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꽃신/김용익- 작가노트

다림영 2013. 8. 31.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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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

책을 쓰는 모험

1948년 남 플로리다 대학에서 학과목 이외에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기숙사에서 한 방을 쓰던 학생이 나에게 말했었다.

 

내가 너 같으면 이 나라에서 그렇게 시간을 허비 안 할 것이다. 만일 미국서 네가 책 한 권을 출판하면 내가 네게 5백불을 주겠다. 미국의 풀판계에 뚫고 들어가기란 영어를 모국어로 타고난 미국 작가에게도 거의 불가능한 모험이다.”

 

나는 영어를 마스터했다기에는 감감하지만 그 말을 귀담이 듣지를 않았다. 2차 대전 때 동양에서는 영어 공부 하는 것이 제일 시대에 안 맞는 것이라고 내 주위 사람들이 우겼지만 나는 영문학 공부가 하고 싶어서 했다. 일단 미국으로 유학 오니 어찌나 글을 쓰고 싶어서 내 영어가 소설쓰기에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아침 일찍 세 시간씩을 꼭 책 쓰는데 보냈다.

 

영어 공부를 더 할수록 내가 지금 하는 문제가 자끄 더 크게 늘어났다. 한국 감정과 사상에 젖어 있는 어떤 관념과 물건을 영어로 그리려고 하니 나는 한국어와 영어 두 말사이에 아주 단순한 표현에서도 뉘앙스에 대해서 많이 느끼게 되었다.

 

가령 ‘Kim entered the house’ 하면 아주 단순하게 보이지만 한국집의 구조에 대해서 확실한 시각적 Visual image’를 갖지 않앗다면 독자의 이해가 완전하지 못하다.

한국사람이 집 안에 있다 in the house’하면 마당에도 있는 것이고 마루에도 있는 것이고 또는 조그마한 방에도 있는 것이니 말이다.

 

서구의 의미로서 집에 들어갔다는 각별한 그림을 주려고 하면 ‘house’보다 ‘room’에 들어갔다고 간혹해야 되었다. 내가 여기서 간혹이라 하는 의미는 많은 한국사람들이 그의 손들을 마루에서 대접하면서도 대접을 잘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까닭이며 또 한국식으로 방에 들어갔다고 하는 말은 영어의 의미로서보다도 좀더 친밀한 행동이 되기 쉽다.

 

또 한 가지 한중우 가랑이에 두 다리 끼고 그 사람을 환영했다고 우리 민속의 표현을 하려면 한국 바지는 미국바지보다도 폭이 넓다는 것을 말해줘야 되니 넓다baggy’라는 형용사를 아쉬운 대로 하나 넣어줘야 된다. 문제가 이렇게 많은데 내가 말한 것은 조그마한 예일 뿐이다.나는 친구들에게 영어뿐만이 아니고 말의 뉘앙스에 대해 늘 물어가면서 생각했다.

 

플로리다에서 3년동안 공부하면서 나는 학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또 켄터키 대()로 책 쓰는 도박을 계속 하려고 옮겨갔다. 겨울방학 때에 나는 가죽으로 표지가 된 귀중 도서 커버를 왁스로 닦는 일을 도서관에서 한 시간에 50전씩 받으며 했는데, 늘 나의 마음에는 장차 내가 쓰는 책이 출판되고 이 빛나고 향기로운 가죽으로 커버가 되는 꿈을 꿨다.

 

이층 귀중 도서실에선 나 혼자만 일을 하고 있었다. 내 두손에 기름과 왁스를 가득 묻혀서 책 커버를 윤내갈 때는 나는 시집을 한 권 내 앞에 두고 소리를 내가며 읽었다. 시를 읽으면 페이지를 자주 넘기지 않아도 되고 또 그 시에 담겨 있는 선율있는 목소리가 그리 좋았다. 내 더러운 손으로 그 페이지를 곧 넘길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읽는 시가 중단될 때마다 마치 내가 좋아하는 노래의 레코드에 금이 가서 바늘이 빠진 것같이 실망했다.

 

하루는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을 읽고 있을 때 그곳 부도서관장이 바로 내 뒤에 서 있는 것을 깨달았다.

 

학생들이 도서관에서 일하는 시간에 책을 읽는 것에 대해서 도서관측은 아주 엄격하게 다스렸으니 나 보고 이 부인이 야단을 칠른지 혹은 파면시킬는지, 내가 그 여자 보고 인사도 안하고 쳐다도 안 보고 가만히 앉아 있으니 그 여자의 까칠한 손이 마치 그 책을 뺏을 것같이 선뜻 다가오더니 어쩐지 뺏지 않고 그의 손가락으로 한 페이지를 넘겨주고 아무 말없이 방을 나가버렸다.

 

그 시를 마지막으로 읽을 때에 나는 마음이 퍽 감며d됐고 그 시의 마지막은 그것이 그작은 일에 그토록이나 큰 차이를 가져왔다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였다.

 

나는 책 쓰는 모험을 계속해갔다. 1953년 아이오와 대학 창작부에 등록했을 적에는 벌서 6ㄷㅇ안이나 소설을 쓴 셈이었고 장편소설 하나를 끝마쳤다. 그래서 뉴욕의 여러 출판사에 보내기 시작했다. 기차 편으로 원고를 우송하는 데 거의 5달러가 든다. 원고가 퇴짜를 맞고 나에게 돌아오기가지에는 한 달 가량이 걸려서 이것이 매달 평상비용이 됐다.

 

원고 우송하는 데 보태 쓰려고 버스값을 아껴서 나는 아이오와 시 교외에 있는 기차 역으로 늘 걸어갔다. 기차 수송계 사람은 늘 보내면 자구 되돌아오는 우송물을 보고 아주 이상한 눈치로 나를 대했는데 하루는 대체 이 안에 뭣이 있는가?” 하고 물어서 나는 설명을 하니 아이오와 시의 한 늙은 영감이 당신같이 매달 원고를 부치려고 늘 나타난다고 얘기를 했다.

 

그래도 나는 매달 그곳에 가니 그 우송계 계원을 만날 때마다 조금 창피스러웠다. 그럭저럭 서로 알게 됐는데 나에게 한국말은 모국어이고 일본말은 일본 점령 당시에 배운 말이고 영어는 중학서부터 배우기 시작했으니 셋째 말이란 것도 그도 알았다.

 

하루는 그 노인과

메인주에 한 번 여행 갔을 적에 우연히 바닷가에 서 있는 젊은이를 만났는데 그때 그 사람은 보기에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 같이 고독해 보여서 내가 말을 건 게 계기가 되었다. 그의 집안도 알게 되어 다음 여름방학에는 아이오와에서 메인 주로 컴패니언companion직업을 얻어갔다. 가는 도중 기차 안에서도 아침 일찍 세 시간씩 글쓰기를 종교의 의식처럼 계속했다.

 

낮에는 그 사람의 컴패니언으로서 또 그의 조카들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나는 영어의 리듬을 즐겼다. 밤에는 늦게까지 글을 썼는데 동네에 한국 사람은 잘 적에도 불을 켜놓고 자기를 좋아한다는 말이 돌았다.

 

방학이 끝나면 아이오와로 돌아오는데 순전히 글을 쓰려고만 돌아왔다.

아이오와 시의 집주인 미세스 앤더슨은 주말에도 방을 떠나지 않으니 방 소제를 도무지 할 수 없다고 불평했고, 나도 자식이 있는데 외국에 가서 항상 방 안에만 앉아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딱딱거려서 그 할머니 말이 옳다고 하면서 방을 나올 때는 이제는 리빙 랭귀지living language를 해보려 했다. 학교 야경꾼하고 혹은 밤일 하는 소제부들하고 늘 같이 돌아다녔고 그 사람들에게서 교실에서 배우지 못하는 영어를 또 미국물정을 귀담아 들으면서 수업료 없이 배웠다.

 

그 대학병원 카페테리아에서 일자리를 얻어 갈 때에는 시를 하나 둘 조그만 종이조각에 써가지고 강을 건너 갈적에 늘 읽었다. 그리고 식당에서 음식을 서브할 적에도 카운터에 그 종이를 숨겨놓고 음식을 나눠주며 그 시를 암송하려 애썼는데 한 이주일 되니 파면이 됐다.

 

사실인즉 학위라고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 택한 학과목에 A를 받더라도 별로 좋지는 않고 다만 내가 쓴 소설 하나를 출판사에서 받아주기만 늘 원했다. 한편 퇴짜 받은 편지들이 쌓여가는 것을 우두커니 보고 있으면 아마 이것이 불가능한 것인가 느끼기 시작했다.

 

어느 토요일날 창밖을 보니 눈이 많이 내리고 있는데 나는 대체 한국 사람으로서 둘째 말로서 아니 셋째 말로써 인간 감정의 드라마를 소설로 내라 쓰려고 하는 괴상망측한 생각을 어떻게 했는가 하며 자신을 의심했다.

 

아주 기가 죽어서 바깥으로 나가 타운에 가서 포켓에 남은 돈을 다 털어 축음기 값싼 것을 하나 샀다. 적어도 음악 듣는 것은 할 수 있다고 비발디의 사계를 빌려가지고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계속 틀면서 들었다.

 

가만히 않아서 듣고 눈 오는 것을 보니 이상한 환상이 나타났다. 한국 꽃신 한 켤레가 나타나더니 눈 오는데 자꾸 나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마음 가운데서 그 꽃신을 자꾸 따라가슨데 그 꽃신 신은 사람의 뒷모습만 보고 조그마한 조각배 같은 흰 버선 신은 꽃신의 뒤축을 내가 자꾸 보고 있었다.

 

그 비단꽃신이 먼 산을 자꾸자꾸 걸어가고 있고 대체 그 신을 신은 여인이 누군가 보고 싶은데 그 신 신은 도무지 돌아서지 않고 볼 수가 없었다.

그 아름다운 꽃신을 안 놓치려고 애쓰며 그 신발을 자꾸 따라갈 때에 그 제일 좋은 비단이 눈에 젖을까봐 걱정하며 따라가는 내 가슴이 자꾸 발닥거렸다.

이 신의 잡을 수 없는 임자를 내가 한번 보았으면 진짜 얘기를 쓸수 있겠지.”

 

환상에서 나와서 결심을 하고 새 정신이 확 들었다. 하루 종일 먹지 않은 배가 고프기 시작하여 처음으로 길 모퉁이 식료품 가게에 가니,

메리크리스마스!”

명랑하게 인사하고 몇 마디 격려하는 말을 해준다. 나는 샌드위치 고기를 두세 쪽 달라고 했다. 원고를 부치느라 돈을 너무 많이 쓰고 축음기를 사려고 갑자기 큰 소비를 한 때문에 음식 살 돈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 고기 카운터 책임자가 큰 고기 덩어리를 잡기에

아니 두서너 쪽만 주시오.”

급히 말하니 곧 그 고기를 턱 싸서 붉은 연필로 20센트라고 썼다. 이 고기는 2달러어치갇 hlf 것이었다.

이것이 진짜 20센트요?”

하니

예스 써-”

했다. 캐셔에게 지불하러가니까 여자는 고기 꾸러미를 자세히 보더니 나를 한번 건너다보고 아무 말없이 20센트를 받았다. 그 후로도 내가 그 우육상에게 가기만 하면 고기 뭉치가 커지는 것 같고 값은 항상 20센트였다. 이 우육상 덕분에 <꽃신>을 쓰는 한달 반 동안은 잘 먹었다.

 

<꽃신>얘기에는 한국 산간에 있는 백정이 망해가는 꽃신집 어린 딸에게 적은 돈을 들고 오지만 늘 고기를 관대하니 많이 준다. 또 백정들의 눈을 통해서 그 얘기를 다룬다. 내 속으로 이 원한(꽃신)을 어로 내 마음 가운데 따르는 동안에 영어로 쓰는 글 가운데 내 자신의 한국말의 리듬을 잡으려 하고 또 동시에 모든 것을 구체적 이미지로 표현함으로써 오해받을 빌미를 주지 않으려 애썼다.

 

어떠한 신secene을 묘사하기가 영어로서 곤란할 때마다 늘 유혹은 슬쩍 다음으로 넘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그 작품에 꼭 맞는 (속하는)어떠한 신이나 단 말 한마디라도 안 하고 어물어물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고 이 가시같이 어려운 말 또는 글발, 언어의 장벽을 가져오는 것은 바로 그것이 그 소설의 맥 뛰고 숨쉬는 그 말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꼭 찾으려 애쓴다.

 

l내가 <꽃신>을 완성한 다음에 아이오와 대학 창작부에 있는 시인 폴 앵글Paul Angle에게 주었는데 그가 바빠서 앤젤오브 포레스트Angel of Forest의 작가인 마거리트 영Margaret Young에게 나의 이 원고를 줬다. 나를 전화로 불러서,

멋진 작품이에요. 바로 <하퍼스 바자Iarper’s Bazaar에 보내세요.”

크게 흥분한 마거리트 영의 목소리가 들린 지 열흘 후에 나의 우체하통에는 늘 눈 익은 보기 싫은 누런 봉투(되돌아온 원고)가 아니고 <하퍼스 바자>의 편집자 바이스 모리스 Vice Moris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꽃신>을 출판하겠다 하며 250달러를 주겠다고 했다. 큰 기쁨의 이때에 나는 같이 좋아할 사람이 없었다.

 

이 소설이 출판되자 곧 <런던 바자London Bazaar>에서 국제 전보가 왔는데 그 <꽃신>25기니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아이오와 시에 아마추어 발레 단체가 그 얘기를 위주로 한 발레를 기획하면서 길 모퉁이 그 식료품점 앞 전봇대에 <발레 꽃신춤>이란 광고가 붙었다.

 

내 단편 소설이 <마드모아젤Mademoiselle>,이탈리아의 국제잡지 <보테크 오스쿠레Botteque Oscure>,<뉴요커 The New Yorker>등에 나온 이후 그 돈으로 나는 10년만에 고국에 돌아왔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한편 나는 영어와 한국말로 글쓰는 것을 계속했다.

 

1960년 나의 옛 친구를 만나러 미국으로 다시 와서 켄터키 대에 들렀을 때 그 귀중 도서부 부도서관장을 만나보고 나는 퍽 기뻤다. 그 부인은 내가 일하는 동안에 시를 읽던것과 나를 위해 페이지를 넘겨준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부인이 나에게 요즈음은 뭣을 하느냐고 묻기에 미국잡지에 소설을 썼고 리틀 브라운 The Little, Brown출판사에서 청소년 소설 두 개가 나왔고 알프레드 에이 노프 Alfred A, Knopf출판사에서 장편 <뒤웅박>이 나올것이라고 말하니 믿지 아니하는 것 같이 천천히 도서관 목록을 보고는 그리 좋아하면서 중국 요리점으로 디너를 바로 초청해줬다.

 

거기서 저녁을 먹은 후에 그 부인의 자동차로 양들이 먹고 있는 초원을 옛날 얘기를 하면서 빙빙 돌았다.

그 겨울 리틀 브라운The Little, Brown 출판사로부터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는데 플로리다, 켄터키에서 쓴 청소년 소설 < 더 해피 데이 The Happy days>책을 아름답게 가죽으로 장정한 것이었다.

 

-19649, 미국 <더 라이터 The writer>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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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꽃신이란 소설을 너무 좋아한다. 그의 책을 사서 줄을 그으며 몇 번씩 읽었다. 그런데 그 책을 어렸을 때 친구가 내게 방문했을 때 선물로 주고 말았다. 내가 가장 귀히 여기는 책 중의 첫 번째로 꼽는 책이었다. 책을 사서 본지가 언제인지 까마득하다.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것이 많으니 내 책 한권도 사보지 못하고 있으며 빌려보는 것이 전부이다. 블러그에 언젠가 꽃신의 전문을 옮겨 놓은 적이 있는데 가끔 들여다보면 스크랩을 해가는 경우가 있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그의 글을 다시 읽고 싶어서 책을 빌렸다. 맨 뒤에 지은이의 눈물겨운 말씀이 있어 읽다가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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