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을 구하고 화를 피하는 것은 복은 기쁘고 화는 슬프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지만 우리의 욕망을 채워주는 물질은 유한하니, 이 때문에 좋아하고 싫어함을 나누느라고 마음속에서 싸움을 벌이고, 버리고 취하는 선택이 교차한다. 그렇다면 언제나 기뻐하는 사람은 적고 슬퍼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니, 이를 일러서 화를 구하고 복을 물리친다고 말한다. 무릇 화를 구하고 복을 물리치는 것이 어찌 인지상정이겠는가?
이처럼 사람들이 복을 받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하는 것은 오히려 화를 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들은 통상 일 속에 있을 뿐이지 일 밖으로 벗어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일 속에 있으므로 눈앞의 사물이 진실로 중요하다. 하지만 일 밖으로 벗어나면 중대하다고 여긴 일도 사실은 아주 평범한 것임을 발견할 수 있다.
불행한 것은 자기 자신이 일속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점이고, 이 때문에 세상에는 아름다움과 추함이 멋대로 생겨나면서 근심과 즐거움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일 밖으로 벗어난 사람은 어지러운 인간사를 초월하여 지속적인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초연대’라는 이름의 뜻이다.
소동파의 이 글은 선미가 아주 풍부하다. <육조 단경>의 <반야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범부가 곧 부처이고, 번뇌가 곧 보리이다. 앞생각을 미혹하면 곧 범부이고, 뒷생을 깨달으면 바로 부처이다. 앞생각이 경계에 집착하면 곧 번뇌이고 뒷생각이 경계를 여의면 곧 보리이다.”
번뇌는 중생의 미혹이고 , 보리는 부처의 맑고 밝은 지혜이다. 번뇌는 경계에 집착하는 데서 일어나니, 바로 외물의 인연 화합에 대한 집착이다. 보리는 경계를 여의는 데서 이루어지니, 바로 ‘초연’해서 외물에 집착하지 않음이다. 집착이 바로 미혹이니, 이것이 범부의 경계이다. 집착하지 않음이 바로 깨달음이니, 하나의 깨달음이 문득 부처를 이룰 수 있다. 이 집착하지 않음이 바로 깨달음이니, 하나의 깨달음이 문득 부처를 이를 수 있다. 이 집착하지 않음이 소동파의 일관된 태도이다. -“누가 가난한 자인가? 누가 부자인가? 누가 아름다운 자인가? 누가 추한 자인가?”
담백한 술도 사람을 취하게 할 수 있고 풀과 나무도 배를 부르게 할 수 있다. 만물을 담담하고 고요한 마음으로 보면 모두 다를 바가 없다. 선종의 경전 중의 하나인 <유마경>에서는 일체의 사물은 생겨남과 소멸함이 별개의 둘이 아니고, 자기와 타자가 별개의 둘이 아니고, 더러움과 청정함이 별개의 둘이 아니고, 선과 악이 별개의 둘이 아니고, 밝음과 밟지 않음이 별개의 둘이 아니고, 색과 공이 별개의 둘이 아니고, 말함과 침묵함이 별개의 둘이 아니고, 작고 큼이 별개의 둘이 아니라고 한다.
차이가 너무나 크고 심지어 서로 대립되는 이 모든 것이 별개의 둘이 아니니, 이것이 바로 불교의 불이법문이다. 선 수행자는 바로 사물의 갖가지 분별을 타파한 불이문에 들어가서 경계를 여의여야 비로소 부처의 청정한 안락에 이를 수 있다. 선종의 세 번째 조사 승찬은 신심명에서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다만 고르고 선택하는 것만을 피하라”고 했는데, 소동파는 구기자와 감국을 먹으면서도 엿처럼 달게 여겼고 정사를 보면서도 백성과 함께 즐겼으니 , 불이문에 담긴 뜻을 체득하여 도의 경계에 접근했다고 할 수 있다."- 소동파/스야후이..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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