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좋은 글

상추쌈/손광성

다림영 2011. 6. 17.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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쌈은 마루에서 먹어야 제맛이다. 아파트의 좁은 방이라고 해서 안될 것은 없지만 이왕이면 널찍한 청마루가 더 좋다. 마루의 널빤지는 아귀가 좀 덜 맞아도 무방하다. 마루 빝에서 시원한 냉기가 올라오기 대문이다. 한옥의 구조가 대개 그렇지만 마루의 북쪽은 탁 트여 있어야 한다. 거기에 대숲이라도 있어 이따금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다른 음식도 그렇지만 쌈은 혼자서 먹을 것이 못 된다. 궁상맞아 보인다. 독상보다는 겸상이 낫고 겸상보다 온 가족이 모야 앉아서, 여보, 당신, 엄마 하면서 왁자지껄 떠들며 먹어야 제격이다. 식욕도 분위기를 탄다는 것을 모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소반은 폈다 접었다 하는, 옛날 우리들이 어렸을 적에 늘 둘러앉아 먹던 그런 두리소반이면 더 좋을 것이다.

 

쌈을 싸는 밥은 찬밥이어야 한다. 그러나 질어서는 못쓴다. 더운 밥은 찬 상추와 궁합이 맞지 않고 진밥은 질척거려서 개운한 맛이 덜하다. 차라리 된 편이 낫다. 흰 쌀밥이라고 아니 될 것은 없지만 삼 할 정도는 보리가 섞인 것이 구수하다.

 

장은 고추장보다 된장에 참기름이며 갖은 양념을 다 석은 쌈장이 최고다. 맛도 그 편이 구수하다. 세상이 바뀌어도 변할 줄 모르는 것이 더러있다 . 어려서 먹던 음식에 대한 향수가 그것이다.

 

토종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어려서부터 먹던 상추가 있다. 조선상추라고 하는데 자르면 잎자루에서 흰 유액이 나오는 것이다. 잎 가장자리가 붉은 빛이 돈다고 해서 붉은 상추라고도 한다. 붉지 않은 것을 흰상추라 하고, 치마처럼 생겼다고 해서 치마상추라고도 하는데 나중에 들어온 것이다. 요새는 양상추가 들어와서 많이들 먹는다. 치마상추는 잎도 넓고 물기도 많아서 시원한 맛이 재래종보다 낫다.

 

양상추는 마요네즈에 찍어먹으면 그만이다. 사각거리는 소리는 청각을 상쾌하게 하고 우리의 지친 미각에 생기를 더한다. 기름기 많은 양식에 잘 어울린다. 하지만 쌈에는 맞지 않는다. 바스라지기 쉬워서 쌈을 쌀 수가 없다. 시원하기는 하지만 싱겁기는 치마상추도 마찬가지다. 부드럽고 뒷맛이 은근하기로는 조선상추를 따를 것이 없지 싶다. 신토불이身土不二다.

 

요새는 겨울에도 상추가 나온다. 상추뿐인가. 꽃도 제철을 잃은지 오래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지조니, 절개니, 애국이니 하면 웃는다. 그러니 음식즘이랴. 이제는 시식時食이란 말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다. 상추쌈의 풍미는 어디까지나 초여름과 초가을이다. 가을상추는 문을 잠그고 먹는다는 말은 사실이다. 겨울에는 섬뜩해서 손이 가지 않고 장마철에는 풀냄새가 나서 맛이 덜하다.

 

세상에서 우리처럼 쌈을 좋아하는 민족도 드물 것이다. 무엇이든 싸서 먹기를 좋아한다. 어떤 사람은 우리의 음식 문화를 '탕湯'의 문화라고 하지만, '쌈'의 문화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만큰 우리는 쌈을 좋아한다.

 

상추쌈만이 아니다. 배추잎으로도 싸고 호박잎으로도 싸고 깊을 가지고도 싼다. 삼겹살도 싸서 먹고 불고기와 등심도 싸서 먹어야 직성이 풀린다. 게다가 요새는 생선회까지 깻잎에 싸서 먹는다. 김치에도 보쌈김치라는 것이 있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네 조상님들께서는 여자도 쌈을 싸오고 남자도 쌈을 싸 왔다. '보쌈'이라는 약탈혼 풍습이 바로 그것이다. 로마 사람들이 사비니 족 여인을 약탈했듯이, 다른 나라에도 약탈혼이라는 것이 일찍부터 있었지만 그것을 쌈이라는 개념의 말로 표현했다는 소리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양식에도 쌈에 해당하는 것이 있을까? 햄버거가 그것이다. 그런데 햄버거는 상추가 속으로 들어가고 빵이 겉으로 나와 있다. 동서양 문화의 차이는 밥과 상추의 위치와 역할마저 뒤집어놓고 말았다. 그런데 이것을 쌈이라는 범주에 넣어야 할지 어떨지 나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내가 상추쌈을 쌀 때면 될 수 있는 대로 크게 싼다. 우선 한식기의 밥을 네 등분으로 나눈다. 그 다음 찬물로 갓 헹군 상추에 쌈장을 넉넉히 바른 후에 나누어 놓은 밥의 사분의 일을 담는다. 그 위에다 콩자반이며 어리굴젓이며 굴비 같은 것을 얹고 상추잎을 여민다. 그 크기가 송구공만큼은 아니지만 큰 배 만큼은 좋이 된다.

 

그것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우적우적 먹어 들어간다. 좀 야만스럽게 보일지 모르지만 맛은 그만이다. 음식이란 입으로만 먹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도 먹고 손으로도 먹는다는 사실을 모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 입씩 먹어 들어가노라면 요 대목 조 대목 지날 때마다 별미와 만나게 된다. 콩자반이 십힐 때의 고소한 맛이 있는가 하면 어리굴젓의 짜릿한 맛이 있다. 굴비는 상추의 상큼한 식물성과 대조를 이루면서 묘한 맛을 창조한다. 상추쌈이 아니고서는 맛 볼 수 없는 맛의 새로운 경지가 아닌가 한다. 거기에다 드거운 아욱국이라도 훌훌 마시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다만 한 가지 조심할 점이 있다면 다 먹을 때까지 쌈에서 입을 떼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입을 떼는 순간 밥이며 콩자반이 쏟아져 내리는 낭패를 보게 되고 만다. 

이렇게 해서 세개만 먹고 나면 뿌듯하다. 뭔가 제대로 먹었다는 기분이 든다. 나머지 사분의 일은 먹지 않는다. 다른 욕망도 그렇지만 식욕도 마찬가지다. 삼 할 정도 미달이라고 생각할 때가 가장 알맞는 때이다 . 양생養生의 비결이라고 할 것까지야 있겠는가.

 

나는 여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름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즐거움이 세 가지가 있다. 창가에 앉아 조용히 빗소리를 듣는 기쁨이 그 중 하나고, 퇴근 후에 냉수로 샤워를 하는 상쾌함이 두번째이다. 일요일 점심 같은 때는 소매를 걷어 붙이고 상추쌈을 싼다. 찬밥이 남아서 걱정인 아내의 이마에서는 주름살이 펴지고 아이들은 별식이라고 깔깔거리며 좋아라 한다.

 

우리는 물과 쌈장으로 얼룩진 입언저리를 서로 손가락질하며 마냥 웃어도 좋은 것이다. 저만치 물러서는 삼복 더위, 이것이 여름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또 하나의 즐거움인가 한다.

 

책< 달팽이 /손광성>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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