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아가면서 수행하는 많은 역할 중에는 자기에게 맞지 않는 것도 꽤 있을 것이요,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는 역인데도 하는 수 없이 맡아서 하는 사람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직업도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아닐까? 나는 자기 직업에 정말 만족해하는 사람을 별로 만나 보지를 못하였다. 다른 사람은 제쳐두고 나 자신도 내 직업이 적성에 맞는 것인지 자문해 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교단에 선 지 몇 달도 채 안되어 이 직업이 내게 맞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긴 것은 전혀 엉뚱한 데서였다.
지금은 세월이 좋아서 성적일람표를 컴퓨터가 만들어 주고 있지만 그때는 그것이 교사에게 가장 큰 일거리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이 성적일람표를 나는 단번에 만들 수 없었다. 이름을 쓰고 과목별 성적을 적어 나가는데 번호를 다섯 명 빼놓고 시작한다거나, 거의 완성됐다 싶으면 이번엔 잉크를 엎질러서 버려놓기 일쑤였다.
이렇게 수없이 실수를 되풀이한 뒤에야 한 장을 간신히 만들 수 있었기에 드디어 나는 교직이 나에게 부적합한 직업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던 내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차츰 적응해 간 것을 보면 사람에게는 정말 맞지 않는 직업은 없을지도 모른다고 감탄해 마지않게 된다.
가끔 나는 지금의 직업이 아닌 다른 직업을 가졌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해 본다. 누구에게든 그런 계기는 많든 적든 있게 마련이다. 나에게도 그런 기회가 몇 번 있었으나 오래도록 잊지 못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은 대학 3학년 때였다.
그 당시 연극에 꽤 심취해 있던 나는 큰 용기를 내어 연극반에 가입했다. 그때 그 연극반은 윌리엄 사로얀이라는 미국 작가의 희곡<혈거부족穴居部族>을 무대에 올릴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먼저 '책 읽기<대본 읽기>'가 시작되었다. 얼마후면 헐릴 낡은 건물에서 거지들기리 왕이니 왕비니 서로 부르면서 사는, 없는 자들의 생활을 서정적으로 그린 작품이었다.
그 연극의 중심 인물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왕이었다. 비록 거지이긴 했으나 왕다운 말투와 몸짓, 그리고 그 대사가 참 멋이 있엇다.희화적戱畵的인 내용 같지만 오히려 찡한 감동을 주는, 페이소스가 담긴 작품이었다. 나는 신참인 주제에 감히 이 연극의 히어로인 왕 역을 맡으리라 마음먹고 열심히 연습에 참가했다.
내가 왕 역의 대사를 읽을 때가 많았고 나는 그럴 때마다 그럴 듯하게 읽었다. 내 딴엔 내가 제일 잘 하는 것 같았다. 어리석게도 나는 내가 주역을, 아니 주역이 아니라도 좀 비중이 큰 역을 맡으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름 후 배역을 발표하는데 나는 아연실색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폐허를 철거하는 공사장 인부 중의 한 사람으로, 그것도 대사 한 마디 없이 망치를 들고 지나가는 남자 역이 내게 돌아온 배역이었던 것이다. 나는 기가 막혔다. 그걸 연극에 출연했다고 구경 올 친지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 실력을 몰라줄 수 없었다. 그때의 내 낙담, 실망, 연출자에 대한 원망, 배신감.... 이런것이 얼마나 컸었는지는 지금 잘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지금도 분명히 기억나는 것은 이튿날 당장 그 연극 연습에서 발을 끊은 사실이다.<내 평생 이렇게 과단성이 있는 행동은 전부후무했던 것 같다>
그 후 막을 올린 그 연극을 보러 갔더니 나 대신 다른 살마이 망치를 들고 무대를 지나가고 있엇다. 성공적인<?> 장면이었다. 나는 그때 웬일인지 가슴 한 구석으로 아린 통증 같은 것이 지나가는 걸 느꼇다. 내가 저 망치를 들고 지나갔어야 하는 건데...
왜 그런 생각이 그때 들었는지 나는 그 이유를 오랜 후에야 개닫게 되었다. 나는 그 일로 인하여 그토록 좋아했던 연극과 영영 거리가 멀어졌던 것이다. 그때 그 연극에 출연했던 인물들과 거기 관계했던 스태프들은 그 후 모두 우리나라 연극계, 방송계의 중진으로성장했다. 내가 망치를 들고 지나갔으면 나도 그들 중의 하나가 되었으리라.
그렇다.나는 그때 망치를 들고 지나갔어야 했다. 그랬으면 내 인생이 좀더 풍요로워졌을지도 모른다. 그랬으면 연극을 지금처럼 배신한 연인인 듯 씁쓰레하게 그리워하진 않았으리라.
오랜 후 내가 뒤늦게 깨달은 것은 모든 사람이 그런 단역으로 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대극작가 셰익스피어는 극장 손님들의 마차를 지키는 사람이었고 도쵸토미히데요시는 겨울철에 자기 상전의 신발을 품속에 넣어녹여 내 놓는 충직한 하인이었다.
그러니 인생은 도박이 아니다. 단역부터 출발하여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올라가는 것이 삶의 올바른 방식이요, 생의 보람은 그런 데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요즈음 젊은이들이 일확천금이나 벼락출세를 꿈구는 것을 보고 개탄하다가도 문득 내 젊은 시절으 어리석음이 떠올라서 낯이 붉어진다.
그래서 나는 가금 후배들에게 이야기한다. 망치를 들 일이 있으면 주저없이 들어야 한다고. 지나고 보면 그것이 자기에게 주어졌던 유일한 기회였을 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리고 하찮은 것일는지 몰라도 그 망치질이야말로 인생의 질곡을 깨트리고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는 도구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한국의 명수필 2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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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신문 에세이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그분이 누구인지는 잊었고 이러한 말씀이었다. 자신은 특별한 무엇이 되겠다 하는 큰 꿈은 사실 없었다. 그러나 그때 그때 주어진 일에 애정을 지니고 최선을 다했더니 시간이 흘러 무엇이 되어있었다....
목표를 정하고 그 길을 부지런히 가는 사람이 성공할 확률이 아무래도 높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소소한 일이라도 내게 주어진 일이라면 그 누구보다도 최선을 다하는 자세로 임한다면 분명히 자신도 모르는 사이 길은 길로 연결되고 어느 순간 고지에 올라 깃발을 꽂게 될 것이라고....
이 직업이 내게 맞는다고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다. 그저 아득히 내 꿈은 무엇이고 열심히 하지 않아 그곳에 가지 못했음을 후회했으며 다만 직업으로만 하는 수 없이 간신히 하루를 견디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날부터는 이러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이 주어지는 이 일로 인해 책과 좀더 가까이 지낼 수 있게 되었고 그로 하여 훗날에는 각별한 모습의 내가 되게 하는 그 길을 걷고 있는 것임을 새삼 돌아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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