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서 배우다

비겁(卑怯)

다림영 2014. 1. 17.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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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14

 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나이가 들면 점점 더 고집스러워진다는데 나는 요즘 정반대로 가고 있는 것 같다. 젊은 시절에는 나도 다짜고짜 내 의견을 말하기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나는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

 

단언컨대...”라고 시작하는 TV광고가 유행이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단언하기가 겁이 난다. 주변에서 확신에 차 있는 사람들을 보면 많이 부럽다. 어떻게 하면 저런 자신감을 갖출수 있을가 부러움을 금치 못하겠다.

 

내가 이처럼 다소곳해지는 데에는 미국 유학 시절의 경험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버드대에는 학부 학생들과 대학원생이 함께 들을 수 있는 수업들이 있다.

학기초에는 콩인지 팥인지도 구별못 하던 어린 학부 학생이 불과 서너 주만에 이미 석사까지 마친 나를 가분히 제치고 나아가는 모습을 보며 느꼈던 모멸감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내 지도교수였던 에드워드 윌슨 교수를 무자비하게 공격하던 리처드 르윈틴 교수는 지금까지 내가 만난 인간 중에서 가장 명석한 두뇌를 지녔다. 어떤 주제의 세미나든 그저 한 시간만 들으면 그 연구를 평생 해온 발표자를 압도해 버리는 그 살아 있는 천재를 보며 무한한 좌절감을 느꼈다.

 

나보다 더 훌륭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언제든 주변에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이후 나는 비겁해지기로 결정했다. 일단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듣기로 했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두루 들은 다음 그걸 종합하고 은근슬쩍 거기에 내 생각을 조금 버무려 마치 내것인양 꺼내 놓는 짓을 하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지극히 비겁한 전략이다. 그런데 어쩌랴? 비겁함이 우리로 하여금 뭉치게 하는걸.

 

18세기 영국 작가 새뮤얼 존슨은 이렇게 말했다. “다 같이 비겁해지면 평화로워진다. 인류의 절반은 용감하고 절반은 겁쟁이라면, 용감한 자들이 늘 겁쟁이라면, 용감한 자들이 늘 겁쟁이들을 윽박지를 것이다. 만일 모두가 다 용감하면 늘 서로 싸우며 대단히 불편한 삶을 살게 되겠지만 모두가 겁쟁이면 우리는 함께 잘 살 것이다.”

 

우리 모두 조금만 비겁해지자. 그러면 세상의 뜻밖에 훨씬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다.-

국립생태원장.이화여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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