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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서 봄으로 넘어오던 때, 사군자를 배웠다. 빨간 매화꽃을 그릴 기대가 컸는데 나뭇가지 그리는 것부터 시간이 걸렀다. 물 농도를 여러 번 맞춰보고 손끝을 세심하게 해 봐도 자꾸만 번지는 탓에 선 하나 긋기도 어려웠다.여러번 선을 망치던 내게 선생님께서 한마디 툭 던지셨다.
선이 번지는 이유는 물 농도가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내 손이 망설였기 때문이란다. 어려웠다. 역시 그냥 지나가기란. 지나쳐야 하는 순간을 지나가지 못하고 머무르는 탓에 남긴 번짐들이 떠올랐다.
어떤 번짐은 아름다운 문양으로 남기도 하겠지만 이렇게 선을 그어야 하는 명확한 일 안에서 생긴 번짐은 삶이란 화선지 위에 남긴 얼룩 일 뿐이었다.
지나쳐야 하는 당신에게 선을 그으려 머뭇거리는 동안 번져 버렸던 내 마음처럼 혹은 오래전 과거의 시간에서 지나오지 못하고 여전히 머물러 있는 미련처럼.
망친선으로 가득한 화선지를 구겨버리고 새 화선지를 펴고 다시 붓을 잡았다. 가만 선을 긋는다. 지나간다. 그래야 다음으로 가는 것. 선이 그려지고 나뭇가지가 완성되고 꽃도 채워진다.
망설이지 않고 지나가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당신을, 과거를.
골목을 걷다가 빌라뒤 회색벽에 빛나는 것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그곳에 꽃이 있었다. '돌아보니 그곳에 꽃' , 표현이 마음에 든다. 건물 뒤라 어두운 공간이었는데 스포트라이트가 비치듯이 꽃에게만 햇빛이 내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작지만 단단하게 도곧고 생생하게 어여쁘다. 시멘트 바닥에서 용케 활짝 핀 꽃에서는 지나칠 수 없을 만큼 빛이 났다.
그자리에 있어 빛나는 것이 있다. 넓은 화단에 있었다면 화려한 꽃들 사이에서 눈에 띄지 않았을 테고 테이블 위 곷병에 있었다면 금세 시들었겠지 . 아마. ..
어디에 서 있는지 분간하기 힘들 때, 발치에 있는 소박한 것이 일러주기도 한다. 그것들을 잘 관찰하는 일이 나를 관찰하는 일일지 모른다. 발치에 있던 꽃이 일러주는 이야기를, 아직 들을 수 있어 다행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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