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4월 7일
최인철/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행복연구센터장
올해는 보름이라 벚꽃이 일찍 피었건만 세상은 불평이 없다. 누군가가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오면 불편한 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인데 보름이나 약속을 어긴 벚꽃에는 관대할뿐더러 오히려 감사하기가지하다. 새해 벽두부터 ‘예외없이’ ‘철저하게’이런 표현들을 들어와서인지 벚꽃의 예외는 편안함을 준다.
우리 사회는 그 어느 곳보다 사회가 정해놓은 시간표가 강력하게 작동한다. 예를 들면 어느 나이에는 꼭 대학을 가야하고, 어느 시기에는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한다. 이런 사회적 시간표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는 심각한 ‘시간 기근(time famine)’에 시달리고 있다. 유치원생부터 할아버지까지 모두가 다 시간이 없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바쁘신데 죄송해요”라는 말로 전화나 문자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도 올봄의 벚꽃처럼 무슨 일이 있어도 정해진 시간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적인 근면성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유학 시절 레바논출신의 한 친구가 자신을 ‘치킨 베지테리언(chicken vegetarian)’이라고 소개한 적이 있다. 다른 고기는 전혀 안 먹지만 닭고기는 먹는다고 하기에 그러면 채식주의자가 아닌 것 아니냐고 했더니 그래도 치킨은 먹고 싶다며 빙그레 웃는 것이었다.
하나쯤 예외를 허용하는 마음의 여유를 느낄 수 있는 멋진 대답이었다. 혹 우리 국민의 비장함은 “이제부터 모든 원칙에 반드시 예외를 두자”는 아이러니를 만들어낼지도 모르지만 정말이지 이제는 우리 마음속에 예외와 여유를 허락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시간에 관한 우리의 심리 몇 가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선 시간 기근을 피하려면 역설적으로 누군가에게 자기 시간을 주어야 한다. 연구에 따르면 자원봉사를 하거나 친척을 만나는 등과 같이 누군가에게 시간을 주는 사람일수록 시간에 쫓기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가 항상 바쁘다고 느기는 이유는 시간이 온통 자신의 일로만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다른 사람에게)시간을 주는 것이 당신에게 시간을 준다(Giving times gives you time)”는 멋진 표현으로 타인을 위해 시간을 내줄 것을 당부한다.
비우면 채워지는 좋은 예이다.
시간에 관한 심리적 현상 도 하나는 시간의 덧셈과 뺄셈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흔히 하는 착각중 하나는 자기에게 시간이 좀 더 주어지면 굉장히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학생은 하루만 시험을 연기해달라고 조르고 직장인은 보고서 기한을 하루만 더 달라고 요청한다.
그런데 거꾸로 시험을 치르는 학생에게 하루 전에 시험을 봤다면 어땠을 것 같으냐고 물으면 대부분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시간이 더해진다면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시간이 줄어들어도 결과에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시간이 줄어들어도 결과에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역설을 보인다.시간의 뺄셈효과보다 덧셈효과를 믿는 것이다.
이 믿음 때문에 우리는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으려고 강박적으로 행동한다. 그러나 살아보니 그 시간이 없어도 대세에는 별 지장이 없었을 것 같은 경우가 허다하지 않던가?
인생에는 이 봄의 이상고온(異常高溫)처럼 자신과는 무관하게 생겨나는 돌발 변수가 있게 마련이다. 이를 무시하고 계획을 지나치게 빡빡하게 세우면 늘 시간에 쫒기고 결국은 원하는 시간에 일도 마치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올봄에는 마음을 조금 풀어주자. 약속을 어긴 이 봄의 벚꽃처럼 우리도 가끔은 시간을 어겨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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