는데 나는 매번 뜻을 끌어와서 정을 그림에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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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미견서 여봉양사讀未見書如逢良士 독기견서 여우고인讀己見書 如遇故人:아직 보지 못한 책을 읽을 때는 어진 선비를 만나듯이 하고, 이미 보았던 책을 읽을 때는 옛 벗을 만나듯이 한다.
유주학선 무주학불有酒學仙 無酒學佛:술이 있으면 신선을 배우고, 술이 없으면 부처를 배운다.p181
숭례문 글씨는 신장 혹은 양녕대군의 글씨라고 전해왔는데 숙종 때 문을 수리하다 보니 대들보에 유진동의 글씨라고 적혀 있어 이제까지 구전으로 전한 것이 거짓임을 알게 되었다.
이렇듯 각 설이 분분하기 때문에 학자들도 어느 설이 맞다고 의견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여러 설을 종합하여 본래는 양녕대군 글씨였던 것을 중건하면서 유진동 글씨로 교체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에게 가장 오래 그리고 깊게 각인되어 있는 것은 역시 양녕대군의 글씨라는 것이다. 특히 전주이씨 양녕대군파 후손들은 크게 번성하여 조선시대에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고, 현대에 들어와서도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하여 많은 명사가 나와 지금도 장관, 국회의원 중에 그 후손이 여럿있다. p207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묘해서 다산처럼 살겠냐고 물으면 그의 유배생활 18년 때문에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다산은 긴 유배 기간이 있었기에 그의 학문과 사상을 정리할 수 있었다고들 말한다. 다산에게 유배란 ‘강요된 안식년’같은 면이 있다고 말하느 분도 있다.
..다산정약용은 아주 깔끔한 사람이었다. 사회적 처신도 그렇고, 일상생활에서의 태도도 그러했으며 특히 글시는 정갈하다 못해 흐트러짐이 없었다. 유배중에 입었던 옷이 다 닳아 해어지면 그것을 잘라서 첩으로 만들어 시도 쓰고 글씨도 썼다.
..
소설산 중 소설촌에 小雪山中 小雪村
논이고 밭이고 구름 아래 걸렸네 水耕火褥 斷雲根
보랏빛 밭 가운데 있는 세 칸 집 紫芝田畔 三綠屋
저것이 선생이 정원으로 삼은 것이네 這是先生 將就園 p234
다산은 그림에 대한 식견은 있었지만 거기에 마음을 둔 바는 없었다. 그러나 그림이라는 것이 화가의 전유물이 아닌지라 다산은 자신의 마음에 이끌려 몇 폭의 그림을 그렸다. 그는 고향 마을 초계를 재미 삼아 그린 <희작 초계도戱作 苕溪圖>에서 이렇게 읊었다.
소동파는 해남에 귀양 갔을 때(고향의)아미산을 그렸다기에
나도 지금 (고향의)초계를 그리려 하나 마땅한 그림재주가 없네
서툰 솜씨로 그려 객지 집 한쪽 구석에 걸어놓으니
내 집이 저기 있어도 갈 수가 없어
바라만 보면서 공연히 머뭇거리게 되네 p235
창덕궁은 1405년(태종 5)에 창건되었다. 경복궁의 별궁이 아니라 이궁離宮으로 세워진 또 하나의 궁궐이다. 경복궁이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태종이 궁궐을 또 지은 것은 경복궁의 풍수와 나쁜 기억 때문이었다.
경복궁은 정도전의 주도하에 지어질 때부터 말이 많았다. 풍수에 밝았던 재상 하륜은 상소를 올려 ‘경복궁 터는 산이 갇히고 물이 마르니 왕이 사로잡히고 족속族屬이 멸할 지형’이라며 공사를 중단하라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이미 터를 닦았고 전각을 짓는 중이며 중국의 사신을 응접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이곳에서 맞아야 한다며 받아들이지 않앗다.
그러다 1398년(태조 7)에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이방원이 왕위 계승에서 배제된 것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켜 정도전을 살해하고 당시 생존하고 있던 형들 가운데 맏형을 왕으로 앉힌 것이다. 얼떨결에 즉위한 정종은 경복궁 터가 좋지 않다면서 1399년(정종1)에 태조가 즉위한 개성의 수창궁으로 왕궁을 옮겼다.
그리고 이듬해 이방원은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아 태종으로 즉위한 뒤 곧바로 창덕궁 공사를 지시하였다. 중신들은 경복궁을 사용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태종은 경복궁은 터가 좋지 않고, 자신으로서는 형제를 죽인 좋지 않은 기억이 있어서 창덕궁을 지었노라고 고백하였다. 그 대신 사신 접대 등 법궁으로서의 경복궁 지위는 유지하겠다며 약속을 분명히 지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박자청에게 경복궁에 경회루를 짓게 했다.
이리하여 1405년(태종 50창덕궁이 완공되자 태종은 다시 서울로 수도를 옮기고 창덕궁에서 집무했다.
태종이후에도 역대 왕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을 더 좋아하여 여기서 지내는 일이 많았다. 풍수도 풍수지만 창덕궁은 산자락에 편하게 올라앉아 아늑하고 인간적인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친 동궐은 약 20만 평의 숲이 든든히 등을 받치고 있었다.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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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얘기가 좋다. 거기에 예술가들의 이야기는 더욱 마음에 내려앉는다. 그들의 글씨와 그림과 뒷얘기에 푹 젖어들었다. 그 사람의 글씨를 보면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던가 .. 다산의 글씨에서는 근접하지 못할 맑음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훗날 여유가 주어진다면 붓을 잡으며 하루하루를 지내고 싶은 마음이다. 오래전에 정신없이 날밤을 새우며 먹을 묻히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처음에는 동양화를 배우는 것으로 시작했는데 스물을 조금 넘겼을 때이다. 좋은 스승을 만나 힘듦에도 굴하지 않았다면 인생은 참 많이 달라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짧은 만남이 지나고 결혼한 후 글씨에 도전했었다. 그때 나의 앞날이 이리 전전긍긍하리라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마음을 먹고 있으면 언제든 길이 닿으리라 믿는다. 이렇게라도 들여다보며 희망을 가져 보아야 하겠다. 세상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나 또 마음만 먹으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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