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서 배우다

토굴사관(土窟四關)

다림영 2014. 7. 8.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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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72

정민의 世設新語

 

이덕리(李德履 .1728~)1776년 정조 즉위 직후 진도에 유배왔다. 불과 두 해 전 종2품 오위장(五衛將)의 신분으로 창경궁 수비의 총책임을 맡았던 그는 결국 진도 유배지에서 근 20년 가가운 유배 생활 끝에 비운의 생을 마친듯하다.

 

그의 시문집 강심(江心)’에 실솔부(. . 賦)‘, 귀뚜라미의 노래란 작품이 있다. 그는 진도 통정리(桶井里)의 귀양지에서 거북 등처럼 갈라진 흙벽 틈에서 밤낮 우는 귀뚜라미 소리를 들었다. 그 절망의 시간을 그는 이렇게 토로했다. “마음이 꺾이고 뜻이 무너지자 멍하니 식은 재 위에 오줌을 눈 것처럼 다시는 더운 기운이 없었다. 또 어찌 능히 귀뚜라미가 혼자 울다 혼자 그치면서 스스로 그 즐거움을 즐기는 것만 같겠는가?”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절망의 나락속에 밀어 넣는 대신 그 골방 안에서 국방 시스템에 관한 놀라운 제안을 담은 상두지(桑土志)’를 저술했고, 그 재원 마련을 위해 중국과의 차무역 구상을 제시한 동다기(東茶記)’를 지었다. 다산은 그의 저술을 보고 놀라 자신의 경세유표에 인용했고, 초의는 동다송동다기를 끌어와 자기 주장의 근거로 내세웠다. 다산의 19년 유배 못지않게 이덕리의 긴 유배도 빛저운 성과를 남겼다.

 

금번에 국빈방문을 하는 시진핑(習近平)중국 국가주석의 토굴사관(土窟四關)기사가 인상적이다. 부총리의 장남으로 베이징도련님이었던 그는 부친의 갑작스러운 실각으로 16세때 황토 고원의 양자허(梁家河)토굴로 쫓겨가 7년간 살았다. 귀하게만 자란 여드름투성이의 소년이 토굴 생활에서 넘어야 햇던 네 가지 관문은 벼룩과의 사투, 거친 잡곡밥, 고된 작업량,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사상개조등이었다고 그는 뒤에 술회했다.

 

20여년 뒤 그곳을 다시 찾아 당시 주민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 속의 표정에는 역경을 이겨낸 사람의 깊이와 자신감이 느껴진다. 못 견딜 가혹한 시련도 어떤 사람에게는 그저 좌절과 절망의 시간이 아닌 창조와 향상의 시간이 된다.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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