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송 詩

[스크랩] 안도현의 `첫눈 오는 날 만나자` 감상 / 권순진

다림영 2012. 12. 8.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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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오는 날 만나자/안도현-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어머니가 싸리 빗자루로 쓸어 놓은 눈길을 걸어

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골목을 지나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 발자국을 남기며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팔짱을 끼고 더러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가난한 아저씨가 연탄 화덕 앞에 쭈그리고 앉아

목장갑 낀 손으로 구워 놓은 군밤을

더러 사먹기도 하면서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 눈 내리는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리자

 

 

<감상>

 

 

 오늘 서울을 중심으로 중부지방에 내린 폭설이 첫눈은 아니다. 저녁 무렵엔 전국적으로 눈이 온다고 예보하고 있지만 텔

레비전에서 창경궁의 설경을 보도하며 자랑질(?) 할 때까지만 해도 이곳 대구는 뿌연 하늘에 눈 냄새가 실린 바람만이 조

짐을 알려줄 뿐 본격적인 강설을 가동하지는 않았다. 만약 눈이 온다면 이곳 대구로서는 첫눈이다. '첫눈 오는 날 만나

자'라는 말은 참 고전적인 낭만의 정서가 밴 말이다. 아직 그런 순수 낭만을 믿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시인은 '아직도 첫

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고 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사랑을 알고 평화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이 첫눈을 기다린

다.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어린 시절 눈은 순결과 신비, 설렘과 경탄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도시에서의 이

기와 약삭빠름에 젖다보면 감흥은 차츰 떨어지고 귀찮은 생각마저 든다. 나이를 먹는 자체가 서정이 낡아가는 것은 아닌

데 첫눈에 무덤덤해진다면 우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전히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

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래서 눈이 오면 누군가가 더 그립고 보고파져서 그 마음은 눈송이처럼 불어난다.

 

 그러나 그리움은 자꾸 쌓여 가는데 길은 막히고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아 근심으로 동당거린다. 첫눈은 저토록 서로

얼굴에 뺨 부비며 포근하게 내리는데, 첫눈을 맞을 채비는 다 되었고 강아지까지 미리 꼬리를 흔들고 있다. 정호승 시인

의 수필집 <첫 눈 오는 날>에도 같은 제목의 비슷한 내용이 있다. '나도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있다. 첫눈이 오는 날 돌다방

에서 만나자고. 첫눈이 오면 하루종일이라도 기다려서 꼭 만나야 한다고 약속한 적이 있다. 그리고 하루종일 기다렸다가

첫눈이 내린 밤거리를 밤늦게까지 팔짱을 끼고 걸어본 적이 있다.' 그렇듯 나도 밤새 서성거리며 첫눈을, 첫눈 같은 사람

을 기다리고 있다.

 

-권순진(시인)

출처 : 시와 글벗
글쓴이 : yangg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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