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11월 2일 /가슴으로 읽는 시
와유(臥遊)
내가 만약 옛사람 되어 한지에 시를 적는다면 오늘밤 내리는 가을비를 정갈히 받아두었다가 이듬해 황홀하게 국화가 피어나는 밤 해를 묵힌 가을비로 오래오래 먹먹토록 먹을 갈아 훗날의 그대에게 연서를 쓰리
‘국화는 가을비를 이해하고 가을비는 지난해 다녀갔다’
허면, 훗날의 그대는 가을비 내리는 밤 국화 옆에서 옛날을 들여다보며 홀로 국화술에 취하리
-안현미(1972~)
찬 가을비가 내리는 저물어가는 저녁이다. 따스하게 난로를 켜놓고 가을비를 내다보고 있다. 물든 단풍잎들을 떨구고 있는 나뭇가지는 옛 한지에 긋는 애틋한 필획(筆劃)처럼 정갈하고 다정히 저녁 하늘에 번져간다.
이 순간을 같이하고 싶은 지음(知音)이 있으나 지금 여기 없다. 국화에 가을비 스치듯 안타까울 뿐 그는 없다. 그 그리움은 버릴 수 없는 것이어서 내년 이맘때가 되어도 여전하리라는 예감이 든다. 내년의 내 맘을 들여다 본다.
‘국화는 가을비를 이해하고 (놓치고가 아니라!)가을비는 지난해도 다녀갔다’. 여전히 내년 가을비도 그리울 테지만, ‘지난해 다녀갔다’고...묻어놓은 ‘앙탈’이 이 시의 울림이고 웃음이고 회한이다. 조선여류(女流)의 옷고름이 얼핏 스친다.
사족으로 한 말씀 더한다. 육필(肉筆)사라져간다. 자기 글씨를 가꾸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육필에 어른어른 묻어나는 심미(審美), 그런 것은 몰라도 되는 것이 ‘모더니즘’일까? 우스운 일이다
장석남. 시인. 한양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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