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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간이역에 서는 기차처럼/ 고미경
간이역에 와 닿는
기차처럼 봄비가 오네.
목을 빼고 오래도록 기다렸던
야윈 나무가 끝내는 눈시울 뜨거워져
몸마다 붉은 꽃망울 웅얼웅얼 터지네.
나무의 몸과 봄비의 몸은
한나절이 지나도록
깊은 포옹을 풀지 못하네.
어린순들의 연초록 발바닥까지
스며드는 따스함으로 그렇게
천천히, 세상은 부드러워져갔네.
숨가쁘게 달려만 가는 이들은
이런 사랑을 알지 못하리.
가슴 안쪽에 간이역 하나
세우지 못한 사람은
그 누군가의 봄비가 되지 못하리.
- 시집 『인질』(문학의전당.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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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역에 와 닿는 기차처럼’ 분답하지 않게 봄비가 왔다. 그러나 ‘목을 빼고 오래도록 기다렸던 야윈 나무’에게는 눈시울 뜨거운 감격이어서 오랫동안 ’깊은 포옹‘을 풀지 않고 있다. 침출수의 염려도 없지 않았지만 ’어린순들의 연초록 발바닥까지 스며드는 따스함으로 그렇게 천천히, 세상은 부드러워져갔다‘ 고정희 시인은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 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하고 봄비를 좋아했다. 그 자극들로 봄은 큰 보폭으로 성큼 다가왔다.
‘한 올 한 올 매화 꽃가지 붉은 색실이 풀리고 있고’(장옥관의 ‘봄비’) ‘뒷간 너머 개나리 꽃망울들이 노랗게 귀를 여는’(이정록 ’봄비 내린 뒤‘)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저기 저 시퍼런 탱자울 너머 꿈결인 듯 유유히 앞 강물도 풀릴’(고재종의 ’봄비 내리면) 것이며, ‘산에는 고사리밭이 넓어지고 고사리 그늘이 깊어’(문태준의 ‘봄비 맞는 두릅나무’)지겠다. 사방팔방 양지 음지 가리지 않고 조용히 내려 흙속의 꼬물거리는 것들을 다 적시고 지나갔다.
그렇게 젖은 것들은 모두 사랑이 되었다. 마음 속 솜털 같은 미세한 사랑의 싹에도 살포시 스며들어 새순을 움틔운다. ‘숨 가쁘게 달려만 가는 이들은 이런 사랑을 알지 못하리.’ 그 사랑은 요란과 북새통의 틈새에는 스며들지 못하리. 여유를 잃거나 기다림을 모르는 이에게는 다가서지 않으리. KTX만 고집하며 시계를 자주 들여다보는 사람보다는 간이역 추녀에 매달린 작고 조용한 빗방울에 느릿한 시선을 주는 사람에게 유효한 사랑. 급하고 빠른 것 다 먼저 가라 하고 간이역에 와 닿는 기차를 기다리는 이에게 봄비처럼 사랑은 찾아오고, 누군가의 봄비 같은 사랑이 되리.
ACT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