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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의 작은 음모가 깨어지는 순간

다림영 2011. 12. 8.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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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모교 대학병원 중환자실이었다.

아버지는 입에 인공호흡기를 꽂고 , 각막건조를 막기 위해 젖은 거즈로 눈을 가린 채였다.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은 그때 처음으로 실감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날 아침에 학교 앞에서 헤어지며, 이따가 저녁에 시내에서 만나 둘이서 콩나물밥을 사먹고 집에 들어가자고 하시던 분이 양팔에 링거를 줄줄 달고, 생명유지 장치에 의지한 채 간신히 생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가슴은 떨리고 귀에는 아득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직 그날을 일초의 끊임도 없이 생생히 기억한다.

학교를 마치고 아버지 사무실에 전화를 햇지만, 공교롭게도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경찰공무원이셨던 아버지 사무실에서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는 일은 처음이었다. 몇 차례 신호음만 길게 울린 전화가 이편의 입장 따위를 생각해줄 리가 없었다. 아마 급박한 사건이 발생했거나, 아니면 나는 모르는 중요한 행사가 있었을 것이다. 식구들 빼고 우리끼리 저녁을 먹기로 했던 아버지와의 작은 음모가 깨진 것이다. 마침내 축제 기간이라 다음 날에도 수없이 없었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동안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내내 나를 괴롭혔지만, 평소와 다름없이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갓다.

골목에 들어서자 블록을 쌓은 낮은 담장 너머로 집 안에 훤하게 켜진 불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한옥집 안방과 마루, 대문 앞, 마당가지 잔칫집처럼 등이 밝혀져 있었다. 내 기억에는 막내 고모가 시집을 가던 날 말고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의아한 기분으로 대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지만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응당 제일 먼저 들렸어야 할 어머니의 목소리도, 동생들의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몇 번이나 초인종을 눌렀지만 마찬가지였다. 정말 이상한 날이었다. 전화도, 초인종도 내게 아는 척을 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담을 넘었다. 가방을 먼저 담 너머로 던져 놓고는 가볍게 담장 위로 올라섰다. 담장 위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부엌에도, 불이 켜져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얼마 전까지 누군가가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종잡을 수 없는 기분으로 일단 마루에 엉덩이를 걸치고 막 신발을 벗는데, 마루에 놓인 전화기의 벨이 울렸다.

한쪽 신발을 신은 채 무릎걸음으로 걸어가서 전화를 받았다. 아는 목소리였다. 한동네에 사는 어머니 친구의 몰소리였다.

"안녕하세요!"

내가 인사도 마치기 전에 "이제 왔구나! 거기 잠깐만 기다려라"

하고는 전화가 뚝 끊어졌다. 다급한 일이 분명했다. 무슨 일일까? 짐작조차 되지 않았지만, 본능은 이미 뭔가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었다. 잠시 후 초인종이 울렸다. 대문을 열자 서너 분의 동네 아주머니들이 문밖에 서 계셨다.

 

"놀라지 말고 내 말 잘 들어라. 아까 네 아버지가 쓰러지셔서 대학병원에 가셨다. 괜찮을 테니 당황하지 말고 병원에 가봐라. 지금 중환자실에 계신단다."

중환자실.... 의과대학 학생이었지만 한 번도 들어가 보지는 못한 곳이었다. 본과 4학년 임상 실습시기에는 진저리가 날 정도로 지켜야 하는 곳이지만, 이제 2학년인 나는 그곳이 심각한 곳이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대학병원 중환자실 앞 복도를 지날 때면 늘 당황하고 슬픈 표정을 한 일단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곳은 뇌출혈로 쓰러진 남편, 암으로 투병 중인 아내, 이름을 알 수 없는 병에 아들딸을 배앗긴 부모들이 항상 지키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곳을 지나기를 꺼려했다. 인턴 수련 중인 선배를 만나러 병원에 갈 때도, 과제물을 들고 교수님을 찾을 때도 3층 중환자실 복도와 이어진 연구동 복도를 지나기를 꺼려했다. 막연히 나도 언젠가는 저 자리에 저렇게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을지 모른다는 느낌이 마음을 편치 않게 했다.

그런데 중환자실에 내 아버지가 누워 계신다고 했다.

 

아버지는 나의 우상이셨다.

고위직은  아니었지만 성실하고 정직한 공무원이었고, 어린 시절 부터 나를 지게에 태워 다니시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통해 이어진 강력한 유대는 나를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이제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 한달음에 신경외과 주임교수님 방을 찾아갔다.

"선생님, 저희 아버지 어떻게 되시는 겁니까? 괜찮으신 거죠? 수술하면 되죠?"

 

인자하신 주임교수님은 학부 1학년생의 무도한 방문에도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사실은 "뇌 지주막하 출혈" 수술도 불가능하고 돌아가실 날만 기다려야 한다는 상황, 그것을 그 자리에서 확인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길로 완전히 정신이 나갔다. 병원에서 희망이 없다는 말은 지금 이순간 내가 다른 무슨일이라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 다음 날부터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내 정신이 아니었던 탓일 것이다. 인근에 있는 한방병원을 찾아가 보기도 하고, 심지어는 하루 종일 무당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나는 완전히 자의식을 상실하고 패닉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때 내 곁을 지켜준 두 사람의 친구가 있었다. 한 친구는 동기었고, 또 한친구는 대학의 의대를 다니던 어린 시절의 친구였다.

그중 한 녀석은 그날 이후 3일간을 내 곁에서 한 번도 떠나지 않았다. 내가 반즘 미쳐서 침쟁이를, 무당을 찾아다니는 동안에도 묵묵히 나를 따라 다녔고,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또 다른 한친구는 내가 아버지 곁을 비우고 헤매는 동안 내 대신 중환자실 복도를 지켰다. 그리고 내내 두 손을 모아 쥐고는 하루 종일 내 대신 기도를 했다.

어머니도 동생도 모두 그 친구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모두가 정신이 나가 있었던 탓이다

 

3일째 되는 날에야 정신이 반쯤 돌아왔다.

이제 더 이상 아무리 돌아다녀도, 무엇인가 지푸라기를 잡으려 해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 극심한 무기력증과 두려움, 그리고 아픔이 몰려왔다. 나는 아버지를 그렇게 잃을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밤새 눈물이 나고 몸이 떨렸다. 그러나 그때 정작 나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린 사람이 있었다, 바로 녀석이었다.

 

우리는 그날 밤 내내 서로 어깨를 감싸 쥐고 서럽게 울었다. 나는 아버지가 불쌍해서, 녀석은 내가 불쌍해서 울었다.

더구나 녀석은 다음 날이 시험이엇다. 이미 예과에서 한 번 낙제를 했던 녀석은 이제 한 번만 더 낙제를 하면 학교를 그만둬야 하는 상황 이었지만 , 그렇게 3일을 꼬빡 내 곁에 있엇다. 처음 이틀간은 의식을 못했지만 , 같이 자리를 지켜준 다른 친구가 녀석의 시험을 걱정할 때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 아무리 도서관으로 가라고 종용해도, 녀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녀석을 배려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도리 없이 3일밤을 셋이서 같이 새웠다. 하지만 녀석이 내 어께를 감싸쥐고 그렇게 울던 그날.... 나는 '지금 나를 위해 서 울어주는 그 눈물을 반드시 기억하고, 언젠가는 너를 위해서 내가 그만큼 울어주겠다'고 결심했다.

 

우여곡절 끝에 상이 치러지고 다시 일상이 시작되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

시간이 지나 결국 그 일도 과거로 돌아갈 즈음, 서서히 현실의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햇다. 가장이 갑자기 없어진 집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경제적 위기가 서서히 남은 가족들에게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만으로 극복되기에는 그 뿌리가 너무나 깊었다. 그것을 극복하고자 어머니가 하신 일이 실패하면서 경제적 위기는 엄청난 파국으로 치달앗고, 내가 성년이 되어 대학을 마칠 때쯤에는 내 앞으로 엄청난 양의 부채가 넘겨졌다.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경제적으로 곤궁함을 몰랐던 내게 그것은 거의 절망적인 수준의 좌절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그때 나의 버팀목이 되어준 친구는 여전히 그 두사람이었다.

나는 한 친구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학교를 졸업했고, 또 녀석의 도움으로 재기를 향한 투지를 불살랐다. 내게 일차적인 목표는 이 끔찍한 환경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 다행히 그전부터 관심을 가졌던 투자론에 대한 공부는 계속되었지만 , 현실적으로 그 상황을 극복할 만한 아무런 기반이 없었다.

 

당시 돈으로 수억원이 넘는 빚을 떠안은 채 위기를 극복하기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과 다름 없었다. 어렵사리 전문의 과정을 마치고 종합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했지만, 그것은 이 문제의 해결점이 되지 못했다. 더구나 당시만 해도 타협을 잘 몰랐던 괴팍한 성격은 점점 제도와 부딪히면서 종합병원에서의 근무를 고민하게 했다.

 

결국 개업을 선택했다.

당면한 문제는 일단 경제적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었지만, 내게는 개업을 준비할 단 한 푼의 돈도, 당장 다음 달 이자를 갚을 여력도 없었다. 그러나 두 친구는 일가친척마저 외면한 내게 다시금 손을 내밀었다.

녀석은 레지던트 4년간 모은 적금 통장을 내게 건넸고, 다른 한 친구는 어려운 환경을 속속들이 알면서도 이미 그전에 내아내가 되는 길을 선택했었다.

 

친구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준 돈을 모아 대전 인근의 작은 도시에서 거의 스러져 가던 건물에 우러세를 내어 병원을 개업하던날, 난ㄴ 병원 지붕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이것이 내 인생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그때 나를 찾는 환자들은 모두 내가 손을 내밀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그분들이 나를 살려냈다.

 

일생동안 밭에서 일하느라 무릎을 못쓰는 할머니, 식구들을 위해 죽도록 일하다 간경화로 쓰러진 이웃들이 주변에 있었다. 이미 바닥에가 있었던 나는 그들에게서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동지의식을 느꼈고, '라뽀'라고 불린ㄴ 공감대를 수도 없이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을 위해서, 또 나를 위해서 3년 동안 24시간 진료했다. 정규 진료가 끝나면 왕진을 다니고, 밤에는 병원 소파에서 쓰러져 자면서 새벽에 문을 두드리는 환자를 받았다.

 

일요일이든 설날이든 추석이든 365일 24시간 내내 병원을 지켰다. 그때 내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몇 년의 세월이 흘러 나는 의사로서 또 투자자로서 작은 성과를 거두며 그 질곡으로부터 벗어났다.

내가 절망을 디디고 일어서게 된 가장 큰 동기는 바로 두 번이나 나를 위해 희생한 녀석을 실망시킬 수 없고, 십수 년을 친구로서 아내로서 성원해준 또 다른 친구를 슬프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결과 내 심장에 약간의 이상 신호가 발생했다. 지나친 과로가 원인이었지만 다행히 별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 당시 안동에 있던 녀석이 불쑥 처들어와서 억지로 나를 대학병원을 끌고 가며 내게 한 이야기를 잊을 수 없다.

 

"만약 심장을 갈아야 한다면 내 것이라도 줄 테니, 아무 걱정 마라."

 

나는 녀석의 말을 웃어넘겼지만, 그것이 진심이란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지금 녀석과 함께 병원에서 진료를 하고 있다. 그리고 녀석은 20ㅣ년전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내가 가끔 자리를 비우면 내 진료실에 대신 안아서 환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죄송해요. 지금 박원장이 서울에 강연하러 가서, 제가 대신 봐드릴게요."

아직 녀석은 나를 대신해서 죄송하다고 이야기 하면서도 다음날 내게 이렇게 말한다.

"서울 갔다 오느라 피곤하지 않냐? 좀 더 자고 천천히 나오지 그러냐? 환자는 나 혼자 봐도 된다."

 

그러고 보면 나는 아직 녀석을 위해 대신 울어주지도, 녀석이 건넨 돈을 돌려주지도, 늘 내 대신 죄송하다고 말하는 녀석을 위해 고맙다는 말도 한 번 안 하고 살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 나는 녀석을 위해, 그리고 내 아내를 위해 꼭 한 번 울어줄 생각이다. 그래서 농담처럼 늘 이렇게 말한다.

 

"나는 반드시 너희들보다 오래 살 거다. 너희들 모두 무덤에 묻어놓고 내가 니들 산소에서 흙을 꼭꼭 밟으면서 노래라도 한 곡 부를 거다.

"인생은 나그네길....'하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 노래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십팔번이었다.

 

책 내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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