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4월 4일
萬物相
선시(禪詩)
부여 무량사는 참 곱게 늙은 절이다. 극락전 옆 승방 이름이 ‘꽃비 내리는’우화궁(雨花宮)이다. 기둥마다 걸린 주련(柱聯)은 불경말씀이려니 했다가 그중 넉 줄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늘은 이불, 땅은 자리, 산은 베개 삼고/ 달은 촛불, 구름은 병풍, 바다는 술통이로다/크게 취해 춤 한바탕 추나니/긴 장삼 소매 곤륜산에 걸리려나.’ 경건한 절집에 웬 술과 춤인가. 호기롭기가 ‘산 뽑고 세상 덮는다’는 항우 뺨친다.
쓴이는 기이한 행벅으로 이름난 진묵대사다. 무량사가 임진왜란에 불타자 다시 크게 세운 선승(禪僧)이다. 왼쪽 주련은 어느 스님 시인지 그지없이 낭만적이다. ‘산에 걸린 달 불러 선방(禪房)쓸고/강 구름 잘라 와 누더기 솜으로 누빈다.’ 뒤편 영산전 주련은 월산 대군 시조와 닮았다.
‘밤 깊고 물 차가워 고기 물지 않으니/ 배 가득 허공 싣고 달빛 아래 오노라.’ 금강경 야부송(頌)에서 중극 선승은 ‘텅빈 충만’을 노래 했다.
시(詩)는 ‘절(寺)의 말씀(言)이다. 선시()는 고승들이 언어로 벼리고 벼린 깨달음이자 가르침이다. 요즘 널리 알려진 선시가 고려 말 나옹선사가 썼다는 ’청산은 나를 보고 (靑山兮要我)‘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 가라하네.‘
한시(漢詩)를 신경림 ‘목계장터’ 같은 운율로 옮겨 귀에 가슴이 쏙쏙 들어온다.
조계종 종회 의장 향적 스님이 ‘선시,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를 펴냈다. 월명사 ‘제망매가’부터 성철 스님이 열반 앞두고 내린 임종게偈)가지 70여편을 엮었다. 향적 스님은 선시를 ‘옛 선사들이 남긴 마음의 사리(舍利)라고 했다.
‘봄 깊고 날 길어도 찾아오는 이 없고/바람에 배꽃 날리니 뜰 가득 흰 눈 쌓이네.’고려 원감국사에게 바람에 날리는 건 배꽃인데 마당에 내려앉는 건 눈이었다.
최인호는 1988년 연재소설을 끝낸 뒤 생정 처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문 걸어 잠그고 혼자 지냈다. 잠자던 그의 심혼(心魂)에 구한말 경허선사의 선시가 불을 댕겼다. ‘일없음이 오히려 나의 할 일/ 문고리 걸고 낮잠을 자네.’ 가톨릭 신자 최인호는 경허선사를 그린 불교소설 ‘길 없는 길’을 ‘붉은 화로에 내린 한 점 흰 눈(紅爐 一點雪)’이더라고 했다. 그 한 줄에 전율한다.
탐욕, 분노, 어리석음을 하루 한시도 벗지 못한 채 애면글면 살다 죽비 한 대 호되게 맞았다.-오태진 수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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