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륵- 호륵 호륵- 호르르륵!
작은 호르라기소리가 사일렌 소리처럼 들렸다. 후레쉬 조명은 번쩍 번쩍 날아왔다.
우리는 딱 걸리고 말았다.
‘풍기문란으로 서까지 가셔야 하겠습니다. 무슨 짓 입니까? 가족들이 휴식을 취하는 공원에서’....
어둠속에서도 붉어지는 얼굴을 감출 길 없었다.
분명 사람이라고는 한명도 보이지 않았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숨어 우리를 노리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늦은 시각이지만 동네 사람들이 이따금 휴식을 취하는 공원에서 입맞춤을 하는 것은 옳은 행동이 아니라 했다. 경찰서까지 동행을 하자는 것이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공원엔 사람 그림자라고는 없었고 호르라기를 불어댄 그 남자와 우리뿐이었다. 그는 모자만 썼지 경찰이라고 하기엔 복장이 수상쩍었다. 주민등록증인지 아니면 무엇인지 컴컴한 곳에선 분간할 수 없는 신분증 같은 것을 내밀었다. 경찰에서 어떤 임명장을 받은 동네를 지키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선생님’ 이란 말을 붙여가며 젊은 사람들이 어쩌구 하며 봐달라고 사정을 했다. 하다가 안 되니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싹싹 빌었다. 그깟 입맞춤 한 것이 무슨 죄라고 그렇게 무릎을 조아리고 그 깊은 밤에 빌어야 하는지 했지만 따지기에 앞서 서울에서의 막차시간은 다가왔던 것이다. 그는 나를 역으로 바래다주어야 했다. 시간이 촉박했기에 그 사람의 마음을 녹여야 했다. 여기저기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그는 자신의 담배 갑을 꺼냈다. 몇 개피가 빈 한 갑을 남자에게 불쑥 내밀었다. 족히 예순은 넘어보이던 남자는 엄한 소리를 해대며 나라를 운운하더니 그의 손에 들린 담배를 낚아챘다. 간신히 살았다는 듯 긴 숨을 토하며 일어선 그와 나는 몇 번이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손을 잡고 뛰었다.
우리의 등 뒤로 가당치도 않은 말이 화살처럼 날아왔다.
‘경찰서로 넘기려고 했는데 내가 봐 주는 거여-’
경찰서에 들어가 조서를 쓰고 오점을 남 길 뻔한 두 남녀는 마구 달렸다. 공원에서 역으로 내려가는 길은 흐르는 시간처럼 가팔랐다. 간신히 역으로 달려와 계단으로 뛰어올랐다. 막차는 역으로 들어오고 있었고 발뒤꿈치를 들고 손을 마구 흔드는 그의 얼굴을 잠깐 뒤로 봤는지 아닌지 계단을 뛰어오르며 문이 닫히는 동시 전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맹세를 했다.
‘다시는 공원에 가면 사람이 아니다‘
가쁜 숨이 멈춰지고 몇 차례의 역을 지날 때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정신 나간 여자처럼 웃음이 새어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가 무릎을 꿇고 싹싹 비는 모습과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져 찾아낸 담배와 그것을 받아 채는 남자라니 지나간 풍경이 새삼스럽게 우스꽝스러웠던 것이다.
사실 그 당시 나는 너무 무서웠다. 겨우 스물 한 살 밖에 되지 않았고 그런 곳에 발을 들여놓는 다는 것은.....‘경찰서’라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사 돌아보니 방범대원이 아닐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보통 그런 이들은 두 명 정도 팔뚝에 노란 완장을 차고 다니는데 그는 혼자였고 완장도 없었고 뭔가 석연치 않은 모습이었던 것 같다.
사건 같지도 않은 풍기문란 사건은 1980년대초의 일이다. 남편과 7년의 연애를 했고 사내연애였다. 우리는 모두에게 비밀한 연애를 했으므로 시내에선 만날 수가 없었다. 직원들이 대부분 전철이나 버스로 지나다니는 남영동이기에 우린 그곳을 벗어나야 했지만 전철로 한 시간 거리에서 출퇴근을 하는 나로 하여 멀리 갈 수도 없었다.
그렇게 몰래 남영역 뒷길 사과장수의 리어커가 있던 신호등에서 만나 숙대가 있던 근처 공원으로 오르곤 했다. 핸드폰은 고사하고 삐삐인가 하는 것도 없던 시절이었다. 먼저 끝나는 사람이 무작정 상대를 기다리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일이라도 생기면 연락할 길도 없어 기다리다 그냥 집으로 향하던 때도 있었고 1시간 이상 기다리던 때도 많았다.
엊그제였다. 늦은 퇴근이었다. 거의 11시가 다되어 역에 도착하게 되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가히 영화의 한 장면들을 속속들이 펼쳐진다. 반대편 에스컬레이터에는 쌍쌍이 젊은 아이들이 아래위로 올라서서 부등켜 안고 입을 맞추는데 사람이 없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오르고 내리는 모든 계단에 사람들은 총총히 서 있다. 아무도 상관도 하지 않지만 그들 역시 보란 듯이 멋진 입맞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상전벽해가 아닐 수 없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와 역 광장으로 들어서면 또 그러한 풍경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누구하나 뭐라 하는 사람도 없거니와 더군다나 풍기문란을 운운하며 호각을 부는 경찰이나 방범대원이 있다면 그들이 고소를 당할지도 모른다.
늦은시간이지만 역 광장에는 지나는 사람은 많고 많다. 그런 젊은이들을 보면 그저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을 때다’ 하며 자신의 젊은 시절을 돌아보기도 할 것이다.
하루라도 도 안보면 죽을 듯이 만나던 풍기문란의 소유자들은 이젠 희끗한 머리카락을 지니게 되었다. 그들의 사랑의 행방은 어디로 갔는지 묘연하기만하다. 주변 얘길 들어보아도 사랑을 운운하며 사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인생이란 사랑으로 시작해서 고운정 미운정으로 무덤덤하게 살아가는 것인가. 때로 풍경처럼 아름답게 손을 잡고 산책을 한다는 친구의 얘기도 듣지만 난 익숙하지 못하다.
연애할 때는 현명하지 못하다고 한다. 살다보니 현명하지 못하던 때 보지 못하던 것에 눈을 뜨고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여건의 한 남자가 눈에 확연히 보이기 시작한지 오래되었다.
젊은 아이들의 애정행각을 지켜보니 그 사랑은 또 언제까지 지킬 수 있을까 싶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애틋한 사랑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불타는 사랑은 하루가 다르게 희미해져가겠으나 모쪼록 어떤 정으로든 아름다이 지켜나가길 바래보며 늦은 귀가의 발걸음을 재촉한다.
“부부간의 사랑으로 인류가 번영했고, 친구간의 사랑으로 인류는 더 완벽해졌다. 하지만 쾌락을 좇는 욕망 때문에 인류는 타락에 빠졌다”-책 /철학의 즐거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