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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문태준-
모스크바 거리에는 꽃집이 유난히 많았다
스물네 시간 꽃을 판다고 했다
꽃집마다 '꽃들'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었다
나는 간단하고 순한 간판이 마음에 들었다
'꽃들'이라는 말의 둘레라면
세상의 어떤 꽃인들 피지 못하겠는가
그 말은 은하처럼 크고 찬찬한 말씨여서
'꽃들'이라는 이름의 꽃가게 속으로 들어섰을 때
야생의 언덕이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의 보살핌을 보았다
내 어머니가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방을 두루 덥히듯이
밥 먹어라, 부르는 목소리가 저녁연기 사이로 퍼져 나가듯이
그리하여 어린 꽃들이
밥상머리에 모두 둘러앉는 것을 보았다
<감상>
모스크바는 아주 추운 곳. 도대체 어디서 그 꽃들이 피는 거죠? 러시아 유학을 다녀온 친구에게 물어보니 대부분 수입
산이래요. 술도 아니고 라면도 아니고 소화제도 아닌 꽃들을 스물네 시간 내내 팔다니. 꽃이 드물고 너무 귀해서 잠도 안
자고 새벽에도 꽃을 사러 다니나 봐요.
꽃들 사이의 위계를 따지는 건 그것들이 흔하디흔할 때에만 가능한 일. 나팔꽃이든 장미꽃이든 전부 드문 곳에서는 '꽃
들'이라는 간단하고 순한 이름만으로도 소중한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서로 아무렇게나 버려두고 던져버
리는 건 착각에서 비롯되는 걸까요? '너 따위는 지천으로 깔렸어.'라는. 우리가 사는 데가 얼마나 추운 곳인 줄 모르고, 너
같이 귀한 꽃을 함부로.
-진은영(시인)
출처 : 시와 글벗
글쓴이 : yangg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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