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아껴야 안에 고이는 것이 있다
옛 전시 도록을 뒤적이는데, 추사의 대련 글씨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옆에 쓴 글씨의 사연이 재미있다.
유산酉山대형이 시에 너무 빠진지라, 이것으로 경계한다.
유산은 다산의 맏아들 정학연이다. 아버지가 강진으로 유배간뒤 그는 벼슬의 희망을 꺾었다. 다산은 폐족廢族이 된것에 절망하는 아들에게 학문에 더욱 힘쓸 것을 주문했지만, 그는 학문보다 사문에 더 마음을 쏟았다.
추사는 그와 막역한 벗이었다. 추사가 정학연에게 써준 시구는 이렇다.
구절을 얻더라도 내뱉지 말고
시 지어도 함부로 전하지 말게.
마음에 꼭 맞는 득의의 구절을 얻었더라도 꾹 참고 뱃속에만 간직하고, 흡족한 시를 지었다 해도 세상에 함부로 전하지 말라는 얘기다. 정색의 말이라면 들은 상대가 대단히 불쾌했을 테지만, 글시도 내용도 장난기가 다분하다. 샘솟듯 마르지 않는 정학연의 시쟤를 따라갈 수 없어 샘나서 이렇게 썼지 싶다. 농담처럼 건네는 말속에 은근히 뼈도 있다.
누구의 시인가 궁금해서 찾아보니, 소동파와 두보의 시에서 한구절씩 잘라내 잇댄 것이었다. 소동파는 이렇게 썼다.
시구얻고 차마 토하지 않음은
옛것좋아 내 뜻이 빠져서라네.
두보의 구절은 또 이렇다.
술을 보면 서로 생각나겠지마는
시 지어도 함부로 전하지 말게.
두 시에서 한 구절씩 다와 나란히 잇대어 붙이니, 전혀 다른 느낌의 한 짝이 되었다. 처음엔 글씨를 보고 획이 눈에 설어 위품일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구절을 찾고보니 추사 외에 누가 이렇게 맵시 나게 따올수 있을까 싶어 의심이 걷혔다. 더욱이 소동파의 시는 추사가 늘 곁에 두고 보던 [영련총화]에 실려있다.
여보게 유산! 시를 좀 아끼게나. 입이 근질근질해도 꾹 눌러 참을 때의 그 미묘한 맛을 알아야지. 짓는 시마다 세상에 내놓으면 안에 고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질 않겠나? 그 시 속에 담긴 자네의 속내가지 다 드러나니, 이건 안되네.
옛사람의 장난기에 웃다가, 언중유골의 그 서슬에 또 깜짝 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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