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말에 대하여

다림영 2013. 9. 9.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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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너 왜 이렇게 늙은 거니? 어머, 세상에, 목에 주름 좀 봐-”  

비수에 찔린 아픈 심정이 희고 작은 얼굴에 낱낱이 퍼져갔다. 몇 해가 지났지만 그녀의 모습이 잊혀 지지 않는다. 보고 싶어 하던 친구를 이십 오 년 만에 처음으로 만나 대뜸 한다는 나의 첫 인사가 그랬다. 친구는 그 밤 내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보이는 모습대로 불쑥 뱉어 놓고 나는 얼마나 큰 후회를 했던지 한동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때의 내 말 한마디는 이제껏 살면서 가장 주워 담고 싶은 말이었다. 그런 일이 있고 한참 후에 그녀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숙희야 그 동안 넌 눈이 참 깊어 졌다!”
그녀의 말에는 격이 있었다. 사는 것에 급급하여 사방으로 냉기가 흐르던 나였다. 그 말 을 듣는 순간 차갑던 마음 저 깊은 곳까지 몇 날 며칠 따뜻한 물결로 출렁거렸다. 아이 같은 마음으로 정말 내 눈이 깊어 진 걸까 하며 거울을 자꾸만 들여다보았다. 사실 내 눈은 그다지 깊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음 기울여 꺼낸 작은 말 한마디가 정말 천 냥 의 빚이라도 갚겠구나 하는 것을 실감하던 날이었다.

 
삼십 대 후반정도 보이는 여자 손님이 구경 좀 하겠다며 가게에 발을 들여놓았다. 나는 부담 갖지 말고 사지 않아도 되니 마음 편히 보라했다. 그녀는 이것저것 몇 차례 만지고 한참씩 끼어보더니 대뜸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것도 없고……, 별로 예쁜 것도 없고 …….”

괘씸한 말은 꿀꺽 삼키고 잘 가라는 인사를 전했지만 작은 답례도 없이 언제 보았느냐는 듯이 뒤도 안보고 총총히 사라졌다. 말에 기본적인 예의 가 없으니 행동 또한 바르게 이어지질 않는다. 하루 종일 그 손님이 아무렇지 않게 던진 말은 내 심기를 종일 불편하게 만들었다.

 
변변한 옷 하나 없는 장롱을 몇 며칠 뒤적거렸다. 아무것도 아닐 옷 때문에 우울하게 시작 되는 아침이곤 했다. 결국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고 값이 싼 가벼운 티 하나를 샀다. 아이처럼 들떠 몇 번씩이나 창에 몸을 비추어보며 아침을 열었다. 그런데 옆집여자가 종일 낯설게 쳐다보더니 저녁에 옷에 대한 말문을 열었다.

 
“거지같다! 무슨 그런 옷을 입고 다닌 데, 사장님이…….”
아, 낮은 가격은 그렇게 드러나는 것인지 그 기가 막힌 소리에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며 “어때서-” 하고 간신히 말을 되받았지만 그녀의 말은 대못이 되어 마음 벽에 깊게 박혀버렸다. 얼마나 괘씸하던지 옷 사는데 네가 돈 보태준 일 있냐 하며 붙잡고 싸우고 싶은 심정이 순간 용솟음쳤다.

“그런 대로 괜찮아요, 에이, 조금만 더 나은 옷을 사 입지.... 사장님이…….”
이렇게 말했다면 나는 그런가 하고 나 자신을 돌아보았을 것이다. 상대방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리지 않고 던지는 말은 크나큰 상처를 만들고 더 나아가서는 어떠한 위험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어느 날이었다. 낯익은 초등학교 선배님이 웃으며 지나시기에 그저 목례만 건넸다. 그러나 저쪽 에서 날아오는 소리,
“행복하시죠-”

생각지도 못했던 각별한 인사는 행복하지 못하던 나에게 긴 시간 작은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보통의 사람들은 그저 ‘안녕 하세요-’ 라는 인사가 대부분이다. 선배님의 그 인사만 생각하면 괜스레 즐거워지는 것이다. 나도 사람들에게 작은 웃음이라도 피어나게 하는 품격 있는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다란 가방을 메고 손에 무언가 잔뜩 든 행상 한 분이 들어왔다. 이천 원짜리 수세미 하나를 샀다. 고된 삶으로 지치고 굳어있던 그의 얼굴이 금세 박꽃 같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사장님 어려운 사람 도와주셔서 틀림없이 복 많이 받으실 거예요, 복, 정말 많이 받으세요.”

너무나 미미한 것에 대한 그의 답례는 크고 고마운 말이었다.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침 불쑥 들어오던 앞집 여자가 이 장면을 목격하고 생각 없는 말을 내 뱉는다.
“사장님은 참 돈도 많아-”

어디 내가 돈이 많아 수세미 이 천 원짜리를 산 것인가. 나에게 쓸 돈들은 천 원 한 장도 몇 번을 생각하고 사는 나날이다. 어찌 말을 함부로 내뱉는가 말이다. 그녀에게 이런저런 말을 하려 했으나 덮어두었다.

 

길을 지나며 흰 교복을 입은 소녀가 친구에게 소리를 지른다.
“꺼져, 이X아-”
소녀는 좀 더 성숙해 지면 멋진 애인도 사귀게 될 것이고 사회생활도 하게 될 것이고 아내도 될 것이고 예쁜 아기엄마도 될 것이다. 입에 담지 못할 소녀의 그 말 같지도 않은 말에 나의 유리창이 흔들린다.

 

소설가 신경숙은 선생님의 말 한마디에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말 한마디의 위력은 얼마나 대단하고 아름다운가. 내겐 어린 학생손님들이 가끔 방문한다. 귀를 뚫으려 들리는 것이다. 모양새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들도 있지만 신경숙의 선생님 말씀을 생각하며 동네 어른의 한 사람으로 가급적 아이들에게 득이 될 말을 들려주려 노력한다.

 

가까운 이 중에 늘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 되는 일이 없어, 부도난다!…….”
장난처럼 하는 말 이었다. 그는 그때 사실 모든 것이 반대의 상황이었으며 잘 되고 있었다. 어느날 부터 그는 그가 내뱉던 말 그대로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결국엔 바닥으로 내려앉고 말았다. 말이 씨가 된다 하였다. 정녕 나쁘고 부정적인 말은 삼가 해야 할 것이다.

 

가끔 친구들이 내게 묻는다.
“잘 되지?..‘
잘되고 있지는 않지만 난 언제나 웃으며 대답한다.
“그래, 잘 되고 있어_”
이렇게 말을 하게 되면 듣는 이도 마음이 가볍고 나 또한 긍정의 힘으로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글씨는 그 사람의 얼굴이고 말은 그 사람의 인품이고 덧붙여 예의 있는 인사는 돈을 들이지 않고 쌓을 수 있는 재산이라 들었다. 어느 정도 이야기를 나눠 보면 상대방의 사람됨을 대충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한다면 사람들로 하여금 내게 대해 호감을 지닐 수 있도록 한마디의 말에도 성의를 담아야 하겠다. 그렇다고 거짓되고 꾸밈 있는 말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나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드러나기도 할 말, 꽃밭을 가꾸듯 잡초를 구별하여 세상에 내 보내야 하리라. 한 번 뱉은 말은 쏟아버린 물과 같다. 그 담을 수 없는 한마디의 말로 싸움의 발단이 되기도 하고 그 사건은 어떤 상황을 불러올지 모르는 것이다. 또한 섣부른 말 한마디가 뜻하지 않은 비수가 되어 누군가의 가슴에 선명한 상처로 새겨질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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