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一事一言 6월 25일
드라마와 예능으로 점철된 우리의 TV편성과 달리, 독일 TV엔 정말 따분해 보이는 토론 프로그램이 채널들을 채우고 있었다. 독일인은 왜 저렇게 토론을 좋아할까 하는 궁금증이 일어 그들의 몸짓을 관찰했다.
그들의 토론문화와 우리의 토론 문화 사이의 놀라운 차이점이 드러났다. 그 차이는 뜻밖의 감동으로 다가왔다.
우리나라 시사토론에선 서로 말을 마구 잘라먹는 모습을 흔히 본다. 서로 잡아 먹을 듯 노려보면서 ‘당신과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증오와 원한의 기운을 붐어내기도 한다. 독일의 토론에서는 그런 살벌한 풍경을 볼 수가 없엇다. 첨예한 사안을 놓고도 서로 눈 한 번 흘리지 않았다. 남의 말을 끝까지 다 듣고 난 후에야 자기 ㅁ라을 시작했다. 열띤 토론이었지만 결코 서로를 열 받게 하지 않았다.
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듣는 방식이 우리와 달랐던 것이다. 학교 수업에서도 말하기-듣기-쓰기-읽기 중에 가장 어려운 것이 ‘듣기’임을 새삼 깨닫곤 한다. 발표 수업을 하면 다른 아이가 발표를 할 때 그 발표를 듣지 않는 아이가 많다. 남의 이야기를 듣는 대신 자기 발표 준비에 몰두하는 것이다.
수업내내 자기 발언만 준비하고 결국 자기 말만 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깊은 충격을 받았다. 누가 이 아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가. 훌륭한 언어 교육이란 ‘남보다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타인의 말을 듣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말하기와 글쓰기 기술을 가르치는 이는 많지만, 타인의 말뜻 곱씹어보기, 타인의 말에 공감하고 추임새 넣어주기를 가르치는 이는 없다.
말을 칼이나 창 삼아 휘두르지 않고 이해와 공감의 도구로 쓰이게 하는 기술 말이다.
독일의 토론 문화가 장수하는 비결은 바로 존중의 기술이었다. “나의 정치적 자유는 나의 반대파의 정치적 자유다”라는 선언으로 유명한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의 목마른 꿈이 적어도 독일의 토론에서는 실현되고 있다.
타인의 발언권을 수호함으로써 결국 자신의 발언권을 지키는 지혜로움. 진정한 소통의 최고봉은 표현의 기술이 아니라 존중의 기술에 있다.
정여울.‘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 저자’.문학평론가
'신문에서 배우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물 간 티키타카? 그것부터 배워야 (0) | 2014.07.05 |
---|---|
말이 흉기다 (0) | 2014.07.02 |
'지금 여기’를 산다는 것 (0) | 2014.06.26 |
무신론자도 좋아하는 성경구절 (0) | 2014.06.19 |
작정산밀(斫正刪密) (0) | 2014.06.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