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좋은 글

피천득 작은 인연들로 아름답다 중에서

다림영 2013. 6. 12.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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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면 멀어진다.” 고 영국 사람은 말한다. “가는 자 날로 멀다.”고 중국사람은 말한다. “안 보면 잊혀진다.”고 우리는 말하낟. 이것은 보통 사람의 말이다. 그러나 절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보통사람이 아니다.

사랑은 그리움인 것, 그리움은 멀어질수록 더욱 사무치나니, 애인은 멀어질 때 더욱 가까워진다.

그러므로 헤어지면 멀어진다.”는 말이 참말로 들리거든 그대에게 아직 사랑이 찾아오지 않았음을 알라. 보이지 않는 그가 또는 그녀가 눈 앞에 있을 그때보다 더 그리울 때가지 그대는 아직 사랑을, 그리고 삶을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하나니, 아아, 우리는 마침내 사랑을 알게 될까. 그리고 삶을.

녹음이 짙어가듯 그리운 그대여, 주고 가신 화병에는 장미 두송이가 무서운 빛깔로 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나이를 잃은 영원한 소년입니다.

-<파리에 부친 편지> 중에서

 

이성은 감정의 열기 앞에 물과 같은 것이요, 윤리 또한 사랑의 불꽃에게 물과 같은 것이다. 이성과 윤리는 이기심과 관련 있는 것, 윤리는 울타리를 치고 벽을 쌓아 나를 너의 이기심으로부터, 너를 나의 탐욕심으로부터 보호하지만, 사랑은 애당초 가두고 묶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인 한, 사람이기에 감정과 함께 이성을 지니고 있는 한, 어찌 반드시 사랑으로써 윤리를 헤뜨리며, 윤리로써 사랑을 가두기만 하겠는가. 그리하여 때로 우리의 마음은 아름다우면서도 무섭고, 위험하면서도 황홀한 외줄타기를 물리치지 못한다.

 

그 사이에 시인이 있고, 수필가가 있다. 성자이기에는 범속하고, 범속하긴 하나 마음이 섬세한 예술가. 사랑은 그의 미묘한 줄타기를 통해 아슬아슬한 균형에 도달한다.

 

타오르는 장미 두 송이는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그러면서도 무서우리만치 이끌리는 너와 나에 다름 아니다.

 

한 주일이 그리 멀더니 일 년이 다가옵니다. 가실 때 그렇게 우거졌던 녹음 위에 단풍이 지고 지난 겨울에는 눈도 많이 오더니,이제 라일락이 자리를 물러서며 신록이 나날이 원숙해집니다.

<파리에 부친 편지> 중에서

 

멀어지면 잊혀지는것이 아니라 멀어지면 깊어진다. 한 주일을 멀게 느끼던 마음은 원숙한 녹음으로 우거지고, 마침내는 자욱한 눈으로 내린다. 꽃이 피고 꽃이 진다. 가을이 깊어지는 계절, 붉고 누른 빛깔이 선명하다.

세월이다. 그리고 그 세월 사이로 삶이 무늬를 지으며 흘러간다. 이렇게 삶은 여인과 함게, 사랑과 함께 깊어지는 것. 그런 다음 우리 또한 낙엽처럼 떨어져 세상으로부터 떠나가는 것. 멀어지는 것.

그때 멀어지는 나를 사무치도록 기억해줄 사람이 있을까. 그를 바라 무엇하리. 여기 신록이 젊음 한가운데에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데.

파리의 하늘은 변하기 쉽다지요. 여자의 마음 같다고. 그러나 구름이 비치는 것은 물의 표면이지 호수의 깊은 곳은 아닐 것입니다. 날이 흐리면 머리에 빗질 아니하실 것이 걱정되오나, 신록 같은 그 모습은 언제나 새롭습니다.

<파리에 부친 편지> 중에서

 

한번 사랑한 사람을 그리워하며 삼십 년을 수절하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이다. 그리하여 여자의 마음은 갈대이지만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은 갈대의 뿌리이다. 호수의 표면이 흔들릴 때에도 밑바닥은 무섭도록 고요하듯이, 참으로 사랑을 아는 여인의 마음은 흔들리는 가운데서도 영원하다.

 

사람이기에 흔들리고, 사랑이기에 튼튼한 그녀의 마음. 비록 보아주는 이 없는 머릿결일지라도 그녀는 늘 단정하게 빗어 찰랑찰랑 어깨위에서 물결치도록 마음을 쓴다. 그것은 어쩌면 떠나간 애인에게 순결하지 못한 행위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자인 이상 어찌 애인 아닌 멋진 남자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긴장하는 여인은 밉다. 그러나 긴장을 아주 놓아버린 여인은 더욱더 밉다. 약간의 긴장은, 내 남자 아닌 남자의 눈을 의식하는 여자의 살가운 매무새는 정숙함 가운데 반짝 빛나는 생의 액세서리 같은 것이다.

 

오늘도 강물에 띄웠어요

쓰기는 했건만 부칠 곳 없어

흐르는 물 위에 던졌어요.

<편지> 전문

 

그 편지가 파리에 부친 편지였을 까. 세상에는 없는 사랑을 꿈꾸는 마음이 세상에는 없는 사람에게 쓴 편지. 그러나 다행하게도 시인에게는 흐르는 강물이 있었다.

 

가없는 나뭇잎 쓸쓸히 떨어지고

끝없는 강물은 유유히 흘러내려

-두보.<등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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