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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일곱살 적 물 난리

다림영 2011. 7. 29.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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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를 덮쳐버린 안양천 ..

 

하루라도 걷지 않으면 다리에 가시가 돋치는 나는 그 번개의 섬뜩함을 느끼며 폭우속의  벗나무 길을 걸었다.

비는정말  굉장했다.

 

 

 

 

78년 이었을 것이다. 안양에 큰 물난리가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 내가 있었다.  

 

난 그날 학기말 시험공부를 한다고 반에서 제일 늦게 나왔다. 아마 오후 서너시였을까..토요일이었나 싶다. 빗줄기 소리가 심상치 않아 더 앉아 공부하려다 일어섰다.  학교를 나서면서부터 빗줄기는 급작스럽게 커지기 시작했다.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우산을 들어야 소용도 없었고 신발 역시 제 구실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저 조금 큰 비이려거니 했던 것이다.  

 

얼마 내리지도 않은 것 같았는데  시내는 순식간에  물 바다가 되고 말았다.  거리의 버스들은 마치 배라도 되는 듯이 물살을 헤치며 다니고 있었다. 처음 만나는 상황에 입이 벌어져 그 황당함으로 눈을 크게 뜨고 거리를 구경했다. 그러나  역으로 가야 했던 나는 가방을 안고 우산을 들고 쏟아지는 빗속에서  걸음을 서둘러야 했다.

 

 전철은 어디에서 멈추었는지 이따금 한번씩 안내방송에서는 노력하고 있다는 얘기와 어느역이 물에 잠겼다는 소리만  흐르고 있었다.  족히  두시간은 기다렸을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발디딜 틈 없던 전철홈에 그냥 서 있을수만은 없었다. 나 또한 버스정거장으로 나서야 했다. 그러나  버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너 대 보이던 버스의 모습도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집으로 갈 수 없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시간은 급물살처럼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어느새 저녁은 찾아왔고 시내의 환하던 불빛은  철저한 약속이나 한듯이 모두 사라졌다. 정전이 되어버린 것이다.  여기저기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울려퍼졌고 칠흑같은 어둠은 순식간에 큰 도시를 장악해 버린것이다. 나는 잠시 길을 잃었다. 분명 시내 한가운데에  서 있었는데...  두려움이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아직도 그 때가 눈앞에 선하다.

천주교 앞이었을 것이다. 종아리까지 차오르던 물살은 허리로 차올랐고 순식간에 그 선을 넘어 가슴까지 다다랐다. 아마도 그 지대가 시내의 거리중 가장 낮은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정말 끔찍했다. 가방을 머리에 이고 우산은 버렸는지 들었는지 기억에 없고 누군가 비추는 불빛을 따라 피신을 해야 했다. 그 와중에도 좋은사람들은 자신을 생각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주저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수많은 혼란속에서도  세상이 건재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좋은 사람들의 따뜻한  손길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지금 , 아마도 화장품을 팔고 있는 그 가게 2층이다. 그때는  이름이 얼른 떠오르지 않는 ' 부기 타자'학원이었다. 우리학교학생들이 많이다녔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누군가 그곳으로 인도해서 몸을 피했다. 몇개의 촛불만이  컴컴한 실내를 밝혀줄 뿐이었고 열어놓은 창문으로 흘러들어오는 빗줄기의 세찬 소리와 그에 섞여 구분할 수 없는 사람들의 소리들만이 메아리지고 있었다.

 

물에빠진 생쥐의 몰골이란 표현은 딱 내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 상황에 열 일곱 소녀에게 누가 눈길을 줄까 싶었다.  물이 줄줄 흐르는 치마를 걷어올리고 신발을 벗어 양말을 벗고 한동안 넋을 놓고 촛불만 바라보고 있을 때, 귀에 익은 선생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안... 체육 선생님이었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학생들을 보호하려고  호루라기를 불며 '근명'을 외치며 찾아다니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허리이상을 넘는  물을 가르며 천주교 담장을 잡고 우리를 살피며 인도하던 선생님을 따라 나섰다. 화장실 물인지 하수도 물인지 빗물인지 그 어떤 물인지..... 그러나 그것이 무슨 문제일까 어찌 되었든 그곳을 벗어나야 했고 앞으로 걸어나가야 했다.

 

참담한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시멘트길도 갈라지고 언덕은 무너져 내렸고 학교 언덕길은 말이 아니었다.

 예닐곱명의 우리는  선생님 덕분으로 무사히 학교 서무실에 도착했고 어둠이 장악한 그곳은 촛불만이 타오르고 있었다. 두어명의 선생님이신지 서무실직원인지 우리의 등을 두드리며 반겨주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며 벽에 부딪칠때, 습하고 침울하던 공기는 우리를 한 가족같은 친밀하고 따뜻한 관계로 엮어주었다.

 

수건을 받아들고 그저 머리와 얼굴을 닦고 있는 우리들에게 선생님은 환한미소로 고함을 치시며, 누가 본다고 옷을 벗어 말리지 않느냐고 고함을 치셨다.

얼떨결에 한사람 두사람  겉옷을 벗어 널어 놓았다. 주저없이 속치마만 입고 있을 수 밖에 없었고 훌훌 날아갈 것만 같은 가벼움이란...

선생님은 우선 집에 전화를 하게 하셨다. 다행히 전화선은 끊기지 않았는지 집으로 학교에 무사히 있다는 얘길 전할 수 있었다. 그때의 전화기는 옆에 손잡이가 있었고 교환을 부르고 전화번호를 얘기하면 연결해주는 방식이었다.

라면냄새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저녁도 먹지 못했고 깊고 늦은 밤이었다. 우리에게 서무실의 누군가 라면을 끓여 주신것이다. 그 맛난 냄새라니....  젖은공기와 함께 어우러지며 얼마나 달콤했던지, 그 맛은 말로 형언 할 수 없는 꿈에서도 맛볼수 없는 기막힌 것이었다.

 

그날밤  한번도 같은 반을 해보지 않았던 낯선친구들과 무슨이야기를 했던지,  웃기도 하고 침울해지기도 하면서 이런저런 걱정으로 꼬박 밤을 새워야 했다.

 

 

 

 

 

그 다음날, 비는 천만다행으로 그쳤지만 모든 교통수단은 끊겼고 나는 집까지 걸어가야만 했다. 그때 집에서 시내까지의 거리는 버스로 한시간 가까이 소요되는 거리였다.

얼마를 걸었을까, 아득한 그 길을 나는 신을 신고 걸을 수가 없었다. 발이 아프고 신발은 무겁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맨발로 걷다가 발이 따가우면 신발을 신기를 거듭했다. 그날 동행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부곡의 안면이 있던 선후배들, 그리고 친구들이었다. 여자는 나 밖에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마디 얘기도 없이 그들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동네로 들어가기 전 냇물이 하나 있다. 크고 넓지 않았으나 도저히 혼자서는 건널수 없는 지경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아마도 그때 4H청년단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나보다 대여섯살정도 많은 남자들이었는데, 여러명이 냇물에  나와있었고, 외지에서 돌아오는 이들을 건네주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새끼줄로 허리를 엮어 냇물속에 서서   우리를 꼭 잡아 내川 를 건너게 해 주었다.

그 기막힌 물 난리 속에 나는 좋은사람들 덕분으로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무사히 집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위치가 낮았던 우리집 부엌에도 약간의 물이 들어왔는지 엄마는 부엌청소를 하고 있었고, 우여곡절 끝에 하루만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나는 그 피로함도 잊은채  안양시내의  굉장했던 그밤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때 안양은 우리나라 그 어느곳보다 피해가 컸던 것으로 알고  있다. 산 사태 때문에 많은 희생자가 있었다.

산본이 완전히 물에 잠긴 뉴스가  잊혀지지 않는다. 동네 전체가 물에 잠겼고 파란 지붕만 보였고 사람들은  손을 흔들며 구조를 요청했다. 그리고  박달동의 산 사태 , 희생자들, 무너진 집과 수재민 그리고 흙더미에 쓸려버린 논과 밭....

 

친척중에 산본에 사는 사람이 있었는데 물난리가 끝나고 집에 떡을 한보따리 싸들고 왔다.

설날에 먹는 긴 가래떡을 만들어 이고 온 것이다. 집에 물이 들어 쌀을 모두 떡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연탄은 모두 버리고, 볕에 말려도 쓸수 없는 가재도구들이 대부분이었다.

사실 그 정도의 피해는 사실 아무것도 아닌축에 들것이다. 엄청난 피해와 사망자가 있었으니....

 

 

우리 중학교가 수재민 임시수용소 였고, 우리는 시험을 보았는지 안보았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산에서 무너져내린 흙더미가  운동장을 손상시켰다. 그것을  복구하느라 전교생이 몇날며칠을 땀을 흘려야 했다. 농사짓는 친구들의 집에도 논의 벼를 세우러 가기도 했다. 수재민 돕기로  쌀을 편지봉투에 담아 내던 기억도 삼삼하다.

한동안 교실에서는 누구네 돼지가 떠내려 갔네, 자동차도 떠다니더라...  아이스크림 한박스가 떠내려가서 주워 먹었다는 둥 근거를 알수 없는 온갖 이야기를 나누던 소녀들의 얼굴이 스쳐간다.

 

 

 

자연재해는 세상이 제아무리 흘러도 사람힘으로 이길 수가 없나보다.

서울에 물난리가 난 것을 보고 있자니 그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가깝게 지내는 이가 서울의 양재동인가에서 오도가도 못하다가 차를 버리고 나왔다는 얘길 듣는다.

 

요즘 도통 어디에 정신을 놓고 사는지 모르겠다. 어느 한 곳에 정신이 팔려있는 나란 사람은  없는듯이 살고 있다. 그러나 그저 가족모두가 건강하고 가끔 웃을 수 있으면 되는것이려니 한다. 어떠한 꿈이 있다면 더말할 것도 없고...

 

또 다시 빗방울이 굵어지고 있다.  서둘러 집에 돌아가야 하겠다.

아까운 젊은희생자들이  있었다. 나의 큰 아이 또래였다. 참으로 참담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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