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중에서-
“..열하일기는 한국 문학사상 수필의 광도와 밀도, 심도, 장력등 수필의 포용성과 기능성을 극대화한 대작임에 틀림없다.
파격적인 리얼리즘, 천의무봉한 상상, 종횡무진 한 체제, 자유자재의 문체를 혼용하면서 하늘 아래 모든 제재를 녹이는 용광로다. 소설이나 소설적인 것, 시나 시적인 것, 평론이나 칼럼, 일기, 시화, 산문 등을 망라했다.
문세나 문장 또한 그렇다. 그것은 밑도 끝도 없이 흐르지만 그 흐름을 잘라서 여러 가지 장르로 만들 수도 있었다. 그것들은 갑자기 사라지는데 사라지면서 울림을 남겨 감동적이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묘사가 간결하지만 구체적이고, 대화가 빈번하지만 현장감을 더했다. 산만하게 보이지만 비장을 보이고, 긴장을 보이다간 유연하게 풀어진다. 그러면서 실학이라는 주제를 놓지 않는다. 그 주제를 위해 때로는 정통에서 일탈하고, 때로는 분노와 불평을 해학이나 풍자로 완화시킨다.
지금 우리 수필은 그 세가 팽배하지만 그 품격과 문체는 여성화, 노년화, 서정화, 소품화로 오그라들고 있다. 그런가 하면 우리와 중국 관계는 열렸다. 지난날 거의 1세기 동안 가깝고도 먼 나라였던 중국은 지금 현실적으로 멀 수 없는 지근한 거리에 있다. “
본문 중에서
“..
높다란 굴착기 서너 대가 서 있고, 횟가루와 쇳가루를 부수고 반죽하는 기계가 부산하게 움직였다. 어처구니없었다. 여기가 백이.숙제의 그 유명한 사당 자리였다니! 연암은 물론이고 그 많은 조선 선비가 참배했던 곳이라니! 늙수그레한 인부에게 물었다. 사당은 1960년대 중반에 파괴되었다고 하니, ‘비림비공( .임표와 공자를 비판하는 운동)’의 인위적인 폭풍에 쓰러진 것이다. 왜 복건하지 않느냐 물으니 인부는 모른다 하고, 옆에서 듣고 있던이가 “노력 중”이라고 귀뜸한다.
..
연암은 유리창에 홀로 서서 사무친 이방감에 몸서리쳤다. 자신의 행장,생김새,내력을 알 사람이 있을 턱이 없었다. 조선 땅에서 떵떵거리던 반남 박 씨 자신을 알 턱이 없었다. 동시에 무한한 자유를 만끽했다. 여기 아무도 아는 이 없는 풍요의 거리에서 미치광이가 되고 싶고, 또 성인이나 부처를 비롯한 철인이나 현인으로 둔갑해 이 고독ㅇ르 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위안했다. 공자의 말을 빌려 ‘사람이 나를 몰라준다 하여도 화내지 않을 것()’이라고 했고, 노자의 말을 빌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드물다. 나란 존재가 귀하기 때문( )“이라고도 했다.
연암은 고독의 절정에서 익살을 부렸다.그러면서도 여유만만했다.
선사에 있었던 전설과 역사에 쓰인 사실로 미루어 인간은 이 망망한 천지 속에 절대적으로 버려진 미물의 존재가 아니라고. 연암은 애써 은 임금이 제위를 버리고 거리에 숨었다가 격앙가를 부르는 농부를 만났다는 이야기로부터 공자가 송나라서 쫓겨 다닐 때 저 뒤쪽에서 안자가 ‘선생님이 계신데 제가 어찌 감히 먼저 죽겠습니까?’ 하며 나타났던 사적을 예로 들었다.
..
서관을 나선 일행이 첨운패루와 지안문을 지나 다시 북경의 동북쪽 독직문에 다다랐을 때, 장복은 말등자를 잡고 흐느끼다가 다시 창대와 울며불며 이별했다. 그리고 문 열자 산을 보듯 이별론의 정곡을 찔렀다. 요컨대 사람이 살면서 가장 괴로운 것은 이별인데 이별 중에도 생병이 사별보다 슬픈 거라 했다. 하나는 살고 하나가 죽는 것은 순리의 이별이며, 순리를 따르는 것은 괴로움이 아니라는 논리를 상기시켰다.
..
‘나는 고삐를 늦추고 백하에 맡겼다. 무릎을 구부려 발을 안장 위에 모았다. 까닥하면 강물이라, 물로 땅 삼고 물로 옷 삼고 물로 몸과 마음 삼았다. 마음은 벌써 물속에 빠진지라 귓속에는 물소리가 없었다. 무릇 아홉 번이나 물을 건너도 마음은 탈 없이 마치 의자나 돗자리에 앉고 누운 듯 아무렇지 않았다.’
이에 앞서 연암은 물소리는 듣기에 따라 퉁소 소리, 산이 찢어지고 절벽이 무너지는 소리, 벼락이나 천둥소리, 찬물이 끓는 소리로 바뀐다며, 마음의 눈을 감은 자는 귀와 눈이 그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요컨대 문을 닫고 문밖의 소리를 들으며 사물에 비교하는 것은 곧 가슴속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 때 그 생각이 소리로 들린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우리나라 유학계 큰 스승 소강절()의 ‘사람을 본위로 삼고, 마음을 본체로 삼는()’심학의 영향으로 보인다. 그리고 연암은 심재()에 다스리지 않고 다만 귀와 눈에 신경 쓰는 자를 작은 총명이나 부리는 처세술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연암은 심재만을 절대 신봉하지 않았다. 넘실대는 물속, 그것도 코앞을 분간할 수 없는 삼경의 어둠을 말 타고 건너는 것은 소경의 도강이라 했다. 소경의 눈에 위기가 보이지 않으면 위기를 모른다는 현실의식이다. 그날 일기 한 대목은 현실적인 연암의 절대 의지였다.
‘내가 이밤, 이 강을 건넘은 천하의 모험이다. 그러나 나는 말을 믿고, 말은 제 발굽을 믿고, 말굽은 땅을 믿는다. ’
..
연암의 실학은 유가의 심학에 뿌리를 두었고 그 뿌리는 곧 천도와 인도는 바로 성실이요, 성실을 서둘지 않고 실행하는 사람이라야 성인임을 밝혔으니, 실학은 말과 행동, 사고와 학습 , 심과 물, 중과 외의 조화임을 알아야 한다.
..
자유의 극치는 연암의 작품에 구현되어 있다.,<일야구도하>에서 “물로 땅을 삼고 물로 옷을 삼고 물로 몸을 삼고 물로 마음을 삼으면.... 내 귓속에는 물소리가 없어진다.”함이나 <환희기>에서 천변만화의 마술을 충성 과 덕행을 가장한 역적이나 위선자에 비교했고, 요동벌에서 백탑을 조망할 때 이제까지 통상 알던 것처럼 사람의 감정은 슬플 때에만 울음이 터지는 것이 아니라 7가지 감정 그 어느 것이건 지극하면 울음이 북받친다는 ‘칠정개곡()’론 등 물아일체. 지정중리. 진환일여 현상은 사람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러 자유를 누릴 수 있음을 동의한 것이다.
연암은 고독을 극복하고 일탈과 함께 이렇게 자유를 갈망했다. 그것은 자유를 향한 구도이지 방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집시가 아니었다.
..
이재성이 연암의 영전에 바치는 제문이다. 연암이 가장 믿었던 처남의 글인 만큼 연암의 문학을 가장 정확하게 꿰뚫은 평가이리라. 역시 한 대목을 적는다.
‘우언은 궤변으로 세상을 농락한 것이고 우스갯소리는 실상이 아니요 거만하게 세상을 조롱한 것이다./중략/학문은 억지로 기이함을 추구하지 않았고 문장은 억지로 새로움을 좇지 아니했지요/사실에 충실하니 절로 기이하게 되고 깊은 경지에 나아가니 절로 새롭게 될 뿐.’
..
<열하일기>는 큰 강이나 큰 산에 비유할 수 있다. 그만큼 장쾌하다. 그런데 그 산은 단 하나의 산기슭이 아니요
, 단 한 줄기 강이 아니었다. 산 안에 산이 있고 강 안에 섬이 있듯 장편 연작을 방불케 했다.
비록 날짜별로 따로따로 이지만 실학이라는 보이지 않는 줄로 엮여 있다. 하지만 하루의 일기 속에도 난데없는 비약이나 돌출이 있다. 마치 산중의 산이나 물속의 섬처럼 말이다. 그 돌출이나 비약은 일기 속에 들어있는 단편.수필.논평.칼럼.르포.시화 등이다. 여기서는 물론 연암이 아예 <산장잡기>에 수록한 <야출고북구기>나 <일신수필>에 수록한 <북진묘기><산해관기>등 수필, 그리고 <호질전><허생전>같은 소설은 제외했다.
..
연암의 미덕은 아직도 많다. 그 순간적인 관찰은 사물을 꿰뚫었고 묘사는 구체적이고 섬세하다. 결코 설명을 지루하게 끌지 않았다. 달리는 역마 위에서 휘뚜루마뚜루 갈겨쓸지언정 문드러진 어휘를 덕지 덕지 내려놓지 않았다. 그리고 때로는 늘어지게 길었다. 길때는 장강처럼 도도율율 하다가 멈출 때는 무너지는 태산처럼 단호했다. 바로 능수능방했다.
.----
두 번 읽게 되었다. 부족하고 모자라는 사람이 되어서 그렇게 읽어도 쉽지 않다. 다음엔 짧게 엮어진 열하일기를 찾아 빌려보아야 할 것 같다. 언젠가 읽은 듯 하나 잊고 마는 습성으로 박지원을 열렬히 말씀하시니 필히 서너번은 읽어야 할 것 같다. 그것도 내게는 너무나 부족하여 어디에서도 또 그에 대해 논할 수 있을 것인지...
한자를 찾아 쓰지 않았음을..
'책 만권을 읽으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이병률/ (0) | 2013.06.21 |
---|---|
몽테뉴 수상록/몽테뉴/혜원출판사 (0) | 2013.06.15 |
강은교의 시에 전화하기/강은교/문학세계사 (0) | 2013.06.03 |
그리움이 나를 밀고 간다/헤르만 헤세/두행숙 옮김/ 이레 (0) | 2013.05.23 |
한시에서 배우는 마음 경영/홍상훈/도서출판 새빛 (0) | 2013.05.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