귓속말로 전하는 지혜
"이 소금을 물에 담그고, 내일 아침에 와 보아라"
아들은 그대로 했다.
아침이 되자 아버지는 아들 슈웨따께뚜에게 말했다.
"네가 어젯밤에 담가 두었던 소금을 꺼내거라."
아들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소금을 찾을 수 없었다.
"총명한 아들아, 소금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소금은 그대로 그 안에 있다.
이제 맨 위 표면에 있는 물의 맛을 보거라.
"맛이 어떠냐?"
"짭니다"
"그럼 물속 중간쯤에 있는 물의 맛을 보아라"
"짭니다."
"그래 , 그 물을 버리고 다시 내게 오너라."
아버지 말씀에 따라 물을 버리면서 슈웨따께뚜는 생각했다.
'소금은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계속 그 안에 있었구나.'
"네가 그 존재를 볼 수는 없지만 그 존재는 여기 있는 것이다."
소금물의 핵심은 바로 그 소금이다. 그럼 사람의 핵심은 무엇일까. 바로 모습도, 소리도 , 흔적도 없는 아뜨만이다. 소금처럼
맛이 있다면 혀로 알 수 있겠지만, 아뜨만에 대해 우리의 감각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뜨만은 감각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마음을 비우고 아무런 잡념도 없는 순수한 상태가 될 수 있다면, 자신안에든 자기의 참모습인 아뜨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아뜨을 깨닫는 일은 정말이지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근원 존재가 소금물 속의
소금 알갱이처럼 해변의 모래 알갱이 같은 무수한 생명체 하나하나에 똑같이, 아무런 차이 없이 속속 깃들어 있다니.
변하는 것들로 된 세상
모든 것은 신<브라흐만>으로 덮여 있다.
그러니 인간이여
내버림의 지혜를 가져
어느 누구의 재물도 탐내지 말지어다
인간이여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며
백 년 살아갈 소망을 가질 지어다.
그대에게 이 길 말고
업보에 얽매이지 않을 다른 길이 없으리니
우리가 살고 있는 이세상이 환영과 같다고 해서 사실이 아니라거나 거짓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그것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킬 때
, 달이 아닌 손가락만 보고 있는 격이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 사는 시간이 영원에 비하면 잠깐
이기 때문에 환영과 같은 세상에서 자기 안에 있는 자기의 참모습, 근원과 통하는 자기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 잠깐 존재하든 좀 더 긴 시간 동안 존재하든, 우리에게는 자신의 귀한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무대라는 것이 중요하다.
마음과 다섯 감각들이 아뜨만에 고정되면
감각 기관들을 조정하던 지혜가 전혀 움직이지 않으니
이 상태를 최상의 단계라고 한다.
이처럼 감각들이 고정되어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단계에 이르게 하는 것을
요가 라고 부른다.
구도자는 조금의 자만심도 갖지 않는 경지에 이를 수 있나니
요가로서 마음의 내달림과 평온함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세나 스트레칭 같은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마음과 감각을 통제하는 것을 요가라고 한다. 요가라는 말은 원레 yuj<붙잡아매다>
라는 말에서 나왔다. 말을 몰고 가는 사람이 말고삐로 말을 통제하는 것처럼 마음을 한 곳에 붙잡아 매고 생각을 모두 붙잡아 맨다는
뜻이다.
그래서 여기저기 방황하거나 현혹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자기의 참모습이란 세상의 참모습이고 모든 생명의 근원이기 대문에, 이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인생을 사는 목적이다
목적을 달성한 사람은 다시 고통의 바다인 이세상에 태어나지도 않고 완전히 자유로운 행ㅂㄱ 속에서 내것 네것 따질 필요 없는
전체의식, 즉 생명의 근원 자체로 돌아가게 된다.
우파<upa>,는 가까이, 니ni는 아래로,샤드<sad>는 '앉는다'
-가깝게 아래로 내려 앉는다. 다시 말해서 아무에게 말하지 않는 비밀처럼 은밀하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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