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 너 왜 이렇게 늙은 거니? 어머, 세상에, 목에 주름 좀 봐-” 비수에 찔린 아픈 심정이 희고 작은 얼굴에 낱낱이 퍼져갔다. 몇 해가 지났지만 그녀의 모습이 잊혀 지지 않는다. 보고 싶어 하던 친구를 이십 오 년 만에 처음으로 만나 대뜸 한다는 나의 첫 인사가 그랬다. 친구는 그 밤 내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보이는 모습대로 불쑥 뱉어 놓고 나는 얼마나 큰 후회를 했던지 한동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숙희야 그 동안 넌 눈이 참 깊어 졌다!” 괘씸한 말은 꿀꺽 삼키고 잘 가라는 인사를 전했지만 작은 답례도 없이 언제 보았느냐는 듯이 뒤도 안보고 총총히 사라졌다. 말에 기본적인 예의 가 없으니 행동 또한 바르게 이어지질 않는다. 하루 종일 그 손님이 아무렇지 않게 던진 말은 내 심기를 종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런 대로 괜찮아요, 에이, 조금만 더 나은 옷을 사 입지.... 사장님이…….” 생각지도 못했던 각별한 인사는 행복하지 못하던 나에게 긴 시간 작은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보통의 사람들은 그저 ‘안녕 하세요-’ 라는 인사가 대부분이다. 선배님의 그 인사만 생각하면 괜스레 즐거워지는 것이다. 나도 사람들에게 작은 웃음이라도 피어나게 하는 품격 있는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다란 가방을 메고 손에 무언가 잔뜩 든 행상 한 분이 들어왔다. 이천 원짜리 수세미 하나를 샀다. 고된 삶으로 지치고 굳어있던 그의 얼굴이 금세 박꽃 같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너무나 미미한 것에 대한 그의 답례는 크고 고마운 말이었다.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침 불쑥 들어오던 앞집 여자가 이 장면을 목격하고 생각 없는 말을 내 뱉는다. 어디 내가 돈이 많아 수세미 이 천 원짜리를 산 것인가. 나에게 쓸 돈들은 천 원 한 장도 몇 번을 생각하고 사는 나날이다. 어찌 말을 함부로 내뱉는가 말이다. 그녀에게 이런저런 말을 하려 했으나 덮어두었다. 길을 지나며 흰 교복을 입은 소녀가 친구에게 소리를 지른다. 소설가 신경숙은 선생님의 말 한마디에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말 한마디의 위력은 얼마나 대단하고 아름다운가. 내겐 어린 학생손님들이 가끔 방문한다. 귀를 뚫으려 들리는 것이다. 모양새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들도 있지만 신경숙의 선생님 말씀을 생각하며 동네 어른의 한 사람으로 가급적 아이들에게 득이 될 말을 들려주려 노력한다. 가까운 이 중에 늘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가끔 친구들이 내게 묻는다. 글씨는 그 사람의 얼굴이고 말은 그 사람의 인품이고 덧붙여 예의 있는 인사는 돈을 들이지 않고 쌓을 수 있는 재산이라 들었다. 어느 정도 이야기를 나눠 보면 상대방의 사람됨을 대충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한다면 사람들로 하여금 내게 대해 호감을 지닐 수 있도록 한마디의 말에도 성의를 담아야 하겠다. 그렇다고 거짓되고 꾸밈 있는 말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나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드러나기도 할 말, 꽃밭을 가꾸듯 잡초를 구별하여 세상에 내 보내야 하리라. 한 번 뱉은 말은 쏟아버린 물과 같다. 그 담을 수 없는 한마디의 말로 싸움의 발단이 되기도 하고 그 사건은 어떤 상황을 불러올지 모르는 것이다. 또한 섣부른 말 한마디가 뜻하지 않은 비수가 되어 누군가의 가슴에 선명한 상처로 새겨질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때의 내 말 한마디는 이제껏 살면서 가장 주워 담고 싶은 말이었다. 그런 일이 있고 한참 후에 그녀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녀의 말에는 격이 있었다. 사는 것에 급급하여 사방으로 냉기가 흐르던 나였다. 그 말 을 듣는 순간 차갑던 마음 저 깊은 곳까지 몇 날 며칠 따뜻한 물결로 출렁거렸다. 아이 같은 마음으로 정말 내 눈이 깊어 진 걸까 하며 거울을 자꾸만 들여다보았다. 사실 내 눈은 그다지 깊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음 기울여 꺼낸 작은 말 한마디가 정말 천 냥 의 빚이라도 갚겠구나 하는 것을 실감하던 날이었다.
삼십 대 후반정도 보이는 여자 손님이 구경 좀 하겠다며 가게에 발을 들여놓았다. 나는 부담 갖지 말고 사지 않아도 되니 마음 편히 보라했다. 그녀는 이것저것 몇 차례 만지고 한참씩 끼어보더니 대뜸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것도 없고……, 별로 예쁜 것도 없고 …….”
변변한 옷 하나 없는 장롱을 몇 며칠 뒤적거렸다. 아무것도 아닐 옷 때문에 우울하게 시작 되는 아침이곤 했다. 결국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고 값이 싼 가벼운 티 하나를 샀다. 아이처럼 들떠 몇 번씩이나 창에 몸을 비추어보며 아침을 열었다. 그런데 옆집여자가 종일 낯설게 쳐다보더니 저녁에 옷에 대한 말문을 열었다.
“거지같다! 무슨 그런 옷을 입고 다닌 데, 사장님이…….”
아, 낮은 가격은 그렇게 드러나는 것인지 그 기가 막힌 소리에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며 “어때서-” 하고 간신히 말을 되받았지만 그녀의 말은 대못이 되어 마음 벽에 깊게 박혀버렸다. 얼마나 괘씸하던지 옷 사는데 네가 돈 보태준 일 있냐 하며 붙잡고 싸우고 싶은 심정이 순간 용솟음쳤다.
이렇게 말했다면 나는 그런가 하고 나 자신을 돌아보았을 것이다. 상대방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리지 않고 던지는 말은 크나큰 상처를 만들고 더 나아가서는 어떠한 위험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어느 날이었다. 낯익은 초등학교 선배님이 웃으며 지나시기에 그저 목례만 건넸다. 그러나 저쪽 에서 날아오는 소리,
“행복하시죠-”
“사장님 어려운 사람 도와주셔서 틀림없이 복 많이 받으실 거예요, 복, 정말 많이 받으세요.”
“사장님은 참 돈도 많아-”
“꺼져, 이X아-”
소녀는 좀 더 성숙해 지면 멋진 애인도 사귀게 될 것이고 사회생활도 하게 될 것이고 아내도 될 것이고 예쁜 아기엄마도 될 것이다. 입에 담지 못할 소녀의 그 말 같지도 않은 말에 나의 유리창이 흔들린다.
“그래 되는 일이 없어, 부도난다!…….”
장난처럼 하는 말 이었다. 그는 그때 사실 모든 것이 반대의 상황이었으며 잘 되고 있었다. 어느날 부터 그는 그가 내뱉던 말 그대로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결국엔 바닥으로 내려앉고 말았다. 말이 씨가 된다 하였다. 정녕 나쁘고 부정적인 말은 삼가 해야 할 것이다.
“잘 되지?..‘
잘되고 있지는 않지만 난 언제나 웃으며 대답한다.
“그래, 잘 되고 있어_”
이렇게 말을 하게 되면 듣는 이도 마음이 가볍고 나 또한 긍정의 힘으로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