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7월 10일 수요일
가벼운 입 무거운 입
디지털 시대에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는 메시지를 대하면서 지난 세대가 고집햇던 소통의 지혜를 돌아본다.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라는 금언을 가슴에 담고 살았다. 말이 많은 사람을 항상 경계하던 어른들의 가르침도 기억이 난다. 남아일언중천금이라며 말 한마디의 가치에 대해 이따금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없다며 가능한 한 입이 무거워야 한다고 배웠다. 시집을 가면 귀머거리 삼년 벙어리 삼년을 살아야 한다던 서글픈 얘기를 듣기도 했다.
어떻게 살았을까. 어떻게 견뎠을까. 조일토록 말없이 지낸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그래서였을까. 한이 많았다. 한이란 것이 그 속을 들여다보면 까맣게 타버린 가슴앓이의 환부 아니었던가. 말 못할 사연들이 한이 없었다. 한이 많은 만큼 왜도 많았다. 말이 없으니 눈치로 살았고, 눈치로 살다보니 오해가 잦을 수밖에 없다. 낯빛을 살피고 눈매를 훔쳐보고 일거수일투족에 배어나는 체취를 맡았다. 말한마디 한마디의 행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뭇 신경을 기울였다. 어른들과의 대화는 대화가 아니라 시종 탐색전이었다. 무슨 일이건 윗사람의 의중을 먼저 알아야 했고,무슨 말이건 윗사람의 심기부터 먼저 살펴야 했다.
그 무거운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는 디지털보다 한걸음 먼저 오랜 계층적 질서와 억압의 구조를 뒤흔들었다. 봇물처럼 터져 나온 욕구의 분출은 한스러운 사회의 내면을 거침없이 보여 주었다.
아! 그랬었구나! 그토록 많은 분노와 증오가 쌓여있었구나! 이념의 대립과 갈등도 이처럼 깊은것이었구나! 비록 충돌과 혼돈의 시간이었지만 한 세대 이상을 흘러온 민주화의 열기는 우리 사회의 무거운 족쇄를 녹였다. 어느 틈에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의 화해를 말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이제는 누구나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시대인데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사이에 미디어가 순식간에 늘어났다. 디지털 혁명은 미디어혁명으로 돛을 올렸다. 모든 미디어가 정보와 지식을 메시지로 통합해서 시간과 공간의 격차없이 실어 나른다. 메신저와 카카오톡은 일상 깊은 곳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정말로 누구나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시대이구나 감탄하는 사이에 거꾸로 미디어는 새로운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하는 것은 내 마음이지만 , 하고 싶어서 해버린 말은 어느 하나 내 마음대로 지우거나 잊어버릴 수 없다는 사실에 당황한다.
사람은 기억에 의존해서 산다. 그러나 사람은 때로 망각에 의지해서 살기도 한다. 살다 보면기억하지 못해서 낭패를 당하기도 하지만 망각하기 때문에 평안을 되찾기도 한다.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망각이란 사라지고 말 단어이다. 누군가 기록하고 있고 누군가 영원히 그 기록을 보존할 것이다. 아무리 사소하고 개인적인 일이라도 누군가 마음 먹기만 하면 온 세상에 알려서 시빗거리를 만들 수 있는 세상이다. 무심코 던진 한마디 말이라도 누군가 마음먹기만 하면 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로 되갚을 수 있는 세상이다. 그래서 안타깝다. 그래서 두려운 세상이다.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하고 사는 세상은 과연 좋은 세상인가. 인류가 이제껏 꿈꾸었던 세상이 이런 세상인가. 유토피아란 누구나 아무 말이나 아무 곳에서나 말하는 세상인가. 거침없이 확산되는 SNS는 진실로 우리가 애타게 추구해왔던 언론의 자유를 완성해줄 도구인가.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들여다보면서 잔잔한 웃음이 떠오를 때보다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릴 때가 많다.
이런얘기를 꼭 이런 공간에서 표현해야 하나. 마음대로 말할 수 있다고 하는 말이 과연 누구 마음을 전하고 있나.
소통의 시대에 불통의 얘기를 하는 쪽은 과연 어느 쪽인지 혼란스럽다. 디지털미디어 시대는 결국 일인 미디어 시대를 향해 줄달음치고 있지만 그 끝은 어떤 모습일지 더더욱 혼란스럽다. 이 변화는 세 번째 밀레니엄의 축복인가 저주인가. 소통의 시대에 그래서 불통의 시대 편린을 문득 돌아본다. 유학 간 아들 목소리 한번 듣겠다고 시내 전화국까지 가야 했던 시절의 불편을 돌아본다. 헤어진 친구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 편지지와 씨름했던 시간의 낭비를 돌아본다. 사랑을 고배하기 위해 숱한 날 밤을 새웠던 바보같은 시대의 낭만을 돌아본다.
다시 생각해본다. 말이 없어 고통스러운가 아니면 말이 많아서 고통스러운가. 아무리 따져봐도 말 많은 편이 더 고통스럽다. 말이 없어 고통스러운 것은 답답함이 가장 크지만 , 말이 많아서 겪는 고통은 늘 답답함 이상이다. 많은 말을 부르고 많은 말을 낳는다.
침묵은 분노를 삭이지만 더 많은 말은 더 잦은 시비를 부른다. 그래서였던가. 시인은 스스로 입을 닫았다.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그는 가벼운 입 대신 무거운 입을 택했다. 예수님은 어땠을까, 그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사랑이 차올를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덕분에 그 말은 빛이 되었고 진리가 되었고 생명이 되었다.-조정민.목사. 전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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