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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가을 편지 /

다림영 2013. 8. 17.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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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아버지, 엄마는 늦은 봄 씨앗을 뿌리고 여름내 가녀린 줄기에 사랑을 주었습니다. 색색의 꽃이 피었다며 자랑을 늘어놓더니 언제부턴가 혼자 보기 아깝다고 화분을 가게로 가져와 창 앞에 놓아두었습니다. 엄마는 때마다 꽃들 앞에 한참을 서 있습니다. 꽃에게 인사를 하고 사람 대하듯 손을 가져가 만지며 이야기합니다. 꽃들이 연신 춤을 추는 것을 보니 화답을 하는 듯합니다. 그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다 아버지의 환한 얼굴이 떠오르고 과꽃의 노래가 바람 새듯 흘러나옵니다.

 

이맘때였습니다. 우리 집 뜰에는 채송화, 봉숭아, 분꽃, 맨드라미, 백일홍. 과꽃.... 많은 꽃들이 피었습니다. 어둠이 몰려오면 우리 가족은 평상 위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거나 고구마나 감자를 쪄서 조촐한 참을 즐겼습니다. 상이 물려지면 아버지는 취기어린 눈으로 나를 빤히 들여다보며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양념 딸 노래 좀 들어볼까?" 나는 배시시 웃으며 벌떡 일어나 "올해도 과아꽃이 피이었습니다아~." 하고 목청을 드높였습니다. 밤하늘의 별들이 초롱한 눈을 뜨고 반짝일 무렵이었습니다

 

아버지 오늘은 종일 귀를 열고 과꽃노래에 젖어듭니다. 가슴이 뭉클하고 괜스레 눈물이 맺힙니다. 아버지와의 추억들은 작은 물고기처럼 물살을 헤치고 눈부시게 튀어 오릅니다.

주전자 그림자가  어룽댑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파란 하늘아래 올망졸망 논길을 걸었습니다. 노래를 입에 물고 다니던 나는 신이 나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동생들의 걸음엔 가뿐한 리듬이 실렸습니다. 참으로 그립기만 합니다. 아버지. 하염없이 돌아가고 싶기만 한 어린 날입니다.

 

톡톡 톡톡도망치려는 메뚜기를 놓칠 세라 동생들은 작은 손으로 움켜쥐고 주전자를 들고 있는 누나를 불러댔지요. 메뚜기는 우리들의 가을철 간식꺼리였습니다. 노릇노릇 달달 볶은 메뚜기의 고소한 맛을 지금의 아이들에게 어찌 알려줄 수 있을지요....

 

아버지 굉장히 큰 저수지가 있었지요. 마음이 일어나면 지금도 한 번씩 그 곳을 거닙니다. , 여름, 가을, 겨울, 그곳의 주변은 우리에게 다정한 친구가 되어주었고 아버지의 너른 품처럼 평온했습니다. 그때도 제 손엔 노란 양은 주전자가 들려 있었습니다. 주전자에 가득 찬 우렁들이 눈에 선합니다. 우렁뿐만 아니라 이름 잊은 까맣고 조그마한 것들을 잡느라 정신을 놓곤 하였습니다

 

우렁이와 같이 잡아온 것들을 엄마가 삶아내는 동안 맏이인 나는 아버지의 술심부름을 다녀와야 했습니다. 주전자를 요란스럽게 흔들며 내처 달려갔습니다. 쥐 알 만한 손님을 맞이하는 가게 언니의 웃음은 꽃처럼 환했습니다. 언니의 물음이 무엇이었는지 귓전으로 흘렸고 맛나게 삶겼을 그것들을 동생들이 다 먹을까 마음만 바빴습니다. 한 시간이면 한 대 정도 지나던 버스가 금세 다녀갔는지 신작로엔 뽀얀 먼지가 구름처럼 일었습니다. 그 먼지를 피하지도 않으며 넘칠 듯 말 듯 한 막걸리 주전자의 주둥이를 입으로 가져가며 홀짝홀짝 마셨습니다. 아마도 제가 지금도 막걸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때부터 비롯된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일찍 오시는 날이면 우리는 모두 마당으로 불려 나갔습니다. 엄마와 아버지의 편을 가르고 해가 서녘으로 넘어가고 깃털로 된 흰 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드민턴을 쳤습니다. 담이 없던 마당에서 가족의 즐거운 소리는 싸리나무 울타리를 냉큼 건너 신작로까지 나갔습니다. 지나는 이들의 걸음을 멈추게도 했고 응원을 하며 지켜보는 눈들도 있었습니다. 어린 우리들에겐 참 신나는 풍경이었습니다.

 

아버지, 깊은 밤이면 아버지 발자국 소리가 어린날 처럼 신작로 어디쯤에서 들려올 것 같습니다. 저녁마다 아버지는 많은 형제 중 맏이인 제 이름만을 고집하셨습니다. "숙이야아-" 현관문이 덜컹 밀리면 모두 총알처럼 달려 나가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하였습니다. "아버지 다녀오셨습니까?" 합창하듯 소리를 높였던 우리였습니다. 아버지의 피곤함은 순식간에 날아가지는 않았는지요? 아버지, 제가 일을 끝내고 집에 들어서면 아이들이 저마다 가방을 받으려하고 또한 등도 두드려 주며 서로 안고 인사를 나눕니다. 그 오래전의 아버지 마음은 지금 제 마음 같지 않았을까 합니다. 모든 무거움들이 일순 사라지는 작은 행복 말입니다.

 

아버지 우리는 왜 그렇게 가난했던지 수제비나 칼국수로 끼니를 해결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아버지의 저녁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침을 꼴깍 삼키는 동생들의 표정들이 생각이 납니다. 아버지의 밥그릇엔 늘 밥이 반 이상 남아 있었습니다. 일부러 남기신 밥인 줄 뒤늦게 알았습니다. 두 숟가락씩 돌아가며 달게 먹던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김치와 간장과 마아가린이 전부였던 것 같은데 세상에서 가장 맛나던 밥이었습니다. 어디에서도 그때의 밥맛은 찾지 못했습니다.

 

이른 아침이면 싸리비질 소리가 열린 문틈으로 가만히 들려왔습니다. 골목 꼭대기까지 올라가며 쓸던 아버지, 문득 허리를 펴고 어떠한 생각으로 안개 자욱한 먼 길을 바라보고 계셨을까 짚어봅니다. 그리고 아침마다 틀어놓으신 불경소리에는 산새소리도 함께 실려 있었지요. 선선한 아침 기운에 얇은 이불을 목 위로 바짝 끌어올리고 고요하고 깊은 산 속의 기운이 엄습하는 듯 어린 저는 어떤 각별함으로 휩싸여 뒤척이곤 하였습니다. 이제 제가 간혹 절에 다녀오고 이른 아침마다 산을 찾는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지금도 눈에 선한 아버지의 모습이 또 있었습니다. 가끔 붓을 드셨지요 아버지?  그때마다 우린 서로 먹을 갈겠다고 하였습니다. 진한 먹물의 향기가 사위로 퍼지고 고요함으로 젖어들던 아버지, 우리에게 신념에 대한 글귀를 써서 각별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한 가지 뜻을 가지고 그 길을 가라 잘못도 있으리라 실패도 있으리라 그러나 다시 일어나 그 길을 가라"…….

지금도 동생들과 아버지를 추억할 때면 너도나도 물 새듯 흘러나오는 글귀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우리 곁을 떠나신 아버지, 그러나 아버지의 그 신념은 남루한 벽에서 반듯하게 자리를 잡고 오랫동안 우리형제들을 지켜주었습니다. 아버지가 사라진 철없던 아이들을 아침저녁으로 내려다보며 삶의 길을 알려 주었습니다. 형제들 저마다 나름대로 제 일을 가지고 한 길을 가는 것을 보면 아버지의 큰 사랑이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아버지, 밥을 삼키지 못하던 엄마의 긴 한숨과 무거운 얼굴로 술잔 기울이던 아버지의 모습이 종종 있기도 하였습니다. 그러한 날이면 맏이인 제 꿈속은 온통 어지럽고 아득한 벼랑이 느닷없이 나타나곤 하였습니다. 막막한 가장이 되면서 그 시절 아버지의 무거웠을 마음을 돌아봅니다.

 

간혹 아버지는 영화를 보시고 느지막하게 오셨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유일한 삶의 탈 출구였으리라 짐작합니다. 영화를 보고 삶의 고단함을 털어 내었듯 그 시절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버린 저는 책을 벗 삼으며 번잡한 마음을 비워내려 노력합니다.

 

가족의 아침을 준비하면서 열어놓은 베란다로 경비실 아저씨의 마당 쓰는 소리가 종종 들려옵니다. 과꽃이 필 즈음이면 길어지고 깊어지는 아버지생각입니다.

 

아버지, 어느덧 조용한 어둠이 내립니다. 9월에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흔들리고 왠지 모를 허무함이 일기도 합니다. 아버지. 아버지도 그러한 때가 있으셨는지요?.....

삶의 질곡으로 헤맬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깊은 여름이면 가을이 멀지않듯 삶의 이치도 자연과 같지 않겠는지요?

과꽃들이 즐거이 춤을 춥니다. 가을이 숨어든 저녁바람이 좋은가봅니다. 오가는 이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니 저 또한 미소를 짓습니다.

아버지, 긴 시간 과꽃의 노래에 묻혀 있습니다. 그 옛날 아버지 앞에서 부르던 과꽃의 노래를 따라 불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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