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은 불우한 자신을 되돌아보고 후세에 경계하기 위해 <심문천답>을썼다.
“마음心은 일찍이 하늘의 명령을 받들어 성誠과 경敬을 갑옷으로 의義와 용勇을 창으로 삼아 악과 불의에 맞서 싸웠다. 그래서 심에게 순종하는 자는 선인이고 심을 배반하는 자는 악인이며 현명하고 지혜로운 자는 자기를 따르고 어리석고 못난 사람은 자기를 거역하게 된다고 전파하고 다녔다. 그러나 현실의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오히려 배반한 자는 장수하고 그의 말에 순종한 자는 요절하며 그의 말을 좇는 자는 빈궁하고 거역하는 자는 부귀하였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신이 하는 일을 탓하여 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오직 적을 따를 뿐이었다. 상제가 진실로 백성을 주재하시는데 어찌하여 시작과 끝이 어긋나며, 어찌하여 주고 빼앗는 것이 편파적입니까.“
이에 대해 하늘이 대답한다.
“하늘은 인의와 도덕을 낳지만 그것을 성장시키는 것은 사람의 몫이지 하늘의 몫이 아니다. 사람이 가만히 앉아 있는데 인의 도덕이 저절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p46
태조실록은 정도전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매우 비겁한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정도전이 도망하여 그 이웃의 전 판사 민부의 집으로 들어가니 민부가 아뢰었다. ‘배가 불룩한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습니다.’
정안군은 그 사람이 도전인 줄을 알고 이에 자기집 하인인 소근등 4인을 시켜 잡게 하였다. 침실 안에 숨어 있는 정도전을 꾸짖어 밖으로 나오게 하니 도전이 자그마한 칼을 가지고 걸음을 걷지 못하고 엉금엉금 기어서 나왔다. 소근 등이 꾸짖어 칼을 버리게 하니 도전이 칼을 던지고 문 밖에 나와서 말하였다.
‘청하건대 죽이지 마시오. 한마디 말하고 죽겠습니다.’
소근등이 끌어내어 정안군의 말 앞으로 가니 도전이 말하였다.
‘예전에 공이 이미 나를 살렸으니 지금도 또한 살려주소서.’
정안군이 말하였다.
‘네가 조선의 봉화백이 되었는데도 도리어 부족하게 여기느냐?
어떻게 악한 짓을 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느냐? 하며 그를 목 베게 하였다.“
..
실록은 승자의 기록이다. 태종 이방원 측의 입장에서는 정도전이 비참해지면 비참해질수록 쿠테타의 당위성이 커진다는 측면을 감안 할 때 우리는 남은 사료의 행간을 읽는 지혜가 필요하다. 오히려 그가 참수당하기 직전 읊은 것으로 전해지는 <자조自嘲 >라는 제목의 시는 사대부로서 그가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못다이룬 개혁의 꿈을 아쉬워하는 처연함만이 배어 있다.
양조(고려와 조선조)에 한결같은 마음으로 공력을 다 기울여
서책에 담긴 성현의 참교훈을 버리지 않고 떳떳이 살아왔소
삼십년 긴 세월 온갖 고난 다 겪으면서 쉬지 않고 이룩한 공업
송현방 정자에서 한 잔 술 나누는 사이 다 허사가 되었구나.p45
“신이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과감하게 말하여 숨기지 않는 것은 신하의 굳센 절개요, 너그러이 용납하여 어기지 않는 것은 임금의 훌륭한 덕입니다. 그러므로 언책에 있는 신하의 말이 비록 과하다 하더라도 반드시 너그러이 용납해야 하는 이유가 두 가지입니다. 오늘에 만일 지나친 말이라 하여 죄를 주면 내일 곧은 말을 드리는 자가 반드시 두려워하고 꺼려서 감히 진언하지 못할 것이니 언로를 막는 것이 한가지입니다. 또 그 말 자체는 비록 과하다 하더라도 그 마음은 곧 왕실을 위해 충성을 바친것이니 아부하고 아첨하여 종실을 저버리고 자신의 이익을 꾀하려는 자와는 다른 것이니 너그러이 용납하여 앞으로 오는 일에 모범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두 번째 이유입니다. p101
<경제문감>에서 그는 재상의 자질과 소임을 크게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하는 것 . 군주를 바르게 하는 것, 인재를 잘 가려서 스는 것,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는 것 의 네가지로 구분한다. 구체적으로 재상은 다음과 같아야 한다고 쓰고 있다.
.군주의 옳은 일은 적극적으로 받들고 옳지 않은 일은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뜻을 바꾸게 함으로써 왕을 바르게 인도한다.
.재상은 공과 은혜를 군주에게 돌려서 인심이 군주를 따르게 해야 한다. 재상은 지성과 성의로써 임금을 섬겨야 한다. 신하가 자기를 드러내서는 안된다.
.군주나 신하의 잘못은 초기에 바로잡아야 한다. 때가 늦으면 바로잡기가 어렵고 도리어 화를 가져올 우려가 있다.
.재상은 항상 부지런하고 근심하고 삼가고 두려워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재상은 추호의 사심을 버리고 공심 으로서 현자를 등용하고 어리석은 자를 몰아내야 한다. 천하의 인재를 널리 구해야 하며 항상 천하의 일을 자기 혼자의 재능만으로 처리할 생각을 하지 말고 천하 인재의 지혜를 모아서 다스린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재상은 도량이 넓으면서도 세밀해야 한다. 그래야 많은 관리들을 능숙하게 총괄할 수 있고 그래야만 서로 다른 의견을 포용할 수 있다.
.재상의 임기는 길어야 한다. 임기가 짧으면 자기의 재능을 충분히 펼칠 수 없기 때문이다.
.재상은 물러갈 때라고 생각되면 용감하게 물러날 줄 알아야 한다. p133
“임금이 대궐에 앉아 있다 해서 편안함만 알 것이 아니라 곤궁하게 지내는 선비들과 만백성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춘추에 ‘백성을 중히 여기고 토목공사를 삼가라’ 했으니 이것이 어찌 임금된 자가 백성을 괴롭혀 임금에게 봉사만 하라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정도전은<시경>과 <서경>등 중국 고전에서 아름다운 글귀를 따고 왕실과 백성의 평안을 기원하는 의미를 부여하여 각 건물들의 이름을 지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정사를 처리하는 전각을 근정전 이라 하고 그 문을 근정문 이라고 하였다. 근정전이라고 작명한 이유이다.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모사면 폐하게 되는 것이 필연의 이치입니다. 작은 일도 그러하온데 하물며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같은 큰일은 또 어떠하겠습니까? <서경>에 말하기를 ‘경계하면 걱정이 없고 법도를 잃지 않는다’ ‘편안히 노는 자로 하여금 나라를 가지지 못하게 하라. 아침부터 날이 기울어질 때까지 밥 먹을 시간을 갖지 못할 정도로 업무에 정진하여 만백성을 다 즐겁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임금이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음이 이러하니 편안히 쉬기를 오래하면 교만하고 안일한 마음이 쉽게 생기게 됩니다.p177
정도전과 태조와의 관계는 정말 독특하다. 일곱 살의 나이 차이가 있지만 어쩌면 친구요 혁명동지로서 두 사람 외에는 알수 없는 끈끈함이 있었던 듯하다. 정도전이 태조를 존경하고 섬기듯이 태조 또한 정도전을 신임하고 그의 정책을 밀어주었다. 태조는 경우에 따라서 정도전을 신하라기보다는 수평적 동지나 친구처럼 대하기도 했다.
이성계는 정도전을 동북면도선무사로 떠나보낸 지 보름 만에 그에게 옷과 술을 보내면서 편지도 함께 넣었다. 이 편지에서 우리는 정도전에 대한 이 성계의 정을 유추해볼 수 있다. 태조실록 7년 2월 4일자의 기록이다.
“헤어진 지 오래되어 (겨우 보름밖에 안 지났는데 말이다)그리운 생각이 더욱 간절한다. 신하 중추를 보내서 객고를 물으려고 하던 차에 마침 최긍이 와서 안부를 알게 되어 적이 위로가 된다. 찬바람이나 막게 솜옷 한 가지를 보내니 받아주기 바란다. 그리워하는 내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나머지 이야기는 신하 중추에게서 들으라. 봄 추위를 맞아 몸을 조심하고 변경의 일을 잘 마무리지어야 하겠다. 더 적지 않는다. 송헌거사 쓰다.“
이편지에서 태조는 자신을 송헌거사라고 쓰고 있다. 임금은 ‘내가 봉화백(정도전)에게 거사라는 칭호로 편지를 하고 싶은데 별호를 무엇이라고 하면 좋겠는가’라고 하니 좌승지 이문화가 대답하기를 왕위에 오르기 전에 거처하던 처소의 이름이 어떻습니까‘라고 하였다. 임금이 좋다고 하고는 곧 송헌이라고 별호를 칭하였다. 임금이 신하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거사‘라는 별호를 쓴다는 것은 대단한 파격이다. p306
정도전은 군사문제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었다. 스스로 병서를 짓고 진법을 만들어 군사를 훈련시킬 정도였다. 세종 때 변계량은 조선초 3대 진법으로 꼽힌 전도전, 이제현, 하륜의 진법 중 정도전의 진법이 가장 뛰어나며, 공격과 수비에 대한 정도전의 전술은 다른 사람이 감히 미치지 못한다고 평하였다. 정도전은 <진법>이외에도 <오행 진출기도>와 <강무도>라는 병법이론서를 지어 왕에게 바쳤다. p334
1395년 1월24일 정도전이 정총과 함께 <고려사>를 지어 바치자 이성계가 이를 치하하며 정도전에게 내린 글이다.
“경의 학문은 경서와 역사의 깊은 문제에까지 파고들어갔고, 지식은 고금의 변천을 꿰뚫고 있으며, 공정한 의견은 모두 성인들의 말에서 출발하고, 명확한 평가는 언제나 충실한 것과 간사한 것을 갈라놓았다. 나를 도와 새 왕조를 세우는 데 공로가 있을 뿐 아니라 좋은 계책은 정치와 교화를 시행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하고 뛰어난 글재주는 문학관계의 일을 맡길 만하다. 게다가 온순한 선비의 기상과 늠름한 재상의 풍채를 가지고 있다. 왕위에 오른 첫날부터 경이 유용한 학식을 갖고 있어 재상으로 임명하고 또한 역사를 맡은 관직까지 겸임하게 하였더니 재상의 직책을 다하면서도 책을 만드는 데서까지 업적을 나타내었다”고 칭찬하였다.p366
이색은 한때 자신의 제자였으나 역성혁명 과정에서 서로 원수가 된 정도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벼슬에 나가면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하고 어떤 일을 당해서도 회피할 줄 몰랐으니 옛날의 군자도 정도전과 같은 사람은 많지않다. 하물며 지금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것이 내가 그를 존경하고 또 존경하는 까닭이다.”
세조 때 신숙주는 “개국초에 무릇 나라의 큰일은 모두 선생이 만들었으며 당시 영웅호걸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으나 그분과 비교할 만한 이가 없었다”고 격찬하였다. 심지어 태종 때 편찬된 태조실록에서도 개국초기 그의 업적에 대해서만큼은 “그의 힘으로 도울 수 있는 데까지 힘쓰지 않은 것이 없어서 결국 큰일을 이루게 된 만큼 정말 으뜸가는 공신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명종때에 경복궁을 중수하고 난 후 공조판서 홍섬에게 경복궁 중수기를 지으라고 하니 홍섬이 이를 사양하면서 올린 글이다.
“선수도감이 신을 시켜 경복궁을 중수한 일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의 사실을 기록하도록 청했습니다. 우리 태조께서 당초에 이 궁걸을 창건하시고서 전각의 명칭과 창건한 시말을 모두 정도전을 시켜 기록하게 하였는데 지금까지 <여지승람>에 실리어 후세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대개 정도전의 문장이 법도에 맞고 아담하면서도 정밀하고 고와 그 당시에 그보다 나은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신과 같은 사람이 어찌 자신의 능력을 헤아려보지도 않고서 뻔뻔스럽게 흉내를 내겠습니까. 보는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받을 뿐 아니라 또한 국가의 체통을 손상하게 될 것입니다.”(1544년 명종실록 9년 11월 24일)p368
정도전은 외교무대나 격변의 정치무대에서 살아가기 위해 정치가에게 반드시 필요한 설득력도 뛰어났다.
“시서를 강의할 때에는 알기 쉬운 말로 지극한 이치를 형용하여 배우는 자가 한 번 들으면 바로 의 를 깨달았으며, 이단을 물리칠 때에 는 그 글에 정통하여 먼저 그 연유를 자세히 설명하고서 마침내 그른 점을 지적하므로 듣는 자가 다 굴복하였다. 이 때문에 경서를 들고 배우려는 자가 골목을 메웠으며 일찍이 따라 배워서 관리의 자리에 오른 자도 어깨를 나란히 하여 늘어설 만큼 수가 많았고, 무사들이나 학식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도 그의 강의나 설명을 들으면 재미를 붙여 싫증을 내지 않았으며, 불교의 무리들까지도 교화된 자가 있었다.”p372
정도전 본인도 이방원이 명에 사신으로 갈 즈음에 이방원을 칭찬하기를 “(명에 가서)자상하고도 명백하게 아뢰어 우리 임금에게 내리는 명령을 받아가지고 돌아오면, 이것은 집안에서는 효자가 되고 나라에서는 충신이 되는 것이니 이것은 정안군(이방원)스스로 기약하는 바이며 여러 대부들도 역시 이것을 바라는 것이다” 하였다.
혹 정도전은 이러한 이방원의 사람됨과 그가 추구한 이상을 너무 무시하고 오히려 개인적으로 한을 품게 만든 것은 아닐까? 이방원의 생각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기록이 있다. 1419년(세종 1년)2월 3일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있을 때 세자에게 밀려난 양녕을 위로하면서 양녕의 처지를 자신과 비교하여 동정하는 장면이다.
“내가 젊은 시절에 아들 셋을 연이어 여의고 갑술년에 양녕을 낳았는데 그도 죽을까 두려워서 처가에 두게 했고, 병자년에 효녕을 낳았는데 열흘이 채 못 되어 홍영리의 집에 두게 했고, 정축년에 세종을 낳았다. 그때 내가 정도전 일파의 시기로 말미암아 형세가 용납되지 못하게 되니, 실로 남은 날이 얼마 없지 않나 생각되어 항상 가슴이 답답하고 아무런 즐거움이 없었다.
이와같은 이방원의 한과 정도전에 대한 미움을 정도전은 왜 사전에 조금이라도 헤아려보지 못했을까?정도전은 자신의 유배시절 마음이 묻고 하늘이 답한다라는<심문천답>이라는 글에서 의로운 자가 곤궁하게 되고 선한 자가 화를 입게 되는 것이 다만 시대를 잘못 만났거나 세상의 정의가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오히려 인간 스스로의 지혜와 성심이 부족한 때문이라고 자문자답하고 있다.
지혜와 성심이 더 요구되는 시기에 오히려 자만과 방심으로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으니 이 또한 그의 한계인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안타까울 뿐이다. p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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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5월도 중반에 들었고 일주일의 중반을 넘어섰다. 나는 어느새 사극 정도전을 볼 생각으로 마음이 들뜨고 있다.
앞 가게에 달려있는 만국기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바람은 고요하지 않은가 하고 팽목항에선 오늘도 작업은 또 제대로 되고 있지 못함의 소식을 듣는다.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은 자꾸만 떠올리면 무엇 하나 하다가도 신문에 기재된 한 장례사의 이야기에 눈물이 핑 돌고 말았다. 한 여학생을 염을 하는데 유리창이 깨지면서 몸에 여기저기 박혔는데 얼마나 아팠을까 하면서 하늘로 가는 길에라도 아프지 않기를 기원하며 유리를 다 빼고서야 염을 할 수 있었다한다. 삼십년 넘게 염을 하고 살았는데 이렇게 많은 아이들을 한꺼번에 염을 하는 일은 생전에 처음이라며 눈물이 앞을 가리는 얘기를 읽는다.
세상의 모든 꽃들이 제세상인 듯 얼굴을 내밀고 향기를 내뿜는 아름다운 가정의 달 오월, 또다시 선생님께 드리는 편지를 읽으며 눈시울이 붉어지는데 이 무거움은 언제쯤에나 떨어버릴 수 있을지 아득하기만 하다.
메기의 추억... 반나절이 넘도록 그 한곡만 들으며 사백년이나 지난 뒤에 간신, 역적이라는 굴레를 벗게 된 정도전을 생각한다. 욕심을 털어내고 주변을 조금만 챙겨 잘 돌아보았더라면 기막힌 죽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죽음의 모양새는 같지는 않지만 그러한 죽음과 오늘날 같은 사고는 작은 욕심과 큰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죽은 뒤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만 주변만이 시끄럽고 정작 죽은 이는 말이 없다.
세월은 덧없이 또 흐르고 있다. 한낮은 한여름인 듯 거리를 지나는 아이 얼굴이 붉다.
공부는 버려둔 채 집에 머물며 어미의 속을 태우는 한 놈은 또 어찌 지내는지...
둘째녀석은 최전방에서 근무하노라 전화를 주는데..
하늘은 구름한 점 없고 햇살은 눈부시기만 하다.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한세상 어찌 어찌 살다가 허망하게 가는 것을
탈 없이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을 알면서도
만국기처럼 흔들리는 이 마음은 도대체 무언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내 것도 아닌 이것...
잡을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넣을 수 없는 이 마음은 본래 없는 것이라 하는데
흔들리고 있는 것은 그러면 마음이 아니고 무엇인지...
다시 스님의 말씀에 귀를 열어야 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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