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박완서외40인의 마음에세이/21세기북스

다림영 2014. 11. 28.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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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길 홀로 걷기/김주영

 

가족이란 족쇄와 멍에로부터, 진부한 일상 속에 톱니바퀴처럼 서 있는 원망과 분노의 고단함으로부터, 전시의 야전병원처럼 소름끼치는 비명소리가 넘치는 생활의 주둔지를 벗어나기 위하여, 때로는 부질없고 혹은 질식할 것 같은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문득 알 수 없게 되었을 때를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아주 사소한 것만 기대하기 위하여, 오랫동안 먼 길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을 벌써 여러해째 반복하고 있다.

 

보부상들의 땀과 눈물, 그리고 민초들의 정한이 계곡과 산코숭이마다 서려 있는 문경새재의 옛길. 삽짝거리에서 낯선 행인을 만나도 멀뚱하게 쳐다보기만 할 뿐 짖을 줄을 모르는 산중 개들이 살고 있는 지리산 둘레길, 거친 파도가 가오리처럼 납작하게 엎드린 어부들의 작은 집 구들장 밑에까지 들락거리는 동해안의 해안도로, 바다, 그리고 그 거친 파도 수만 리를 한달음으로 달려온 바람이 가슴속에 켜켜이 쌓인 더러운 식은땀을 세척해주는 제주의 올레길과 고만고만한 오름들.......

 

산주름만 겹겹하여 아득하기만 한 첩첩산중 깊은 곳, 생기다 말았는지 생겼다가 사라져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는 우중충한 산골마을 들머리에 허물어져 가는 돌담, 그 돌담 아래 차가운 가을 기운에 하얗게 질린 채 피어 있는 민들레 한 송이, 하잘 것이 없다고 여기는 그 들꽃 한 송이를 처연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한다. 콧등이 땅에 스칠 듯 하염없이 늙은 노파가 작은 마당에서 혼자 깨를 털고 있다가 말 걸어주는 길손이 고마워 식은 파전 한 접시를 내놓는다. 공짜로 내주는 파전을 한입 베어 물다가 문득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나 눈시울을 붉힌다.

 

기다리는 버스의 경적 대신 뒷산 뻐꾸기 울음소리만 휑하게 뚫린 마을 한길을 주섬주섬 달려나가는 조그만 면소재지. 그런 짧은 치마로 과도하게 드러난 허벅지 살을 가리기에는 어렵게 보이는 김 마담이 내온 달고 단 커피 한 잔이 풀어주는 여정의 피로. 아침 햇살이 작살처럼 반사되는 어촌 식당 앞마당, 예리한 호비칼로 내장을 몽땅 도려냈는데도 빙판에 낙상이라도 하듯 척추를 뒤척여 곤두박질을 멈추지 않는 활어의 몸부림으로부터 발견하는 소름끼치는 생명력. 선착장 한쪽에 쌓아둔 그물 더미에서 겨울 양미리를 뜯어내고 있는 어촌계 아줌마들의 멈출줄 모르는 수다에서 저절로 얻어내는 넉넉함. 제주 올레길에선 지금까지 16코스를 개척한 서명숙씨와 그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눈썰미.

 

진달래가 필 때는 수리부엉이의 번식기이고, 야생화인 과불주머니에는 노린내가 난다. 복수곷은 산기슭의 눈 속에서 꽃을 피우고, 얼른 보면 자두꽃은 벚꽃처럼 생겼고, 쇠뜨기는 옥수수처럼 생겼다. 거미들이 처음 집을 지으려 할 때는 나뭇가지 사이를 지나는 바람에 의존한다는 것. 바닷가 인적 없는 갈대밭으로 들어가면, 갑자기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갈대를 어지럽힌다. 그러나 그것은 바람이 아니라 갈대를 먹기 위해 줄기에 매달려 있던 게들이 인기척에 놀라 갯벌로 도망하는 소리였다. 오징어에 붙어 있는 긴 두 다리는 짝짓기 할 때 암컷을 힘껏 껴안는 도구 란 것도 그 모두가 걷는 길에서 터득하고 섭취한 보석과 같은 자연의 오묘한 섭리들이었다. 넓은 길이든 좁은 길이든 걷기 여행의 회로 속에는 그곳을 스쳐간 길손들이 떨어뜨린 정한들이 쏟아버린 진주처럼 흩어져 있다.

 

걷는 일은 표류하는 작은 선박과 같다. 쉬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바람에 부대끼며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음을 뜻함이다. 걷는 일에는 속도에 대한 전제가 없기 때문에 아뿔싸 하고 지나치거나, 잃어버리거나, 잊혀지는 것이 없고, 삭제의 어려움이나 아쉬움을 겪지 않아서 좋다. 잃지 않았고 삭제되지 않았으니, 사람과 사물들을 곱씹어볼 수 있어 사유는 더욱 알차고 영속적이다.

 

걷는 일이란 , 낡은 기록들을 떠올리게 하며, 혹은 고독과 추억들에 담금질당하며 진정한 혼자로서의 자신의 됨됨이를 점검하는 기회를 만들어준다. 다급해할 까닭이 없고, 호들갑 떨 필요 없으니 기죽을 필요도 없다. 그래서 걷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곧잘 혼자 걸을 것을 권유하곤 한다.

 

올레길은 성산 포구가 있는 제주도의 동쪽에서부터 촘촘하게 굴곡진 해안선을 가파르게 밟으며 제주도의 서북쪽까지 이어진 코스로 구성되어 있다. 전 코스를 걷자면 쉼없이 걸어도 열흘을 훌쩍 넘기게 된다. 그러나 계속 부챗살처럼 퍼지는 바다 위의 햇살에 전신을 노출시키고, 쉼 없이 불어오는 해풍에 가슴속을 빗질당하며 걷는 황홀함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나는 발견한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슴속이 더부룩할 정도로 끼어 있었던 어둡고 악취나는 진상들. 나의 내부에서 꿈틀거리던 갖가지 소름끼치는 격정들, 혹은 자포자기와 불길함, 과장과 두려움과 왜곡으로 덧칠된 생활, 너울거리거나 뒤틀림과 같이 삶을 짓누르고 있는 중력으로부터 한발 한발 멀어지는 뚜렷한 정화의 징후들을 발견할 수 있다. 바람이 빗질해주는 그 정화가 걷는 일로부터 나를 멈추지 못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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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둘이서 올레 길을 다녀온 적이 있다. 이제껏 그렇게 근사한 길을 걸어본 적이 없었다. 몇 년이 지났지만 그 단 하루를 떠올려도 나는 행복해진다.

 

걷다보면 마음에 쌓인 근심걱정들은 조각이 나고 흩어지며 사라진다. 몸에도 좋은 걷기가 마음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무거운 걸음으로 나서도 돌아올 때는 환해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으니 걷기란 힘이 남아 있을 그 나이까지 부지런히 행해야 할 것이다.

사실 오늘도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너무나 화가 나고 끔찍하기도 한 일이다.(물리치료 받다가 화상을 입음) 그러나 이런 일도 길을 나서면서 아무렇지 않은 일로 받아들이게 된다.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일 .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일을 가지고 안고 있어보아야 나 자신만 무거워 바닥에 주저앉게 될 것이다. 그저 일이 생기면 옷 하나 챙겨 입고 밖으로 나설 일이다. 어디든 풍경이 고요한 곳이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무작정 걷다보면 풍경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세상시름은 달아나 버리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아름다운 때가 어디 있을까. 걷다보면 그런 아름다운 이들의 모습을 만날 때가 있다. 나도 그런 이들처럼 언제 어디서든 어울리는 환한 이가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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