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살아지는 것이다.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사실은 언제, 어떻게 존재했는지도 기억되지 않은채 사라져 버린다. 사실 사람들에게 존재로 기억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꽃은 시들고 풀은 마르며, 떨어진 낙엽들은 바람에 날려 이리저리 날리다 잊혀질 뿐이다. 스티브잡스처럼 성공한 사람도, 케네디나 김대중, 법정 스님이나 장자도, 마릴린 먼로나 마이클 잭슨등 그 존재가 누구든 얼마나 위대한 삶을 살았든, 사실은 당신이나 나도 몇 년 후면 존재한지 모르게 사라질 뿐이다.
우리는 사실 행복감과 욕망이 주는 현실을 알고 있다. 분명하지는 않아도 막연하게 , 의식은 아니더라도 무의식은 느끼고 있다. 가끔씩 찾아오는 뜻 모를 공허함과 외로움, 만남과 술 취함 뒤의 허탈함과 쓰라린 속은 복되는 행복감의 장난에 대한 소극적 반응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허탈함을 없애기 위해 행복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더 행복감에 집착하고 그것으로부터 떨어지지 않으려 몸부림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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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여름 등 계절과 생로병사의 흐름, 모든 것이 변화이다.한 생명이 가면 한 생명이 오고, 밤이 가면 해가 든다. 우리의 시간은 변화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나눈 분류표에 숫자를 붙인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진정한 시간은 무엇일까?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이다. 시간은 항상 지금 이 순간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모든 것은 이 순간의 문제이다.
지금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지금 이외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그사람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면 결코 그 사람을 만날 수 없다. 다음은 없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에게 삶의 의미가 없다면 당신의 삶은 무의미한 것이다. 의미는 기다려 주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기다릴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기다릴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그를 만나든지 아니면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레비나스는 시간이 현재라는 사실에 만족하지 않는 것 같다. 그는 과거와 미래를 만들어 실질적인 시간을 구성하고자 했다. 그래서 시간을 관계론적으로 해석한다. 시간을 인간과 분리된, 독립된 흐름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나’와 ‘너’ 사이에 성립되는 일종의 관계로 본 것이다.
일단 현재를 보자. 현재는 항상 ‘나’의 시간이다. 왜 그런가? 나는 현재안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파악하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지금 이 순간 나는 무언가를 지각하고 해석하며, 분석하고 판단한다. 그리고 이해한다. 현재는 ‘나’의 시간, 주체의 시간이다. 이 현재의 시간에 존재하는 것은 ‘나’뿐이다. 그렇다면 과거는 무엇인가? 과거는 내가 존재하지만 내가 없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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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차원의 길
어떤 사람은 보이는 것만 보고,
어떤 사람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다.
어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어떤 사람은 보라고 하는 것만 본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본다.
당신이 바라보는 것이 당신이 된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
모두가 그렇다고 해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모두가 아니라도 해도
그런 것은 그런 것이다.
모두가 같은 곳에 살아도
모두가 함께 있지 않다.
모두가 길을 떠나지만
방향은 다 다르다.
겉은 겉이고 속은 속이다.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
인간은 평등하길 원하지 않는다.
사실 인간은 평등할 수 없다.
고래는 걸을 수 없고 , 사자는 날 수 없으며, 독수리는 헤엄칠 수 없다.
평등은 오래된 신화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만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살아있는 것은 침묵하고
죽은 것은 춤을 추는 법이다.
넓은 길은 길이 아니기에 넓고
좁은 길은 유일한 길이기에 좁다.
그래서 처음은 끝을 만나지 못하고
끝은 처음을 기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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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일이 아니다.‘이해한다’(understand)는 말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먼저 ‘내가 상대방의 밑에(under)에 선다(stand)’를 의미한다. 이 의미대로라면 나는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를 그 존재 자체로 받아들인다.
나는 그 누군가를 진정 이해한다. 반면 ‘이해하다’의 또 다른 의미는 ‘그가 내 밑(under)’서는 것(stand)’,즉 내가 상대방의 밑에 서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내 밑에 세우는 것’이다. 이 경우 나는 상대방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게 된다. 오히려 상대방을 내 임의대로 파악하고 규정한다. 그리고 그 존재로 하여금 나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하도록 강요하게 된다. 강제는 폭력이다. 따라서 나는 그 존재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이 되고 폭력을 통해 상대방은 자율성을 상실한 인간, 즉 노예 같은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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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당시 친구 가운데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호소하는 친구가 있는가? 그렇다면 성급하게 판단하고 조언하려 하지 마라. “그래! 힘든 것은 알아! 하지만 남겨진 가족을 생각해 봐! 그들이 당할 고통을 생각해보았니? 그리고 자살할 용기가 있으면 살아야지, 그냥 죽어버린다는 것은 어쩌면 비겁한 일이야! 다른 사람들을 봐! 너보다 더 힘든 사람들도 지금 그 끔찍한 어려움과 고통속에서도 저렇게 꿋꿋이 살아가고 있지않니!” 하지만 옳은 것이 언제나 바른 것은 아니다.
인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고장난 자동차처럼 부속만 갈아 끼우면 간단히 다시 달릴 수 없다. 인간은 충고가 아닌 이해받음을 원한다. 외로움 속에서 인간이 그리워하는 것은 사실 조언해 주는 누군가가 아니라 그런 자신의 외로움을 그대로 받아주는 존재이다. 솔직히 한 인간을 누가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겠는가? 나 자신조차도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존재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대화도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지금 많이 힘든가 보구나! 정말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 난 하지만 솔직히 너의 아픔을 진정 이해해 줄 수 없어! 네가 아닌데 내가 어떻게 너를 다 이해할 수 있겠니! 내가 널 이해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 거짓일거야. 그러니 난 어떤 조언도 너에게 함부로 해 줄 수가 없다. 단지 네가 원한다면 이렇게 네 옆에 항상 있어 줄 수 있어! 그리고 네가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 조용히 들어줄게!”
이해할 수 없음의 인정이 진정 이해할 수 있음의 시작일 수 있다. 누군가를 이해해 준다는 것은 그 존재를 소유하지 않는 것이다. 과거 백인들만 흑인노예를 소유한 것이 아니다. 백인들도 서로의 규정을 통해 서로를 소유한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도 지금 누군가를 소유하기 원한다. 문제는 그렇게 누군가를 소유하는 순간 관계가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관계에는 두 존재 이상이 필요하다. 홀로 인간관계를 만들 수는 없다. 그런데 내가 누군가를 소유하면 그 존재는 더 이상 인간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인간은 소유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건만이 소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내가 소유한 물건과 홀로 있게 된다. 그 존재와의 관계를 내 스스로 파괴한 것이다. 나아가 관계가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한 사실로 멈추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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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혼돈과 착각에 속아 거짓된 행복의 허상만을 파랑새로 알고 쫓아왔다. 이제 진정한 행복을 살 때가 되었다. 당신이 원하는 행복은 단순히 슬픔이나 고통스런 삶의 위로나 안식이 아니다. 고(苦)로 가득 찬 이 세상이 주는 집착으로부터의 자유만도 아니다. 당신은 마음속에서 샘솟듯 넘쳐흐르는 기쁨, 삶의 환희와 황홀을 원하고 있다. 순간적인 황홀감이 아니라 환희 자체를 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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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바라보는 것이 당신이 된다.”
10년전에 내가보던 것은 지금의 내가 보는 것이 아니다.
5년전에 내가 보던 것도 지금의 내가 보는 것이 아니다.
지금 내가 보는 것은 5년 후의 내가 보는 것이 될까?
.....
보고싶은 것만 보고 살고 싶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것까지 보여 탈이다.
모든 것이 보여도 보이려 하지 않으면 그런가보다 하고 말일이다.
함께 산길을 거닐고 싶은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러고 보니 친구에게 일이 있었다.
무소식이어서 좋지 않은 일이 있을까 걱정했다.
기다리니 소식이 날아왔다.
기다릴 일이다.
친구에게 그동안의 일들을 쏟아내니 친구가 등을 두드린다.
믿음이 부족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날더러 기도해 주란다.
마음이 큰 친구가 곁에 있어 감사하다.
큰 녀석이 방황을 한다. 학교를 다니고 싶지 않다고 한다.
사학년인데 .... 밤새 잠을 설쳤다. 나도 자신이 없다. 아이에게 어떤 조언을 해 주어야 할지
고민에 빠져 있다.
오래된 추억의 물건들을 정리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저마다 그 시절에 젖어 난리다.
나도 내 것을 찾아 추억에 젖어들었다.
그때 조금 더 용기를 가졌더라면, 늦어도 다른선택을 했다면,누군가 내게 각별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그러한 생각을 하지만 선뜻 어떤 모험도 괜찮고, 용기를 내보라고 나는 아이에게 얘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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